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2)
맨발로 공장을 건설하던 그 때를 잊을 수 없어
ㅡ제1자동차공장의 원로 김동철
“아버지는 요즘도 자꾸 기차표를 끊어 고향에 가보자고 합니다.” 장춘 제1자동차공장 원로 김동철의 둘째딸 김영옥은 이렇게 말한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려고 자식들은 2017년 10월에 차 두대를 내서 병환에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룡정시 백금향 평정산에 갔었다. 그전에도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왔었다. “정작 아버지의 고향마을이라고 하는 곳을 찾아가니 마을은 진작 없어지고 옥수수만 무성했어요.” 다행히도 주변을 돌다가 ‘평정산'이라고 새겨진 돌비석이 발견되여서 김동철로인은 그것나마라도 어루만지며 고향에 대한 추억을 아련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ㅡ맨발바람으로 공장을 건설하던 초창기시절
1954년 7월 김동철은 길림시에 있는 길림재정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장춘에 있는 제1자동차공장에 배치받았다. 제1자동차공장이 1953년 7월에 정초식을 가졌으니 김동철은 말그대로 이 공장 원로중의 원로요, 개척자중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을 맞은지 얼마 안 되는 중국의 상황은 당시 모택동 주석의 말대로 “지금 우리가 뭘 만들 수 있는가? 책걸상이나 만들고 차주전자와 차잔을 만들며 곡식을 재배해 가루내 밀가루를 만들고 종이나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자동차 한대, 비행기 한대, 땅크 한대, 뜨락또르 한대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런 배경하에 우리 나라에서는 ‘제1차 5개년 계획(1953년ㅡ1957년)'을 제정하고 공업건설을 중점으로 하는 경제건설에 력량을 집중, 제1자동차공장은 ‘1.5' 계획의 중점 프로젝트로 선정돼 쏘련의 지원으로 장춘시의 서부에 위치한 허허벌판에서 시작을 뗀다.
“당시는 저뿐만 아니라 전체가 건설현장에 동원되였지요. 맨손으로 돌과 건축자재들을 들어 옮기면서 땀벌창이 돼도 죽기내기로 일했지요. 하루빨리 우리 두손으로 자동차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김동철은 자동차공장이 처음 들어설 때의 일을 이렇게 회억한다. 제1대 건설자들의 노력으로 공장이 들어서서 3년후인 1956년 7월 13일 드디여 우리 나라에서 자체로 생산한 첫 ‘해방패' 트럭이 세상에 태여났으며 온 공장은 환호와 기쁨 속에 잠겼다.
ㅡ37년 동안 한 부서에서 한우물을 파다
1954년 김동철은 제1자동차공장에 배치받아 기본건설처에 들어갔다. “기본건설처는 계획과, 생산과와 재무과로 나누었는데 저는 계획과에서 일했지요.” 모든 것이 건설단계였던 당시 기본건설처는 자동차공장에서 할 일이 태산 같았다. 공장건물을 지어야 하고 로동자들의 주택과 기숙자도 지어야 하며 전기, 상하수도, 도로...하여튼 거의 모든 일이 기본건설처를 거쳐가야했다.
2005년 6월 16일 전임 국무원 리람청(앞줄 가운데) 부총리가 제1자동차공장을 찾아 함께 사업했던 김동철(뒤줄 왼쪽 첫번째) 등 로동지들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리람청 부총리는 자동차공장시절 김동철의 직속상사이기도 했다.
“이 시기 후에 국무원 부총리로 지냈던 리람청동지도 저와 한 과에서 일했지요.” 리람청 부총리는 복단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부터 1959년까지 제1자동차공장 계획과에서 계획원, 부과장, 과장으로 있다가 북경에 있는 국가제1기계공업부로 전근해갔다. 후에 김동철도 계획과에서 과장으로 있었으니 리람청 부총리는 그의 직속 선배령도인 셈이다. 2005년 6월 16일 리람청 부총리는 제1자동차공장을 찾아 불타는 청춘을 자동차공장의 건설사업에 바쳤던 김동철 등 오랜 동사자들을 찾아 그 때 시절을 회억하면서 기념촬영도 남겼다.
김동철은 계획과에서 37년간 일하면서 오로지 한우물만 열심히 파왔다. 그는 부서의 동료들을 거느리고 맡은바 사업을 빈틈없이 밀고 나갔는바 모두가 공인하는 업무능수로 되였으며 수차나 우수공산당원, 선진사업일군의 영예를 따냈다. 1989년 정년퇴직 수속을 밟은 후에도 제1자동차공장의 수요로 재회부문에 가서 2년간 사업하면서 젊은 일군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재간을 남김없이 전수하였다.
길림신문/리철수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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