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북경에서 북경애심녀성네트워크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리령(1960년 생)이 중화전국총공회예술단 무용배우 겸 지도교사, 북경사범대학 예술학원 객원교수이다는 사실이 알려져 눈길을 끈다. 중국문화부 무용작품 우수감독상을 수차 수상한 그녀의 무용생애는 어떻게 시작했을가?
우연하게 시작된 무용생애
길림성 룡정시에서 태여난 리령은 14살까지 무용에서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고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한번은 예술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한다고 해서 구경만 하자고 나갔다가 예술학교 선생님의 눈에 띄였다. 그렇게 되여 리령은 열흘동안 예술학교 학습반에서 무용을 배우고 선생님들이 “집에 가서 이불짐 싸서 학교 올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듣게 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리령의 어머니는 기쁜 마음으로 예술학교에 찾아갔다. 하지만 키가 별로 크지 않은 리령의 어머니를 본 예술학교 선생님은 금방 소학교를 졸업하고 키가 147센치미터인 리령을 무용면에서 장래성이 없고 키가 더 이상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을 해버렸다. 그렇게 되여 선망하던 예술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그후 2년이 지나 예술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한번 좌절당했던 리령은 다시는 예술학교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학교선생님의 권고를 듣고 다시 시험을 보러 갔다. 키가 안 클거라고 판단했던 예술학교 선생님들은 2년 사이에 165센치미터까지 커버린 리령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리령은 예술학교에 2년 늦게 진학했다.
“어머니 저 대학교에 갈거예요”
1979년 예술학교를 졸업한 리령은 순조롭게 연변가무단에 배치받았다.
그렇게 연변가무단에서의 5년은 빨리도 지나갔다. 학구욕에 불타오르던 리령은 연변가무단에서 나와 대학으로 진학하겠다고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다. 당시 가정형편이 그닥 좋지 않았던터라 대학교 공부를 언니에 이어 리령까지 대학교에 보낸다는건 힘든 일이였다. 그러나 리령은 꼭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어머니한테 ‘공세’를 들이댔다. 집을 팔아서라도 공부를 시켜달라고 어머니한테 애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리령은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89년 중화총공회 가무단 독춤 '장고춤'
중화전국총공회가무단에서의 예술인생
1986년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한 리령은 중화전국총공회 가무단에 배치받았다. 전공이 출중한 리령에게는 반년도 안되여 당시 업계 최고인 민족가무단과 동방가무단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힘든 시절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북경시 호적을 해결해준 중화전국총공회가무단에 남겠다고 작심하였다. “적어도 전국총공회가무단에서 10년이상은 일하겠다”라고 말했지만 리령은 퇴직할 때까지 줄곧 전국총공회가무단을 떠나지 않았다.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습관이 그때부터 몸에 배였던 것이였다.
다시 한번 태여나도 무용을 선택
“다시한번 태여나도 무용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리령은 망설임도 없이 다시 태여나도 무용을 선택하겠다고 대답한다.
매일 5시에 일어나 운동장을 8바퀴 달리고 기본기를 련습하며 식단조절을 해야 하지만 무대우에서 공연을 마칠 때 관중들이 보내주는 박수소리가 가장 좋은 회복제라고 말하였다.
애심은 중독성이 있다
인터뷰를 하면서 리령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애심은 중독성이 있다’는 것이다. 학교 다닐때부터 의리가 넘치고 애심이 넘치며 친구들도 많았다. 다른 사람을 도와줄 때 행복하고 뿌듯하다고 하는데서 리령 선생님의 애심이 더 돋보였다.
1983년 대학교에 입학한 리령은 조선족 무용에 관심있는사람들에게 조선족 무용을 무료로 가르치고 1997년부터는 로인들에게 조선족무용을 가르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민족사회에서 무료로 재능봉사를 쭉 견지하여 왔다.
현재 퇴직을 한 리령 선생님은 조선족사회에도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그는 북경애심녀성네트워크 회장, 북경조선족애심장학회 집행위원회 위원, 북경조선족경로후원회 리사, 전국애심녀성포럼 수석부의장 등 사회봉사직을 맡고 있다.
/중국조선어방송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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