조글로로고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그 위대한 탄생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1월24일 07시57분    조회:865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봉호

색 바래지 않는 예술인생---저명한 음악가 김봉호선생님의 50년 창작인생을 더듬어

 

들어가며

누군가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음악은 유일한 합법적 마약이라고 했다.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그만큼 음악은 우리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삶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족한것이 많고 단조롭던 시대에는 더 그러했을것이다.

1960년대에 창작된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붉은 태양 변강 비추네”, “나는 혁명을 위해 떼목 모네” 등 노래와 개혁개방초기에 창작된 “아름다운 마음”, “금실북과 은실북”, “쫭족아가씨”…등 노래들은 그야말로 한 시대를 대표하고 그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이런 곡들이 우리민족 음악가에 의해 탄생되였다는게 우리 후대들에겐 더없이 자랑스러운 일이다.

김봉호선생님과는 4년전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주년 프로그램 특별제작때문에 인연을 맺게 되였다. 다짜고짜 전화를 해 인터뷰를 요청했고, 생각밖에 선생님은 흔쾌히 승낙을 해주셨다. 쟁쟁한 곡들을 많이 창작하신 이름난 분인것만큼 상대하기 어려울거라는 상상과는 달리 선생님이 주는 첫인상은 푸근하고 친절하기만 했다. 그리고 칠순을 넘기셨다는게 전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젊은 모습이였다. 늘 마음속에 고운 선률을 담고 사셔서 그럴가.

(1)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 위대한 탄생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자택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이는것은 피아노였다. 딱딱한 대화를 어떻게 열어갈가 고민중이였는데 피아노가 눈에 들어오자 선생님께 먼저 연주를 부탁했다. 너무나도 귀에 익은 아름다운 선률이 피아노 건반을 타고 온 집안에 기분좋게 울려퍼졌다.

우리 맘속에 붉은 태양,

조국변강 비춰주네,

장백천리 해란강반 붉은 기발 물결치네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차분한 목소리로 노래까지 하면서 연주를 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였다.

피아노 선률과 함께 선생님의 이야기는 시작되였다.

1964년 6월말, 연변에서는 전 주 전문단체 문예합동공연이 있었다. 선생님이 소속돼 있던 화룡현 문공단도 공연에 참가했고 마지막 날 총화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연변가무단 정진옥단장은 총화대회에서 자신의 창작경험담을 소개하고 끝으로 대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그 제안이 선생님의 인생을 바꿔놓을줄 누가 알았으랴.

정진옥단장은 “연변은 로해방지구이고 모택동동지의 올바른 지도아래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당의 령도와 모주석을 노래한 노래가 적고, 있다고 해도 질 높은 노래가 없다”며 누가 이와 관련해 우수한 노래를 창작할지 기대해보겠다고 말했다.

보고를 듣고 있던 선생님은 곁에 앉은 한윤호선생님의 옆구리를 쳤다. 직접적인 대화는 없었지만 한윤호선생님은 그 뜻을 곧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한 노래는 이렇게 무언의 약속과 함께 잉태되였다.

문예합동공연이 끝나 다들 화룡으로 돌아갔고, 그 해가 지나도록 한윤호선생님은 가사를 내놓지 못했다. 선생님은 가사가 애타게 기다려졌지만 조르기도 무안한 일, 속으로 끙끙 앓기만 했다.

그렇게 한해가 가고 1965년 가을 어느 하루, 선생님이 악대실에서 한창 반주곡을 정리하며 옮기고 있는데 한윤호선생님이 찾아왔다. 한선생님은 옆구리를 찌르면서 할말이 있다고 선생님을 악대실밖의 울바자 옆에 불러냈다.

“내가 모주석을 노래하는 가사를 썼는데 한번 보오!”

그 말을 듣자 선생님은 흠칫했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해 도저히 마음을 다잡을수 없었다.

“지금은 머리가 복잡하니 집에 가 조용히 보겠다”고 말하고나서 선생님은 가사를 조심스럽게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머리속에는 온통 작곡에 대한 생각뿐이였다. 선생님은 이번 곡은 꼭 민족성을 살려 정성껏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분은 모두 창작에서는 햇내기였다고 한다. 전공이 손풍금이였던 선생님은 문공단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민족악기, 양악기도 다루는 다면수이긴했지만 창작은 거의 해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문공단도 창작조라는게 따로 없이 모두 군중창작으로 나갔다.

(우리 같은 햇내기가 어찌 연변인민을 대표할수 있겠는가, 단지 우리의 소박한 “계급” 감정으로 모주석을 노래해야겠다,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의 특색을 살릴수 있을가...)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며 어렵게 퇴근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선생님은 장구와 가야금을 특별히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선생님의 창작시절

장백산 봉이마다 보배많아 보배산

기름진 공사벌엔 풍년들어 황금산

보배산, 황금산은 그 누가 주었나

경애하는 우리네 령수, 모주석이 주셨지

아, 좋구나 우리네 연변은 살기도 좋아서

사람마다 한 마음으로 모주석을 노래하네

조용한 곳을 찾아 가사를 보면서 선생님은 가야금을 뜯었다. 가야금을 익숙하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특색이 짙은 안딴 절주로 열심히 곡을 맞춰보았다. 창작을 끝내고 나니 흥분돼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 일찍 한윤호선생님을 찾아갔다. 한창 아침식사중인 한윤호선생님을 무작정 밖으로 불러냈다.

“내가 곡을 다 썼으니 한번 들어보오!” 격앙된 목소리로 선생님은 밤에 쓴 곡을 부쳐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노래를 다 부르고도 한참이 지났는데 한윤호선생님은 가타부타 말이 없고 오히려 표정이 엄숙하게 굳어졌다.

(내가 쓴 곡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구나...)

선생님은 저으기 걱정되였다.

“다시 한번 불러보오!” 한윤호선생님은 노래를 다시 부탁했다. 풀이 죽긴 했지만 선생님은 다시 정서를 살려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다 듣고 난 한윤호선생님은 주먹으로 선생님의 어깨를 툭 내리치면서 “아주 좋소!”라고 한마디를 힘있게 내뱉었다.

그때를 회억하며 선생님은 마치 가슴을 억누르던 바위덩이가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듣는듯 했다고 하셨다.

며칠뒤, 문공단 당지부서기가 농민업외문예합동공연이 곧 열릴텐데 새 노래가 없어 걱정이라며 선생님에게 그 곡을 베껴줄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노래는 당시 화룡현 서성대대 18살 나는 김순자사원에 의해 처음 불려졌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사전예고도 없이 농민들은 공연 가는 길에 직접 손풍금을 치면서 김순자사원에게 노래를 배워줘 공연에서 부르게 했다고 한다. 그렇게 짧은 시간내에 배워 부른 노래지만 대회에서 절찬을 받고 금방 전반 사원들에게 보급되였다. 이 같이 노래는 애초부터 강한 생명력을 과시하였다.

노래가 점차 보급되면서 선생님은 신심을 얻게 되고 “우리의 태양-모주석”으로 돼 있던 노래 제목을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로 수정할것을 한윤호선생님에게 제안했다. 그리고 가사도 당시 정세에 맞게 부분적으로 수정했다.

그해 겨울 길림성 문화실무회의가 장춘에서 열렸다. 화룡현 문공단은 길림성에서 하향공연 2등상을 받아 연변대표단과 동행하게 되고 회의 축하공연무대에까지 오르게 되였다. 그때 공연종목의 하나로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가 선정되였다. 노래는 가야금 병창으로 편곡돼 공연에서 불려졌고 회의에 참가한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노래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렇게 노래는 또 연변을 벗어나 전 길림성에까지 보급되였다.

그 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와 선생님은 문공단을 따라 변방 순회공연을 다녔다. 그러던중 이 노래가 연변잡지의 뒤표면에 실린것을 우연히 보았다. 직접 투고한것이 아니였지만 노래가 잡지에 실린것을 보고 선생님은 하늘을 그대로 얻은듯 무등 기뻤다. 잡지에는 “장백산 봉이마다 보배많아 보배산”이 “우리네 연변은 산마다 보배산”으로 가사가 바뀌였다. “연변”을 한결 더 각인시켜줄수 있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뒤 선생님은 잡지사로부터 원고료 5원을 받았다.

한창 순회공연에, 창작에 바삐 돌아치던 1966년 여름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거리마다 대자보가 나붙고 사람들의 마음은 싱숭생숭했다. 선생님도 시국을 피해갈수 없었다.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에 대해 부정적인 립장을 표명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잇달아 “전주가 계급성이 없다, 노래가 모주석의 형상을 모독했다, 표절했다” 등등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일로 선생님은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해 8월 1일 건군절, 룡정 연길현 공연팀이 226군병원에서 공연을 하게 되였다. 공연팀은 손풍금수가 없어 화룡현 문공단에 부탁을 하였고 그 부탁에 선생님이 따라나서게 되였다.

무대에서 공연준비를 다그치고 있는데 부대가 잇따라 들어오면서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웨치면서 열기를 돋구었다. 그러던중 공연을 앞두고 한 부대가 한어로 선생님의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를 구성지게 불러제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 일손을 멈췄다.

(해방군이 내 노래를 부른다는건 나를 인정하고 내 노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선생님은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 저절로 눈물이 두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야 살았구나…) 선생님은 대뜸 깊은 수렁속에서 빠져나와 해볕을 본듯 눈앞이 훤하게 밝아졌다. 그때로부터 선생님의 명성은 날개 돋친듯이 전국에 알려졌다.

1972년 길림성 작곡 학습반에서 가곡 “당의 빛발 연변을 비추네”를 창작하며

그후 선생님은 연변조선족자치주 관계부문으로부터 곡은 그대로 두고 가사를 다시 쓴뒤 찾아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선생님은 한윤호선생님과 의논한뒤 “우리 마음속의 붉은 태양, 조국변강 비춰주네”로 가사를 고쳐 쓰고 연변인민방송국 회의실에 찾아갔다. 문을 떼고 들어서니 당시 작사분야에서 꽤 이름있는 선생님 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 끝에 부분적 가사를 재수정하고 화룡현 문공단의 황인순가수가 레코트에 노래를 록음했다.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 공연 현장, 노래에 황인순가수, 손풍금반주(왼쪽)에 김봉호선생님

그해 길림성 혁명위원회가 설립되는 날, 중앙인민방송국에서 인민일보 사설을 발표하였다. 사설은 밤 8시 뉴스로 방송되고 사설 앞뒤에는 황인순이 부른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가 두번 방송되였다.

그렇게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는 전파를 타고 전국에 울려퍼졌다.

선생님은 중앙인민방송국 관계자로부터 모든 노래가 금지되였던 그 시절, 유일하게 이 노래가 방송을 타게 된 경위를 전해들었다. 바로 주은래동지가 특별히 이 노래를 점찍어 주었고 그 관련 자료는 지금까지 방송국에 보관되여 있다.

이렇게 선생님의 대표작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는 파란만장한 세파를 겪고도 전국 인민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극좌로선으로 하여 가사가 지금에 와서는 비난을 받을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선률만은 여전히 격정으로 차넘치던 그 시절 추억을 생생하게 재현시켜주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중앙인민방송국 조향란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44
  • 지난 세기 90년대에 중국에서 맹활약을 했던 구련옥 가수의 ‘새로운 여정’ 음반 발매 기자간담회가 지난 22일에 해내외에서 동시에 펼쳐졌다. 앨범 《새로운 여정》 출시한 가수 구련옥 그녀는 한국에서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 “오랜 시간 팬들 곁을 떠나있다가 다시 돌아오니 가슴이 너무 설레인다&rdq...
  • 2021-10-25
  • 추이젠이 새 앨범 '페이꺼우'를 발표하자 예전의 비판적이던 추이젠이 돌아왔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한물 갔다는 말도 있다. 그는 “유행이 조작됐다면 나는 한물간 게 낫다”고 했다. 기자/퀘이얜장 (隗延章) 추이젠은 올해 이미 예순 살이 되었는데 귀밑머리와 수염에 서리가 한 겹 끼었다....
  • 2021-10-18
  • 연변춘화전자풍금양성쎈터 원장 허춘화. 1980년대초, 전국적으로 방송예술단 이름을 가진 단체가 북경, 상해, 연변 세곳 밖에 없었는데 그시절 연변방송예술단에서는 1978년까지 전국에 한대밖에 없었다는 립체식 전자풍금 한대를 어렵사리 장만했다. 그런데 그때까지 국내 한다하는 예술학교들에 전자풍금 전업이 없다보니...
  • 2021-10-14
  • 우리 말 표준화의 전도사 □ 김천   요즘 우리 말 방송계 레전드격인 서방흥 선생이 ‘연변조선족자치주화술학회’를 설립해 세간의 화제에 올랐다. 칠순이 넘은 년세에 이뤄낸 집념의 쾌거다.   서방흥 선생은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수십년간 잔뼈를 굵히며 몸담아온 방송가의 ‘거두’이고 ...
  • 2021-09-26
  • 길가에 피여난 이름없는 풀일지라도    —웃음으로 무대를 주름 잡는 배우 김영식   □리은희          연변에서 ‘앵무새’ 하면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으리만치 알려져있다. 성급 무형문화유산 설창예술류 전승인인 김영식, 자신의 본명보다...
  • 2021-09-02
  • “오빠의 편지”로 히트를 치고 “해바라기”, “보리차”, “부모”, “로년을 잘 보내시라” 등 대표곡들로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구련옥 가수가 갑자기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2015년 연변TV음력설야회 한국편 무대에서 “로년을 잘 보내시라” 노래를...
  • 2021-08-04
  •  팔순 '아마추어화가' 최봉순의 개인전이 7월 2일, 료녕성조선족미술촬영서예협회와 심양시조선족로교사협회의 공동 주최로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열렸다.     최봉순은 심양시조선족제6중학교 퇴직교사다. 1997년에...
  • 2021-07-06
  • 미술은 내 생의 동력이다   장철주 화백   중국미술가협회 회원이며 길림성 조선족 미술인협회 사무 부총장인 장철주 화백(1962년생)은 2006년에 작품 “춘하추동”과 “량산의 자매”로 중국미술가협회 19차 신인신작전시에 입선되였으며 그의 작품 “기억을 잠그다”는 2010년 ...
  • 2021-06-21
  • 〈털 없는 개〉(리종훈, 김웅걸 작, 1991년), 〈헤톨부대〉(리광수 작, 1996년), 〈금개구리〉(김영, 최인호 합작, 1999년) 등 좋은 연극을 만들어 중국 조선족 연극 무대를 다채롭게 장식했던 연출가 최인호(1946년―2007년), 그는 ‘괴재(怪才)’, ‘기재(奇才)’로 불릴 만큼 인간사회의 힘들고 지...
  • 2021-05-27
  • 연변가무단 원 부단장, 국가급지휘가 안국민   2001년 7월, 중국음악가협회에서 주최한 중국공산당 창건 80돐 기념 중국교향악작품음악회에서 한 안국민이 창작한 관현악 〈내가 살던 고향〉이 중국교향악단에 의해 힘차게 연주되였다. 연주는 중국조선족 전통민간악기인 횡적, 단소, 장새납, 장고 등을 포함하였기에...
  • 2021-05-20
‹처음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