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리와 친숙해진다는것이 참 쉬운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신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런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1996년에 연변가무단에서 장고연주자로 퇴직하고 그후 쭈욱 연변대학예술학원에서 전통악기 강의를 해온 김인석(81살)옹, 그가 “우리 소리”의 미래가 참으로 걱정된다면서 한 얘기이다.
한평생 한 악기와 동지처럼 함께 할수 있다는것, “소리”에 평생을 바친 예술가는 오롯이 그만의 향기를 지닌다. 장고와 함께 한 세월만 60여년, 단 하루도 가야금을 연주하지 않고는 “흥”이 나지 않는다는 장고의 명인 김인석옹, 18일 그의 자택에서 인생과 버무려진 장고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일상의 소소한 대화에서 음악관, 인생관까지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단칼같은 답변을 쏟아냈다.
그와 장고의 만남은 연길시가무극단에서 무용수로 있던 1957년으로 되돌아간다. 21살 때였다. 그해에 전 주적으로 연변가무단무용전수반이 조직됐는데 마침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 학습반에서 장고를 가르치던 하태일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장고는 이후 그의 60여년 세월 반려자로 됐다. 장고를 보는 순간 그는 감전된듯 멍해졌고 한참을 서서 장고를 뚫어지게 쳐다봤다고 한다. 운명이였다. 장고와 김인석옹과의 첫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장고가 너무 신기했죠. 집에 돌아가서 모양을 흉내내서 장고를 만들었지요. 널판자 같은것에 천을 대고 철사줄과 바줄로 메서 그걸 혼자서 갖고 놀았어요.”
평생을 장고를 옆에 끼고 살아온 그에게는 아픈 기억도 많다. 문화대혁명은 그에게서 장고를 앗아갔고 그는 장고 대신 어쩔수없이 타민족 전통음악인 경극을 부르고 단면고를 연주하면서 서러움을 꾹꾹 눌러야 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상하네요. 10년동란이 끝난 뒤에 다시 장고를 받아안았던 그 순간을 말입니다. 어린 아이마냥 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엉엉 울어댔지요.”
이미 놓은줄 알았던 장고를 여전히 마음에서 놓지 못했던것이다.
“한번은 비오는 어느날 거리를 걷는데 어데선가 귀에 익은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거예요. 장고소리인줄 알았더니 기타소리였어요. 환청이 들린건데 ‘내가 미쳤구나’싶었죠.”
그는 “장고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다른것과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기품은 잃지않는 울림이 매력적이죠. 장고는 ‘내가 최고다’라고 나서는 악기가 아니예요. 다른 악기가 내는 소리를 받쳐주면서 어떤 때는 강력한 리듬으로 치고 나가죠. 다 포용하면서 섬기는 리더 느낌이라고 할가요?”라고 장고에 대한 례찬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장고는 대중들이 널리 사용하여왔는데 산조합주나 시나위 등에서는 반주악기로 사용되지만 사물놀이 등에서는 중요한 작용을 한다.
현재 우리 지역에서 사용하고있는 장고는 연주의 편리를 위해 장고채의 길이는 일바적으로 40센치메터 좌우로 되여있고 그의 무게는 대체로 만년필 하나의 무게에 해당한다. 우리 조선족 민족장단은 장기간에 걸쳐 리론보다도 실천 즉 연주에 힘을 많이 기울여왔다. 하기에 장단에 대한 리론적규명은 중요한 의의를 갖고있기도 하다.
지난 2004년 김인석옹은 근 10여년이 다 되는 시간을 들여 우리의 신명을 가르칠 교재와 리론을 개발했다. 그가 직접 집필한 《장고연주와 조선민족장단》은 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교재로 쓰이고있다.
“장고가 없었으면 인생이 참 외로웠을것”이라는 김인석옹은 “장고와 더불어 행복했고 인생공부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있는 전통악기의 현실에 대해 그는 할말이 많다.
“전통은 현재를 지탱하고있는 중요한 기틀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전통적인것을 제멋대로 고치고 하니 전통성이 없어져 속상한 일이 아닐수 없네요.”
그리고는 “함께 어울리던 이들 중에서 내가 제일 어렸는데 다들 죽고 나만 살아있네. 나이 먹으며 다들 죽게 마련이지. 지금은 옛날처럼 장고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네.”라고 서글픈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김인석옹은 전통적이것을 그대로 배우는것은 힘이 들기 때문에 완벽하게 장고를 다룰수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아쉬워한다.
전통은 과거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화적 가치나 유산이다. 시대가 바뀌여도 전통을 우리 사회의 기본질서라고 보는 시각이 팽배해 가는 지금, 장고소리를 올곧게 지켜 온 김인석옹의 자리가 더더욱 크게 느껴지고있는건 어쩔수가 없다
정부가 장고와 같은 많은 전통악기를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전승체계를 마련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전문가의 육성이나 이를 즐기려는 애호가의 층은 엷기만 한 상황에서 그동안 김인석옹의 건재는 후진들에게 커다란 버팀목이였던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것이다.
그동안 전국 각지는 물론 1985년에는 미국에서도 방문공연을 하면서 그가 이토록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리는데 열성인것은 연변을 찾는 많은 외국인과 국내인들이 연변에 대해 너무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변하면 랭면, 장백산을 주로 떠올려요.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너무나 모르는게 안타깝죠. 우리가 얼마나 다양한 문화를 갖고있는지 당연히 알려야죠.”
그는 연변을 알리는데는 전통무대예술로 접근하는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갖고있다.
그리고 전통문화 알리미 노릇을 자임하는 또 하나의 리유는 그 스스로가 장고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글·사진 신연희 기자/연변일보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