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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전정혁
전정혁 심양항일역사자료전시관장 “자전거 타고 시골마을 돌며 독립군가 채록했어요”
90년대 채록한 노래들로 책도 펴내··· ‘독립군용진가’를 차 안에서 구성지게 부르기도
전정혁 심양항일역사자료전시관장
버스가 통화(通化) 유하(柳河)현 삼원포(三源浦)를 떠나 광화(光華)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옛터로 접어들 무렵, 안내를 맡은 전정혁 심양한중문화교류원 항일역사자료전시관장이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독립군 용진가’였다.
“동만주 넓은 들을 쳐서 파하고 여진국을 토벌학 개국하오신/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나가 싸우자/ 나가세 전진 장으로, 나가세 전진 장으로/ 금수 도산 무릅쓰고 나갈 때에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이천만번 죽더라도 나가 싸우자”
귀에 익은 선율이었다.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군 용진가’ 두 가지를 불렀다. 그중 위에서 소개한 노래가 박진감이 있어서 더 널리 불렸다고 그는 소개했다.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방문한 것은 7월6일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월드코리안장학생과 신흥무관학교 후신으로 알려진 경희대 졸업생들로 이뤄진 32명의 만주독립운동사적 탐방단은 7월1일부터 6일까지 심양-집안-백두산-연길-통화를 도는 2천km의 여정을 소화했다. 통화를 중심으로 주변을 도는 일정이었지만, 정작 통화에 있는 경학사화 신흥무관학교를 방문한 것은 5박6일 일정 중 5일째 날이었다.
“서북으로 흑룡대원 남의 영절의/ 여러 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 중 어린 것들 품에다 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결치며 돈다”
신흥무관학교 교가다. 미국 조지아행진곡에 맞춰서 부른 노래다. 전정혁 관장은 차 안에서 이 노래도 구성지게 불렀다. 그가 독립운동가 후손이어서인지, 아니면 신흥무관학교 옛터가 지척이어서인지 노래는 더욱 살가운 느낌이었다. 2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장백산 밑 비단같은 만리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종설움 받는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 지옥의 쇳문이 온다”
3절은 청년들에게 새 나라를 만들 것을 주문한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노래를 불렀는지를 알만하다. 3절도 소개해보자.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두 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떴다”
전관장은 신흥무관학교 교가와 함께, 신흥무관학교가 만주항일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도 설명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이후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을 이끌어간 주도세력이었다는 소개였다.
전정혁 관장이 독립군들의 노래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90년대였다고 한다. 중국 정부 문화기관(신빈만족자치현 문화관)에 근무하던 그는 ‘만주족 민요’를 조사 채록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가 태어난 무순시 신빈은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운 곳으로 만주족 마을들이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만주족 민요들을 채록하러 시골마을을 다니면서 그는 마을 사람들이 부르기를 좋아하는 또다른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독립운동가였다.
중국통신음악학원에서 음악교육을 전공했던 그는 곧바로 채록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교통이 낙후하기 짝이 없었다. 노래를 채록하려면 녹음기도 필요했다. 그는 자전거에 당시의 커다란 녹음기를 싣고 시골마을을 찾아다녔다. 노인들을 만나 독립군을 아느냐를 묻고,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해서 채록에 나섰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밤을 새면서 노래를 다시 틀고는 해서 숫자악보로 옮겨적었다.
“주변을 벗어나서 동북3성 각지를 다니면서 노래 채록을 했습니다. 무뢰배들한테 당할 뻔한 적도 있었어요. 그렇게 채록한 노래들을 모아서 책으로 묶어냈습니다.”
요녕민족출판사에서 낸 ‘조선족항일노래선집’이다. 그의 열정과 땀이 배인 이 책에는 80여 편의 노래들이 실려있다. 독립군들이 부르거나 항일의식을 고취하던 학교에서 부르던 노래였다. 그는 책 후기에 이렇게 썼다.
“십여 년간 산간벽지를 오르내리며 물 부은 노력이 미숙하나마 결실을 보게 되어 기쁨이 한량없다. 논두렁에서 밭머리에서 그리고 구들목에서 수집에 응하여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노래를 불러주신 여러 선배님께 감사를 드린다.”
신흥무관학교를 떠나 7인열사릉으로 갈 때 그는 독립군 추모가도 소개했다. 동료들이 전사했을 때 부르던 노래로 비감이 어려 있었다.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보고 우지 마라/몸은 비록 죽었으나 독립정신 살아있다/ 만리차천 외로운 몸 부모형제 다버리고/홀로 섰는 나무밑에 힘도 없이 쓰러졌네/나의 사랑 대한독립 피를 많이 먹으려나/ 피를 많이 먹겠거든 나의 피도 먹어다오”
전관장은 노래 채록 때 부지런히 다녀서였는지 현지 마을들을 꿰뚫고 있었다. 마을사람들한테 전해지는 이야기들도 잘 알고 있었다. 부강촌에 있는 7인열사능원을 가기 위해 환신령을 지날 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눈이 많이 쌓였던 날이었어요. 앞에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서 선생님들을 칼로 찔러서 죽였습니다. 교장선생님 등 모두 7명이 희생됐습니다. 20대이던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마차를 끌고 지나가던 중국인이 선생님들을 알아보고 부강촌에 알렸어요. 그래서 시신들을 모시고 가서 지금 우리가 가는 산언저리에 안장한 것입니다.”
탐방단 일행은 그의 안내를 따라 7인열사능원을 찾아 묵념을 올렸다. 동행한 안상경 한중문화컨텐츠연구소장은 “전정혁 관장은 10년 동안 빠짐없이 추석 때 이곳 열사릉을 찾아 벌초를 해왔다”고 소개를 했다.
“1990년에 한 마을을 찾아서 녹취했는데, 당시 70세가 넘은 노인이 독립군가를 1절부터 5절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제대로 불렀어요. 그 녹음자료들이 지금 남아있습니다. 그분들은 이제 다 돌아가셨지요. 그때 녹취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분들이 목소리가 남아있지 않겠지요.”
전정혁 관장은 이렇게 소개하며, “30년 전 독립군가들을 채록한 자신의 작은 활동이 독립군의 사기를 고취했던 노래를 후세로 전하는 역할이 됐다”면서 겸연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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