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피여난 이름없는 풀일지라도
—웃음으로 무대를 주름 잡는 배우 김영식
□리은희
연변에서 ‘앵무새’ 하면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으리만치 알려져있다. 성급 무형문화유산 설창예술류 전승인인 김영식, 자신의 본명보다도 ‘앵무새’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그의 삶을 들어보려고 무형문화유산 전승기지인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을 찾았다. 조용하고 정가로운 사무실 분위기는 이야기 나누기에 아늑하게 와닿았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도문시 석현진이 고향인 김영식은 어릴 때부터 언어방면에 남다른 싹수를 가지고 있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모택동의 시사 〈정강산에 다시 올라〉를 암송하라고 작업을 포치하면 5분도 안되여 토 하나 틀리지 않고 암송해 친구들 앞에서 표현하였고 학교의 각종 활동에서 시랑송 표현도 하였다. 12살 무렵, 앞집에 사는 일본인 할머니한테서 일본어를 배웠는데 1년 쯤 지나서 일본어로 대화도 가능하게 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의 목표는 대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하는 것이였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일 일본어 책을 읽으며 실력을 쌓아갔다. 그러던 그의 꿈은 어느 한순간 새로운 길로 돌려지게 되였다. 사람의 꿈은 늘 바꿔지기 마련이라더라도 너무나도 짧은 순간에 이뤄져 그 만큼 경이로웠다.
1979년의 어느 날, 강건너 마을인 송림에서 문예공연이 펼쳐졌다. 텔레비죤이 귀한 시기라 마을사람들은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공연장 앞에 삼삼오오 모였고 김영식도 거기에 끼였다. 다양한 공연종목들이 펼쳐진 가운데 유독 김영식의 심금을 울린 것은 만담배우 강동춘이 표현한 만담이였다. 구수한 우리말로 재미 있고 익살스럽게 이야기를 엮어가는 표현에 푹 빠져버린 김영식은 필연코 만담배우가 되리라 마음 먹게 되였다. ‘어떻게 하면 우수한 만담배우로 될 수 있을가?’ 집으로 돌아온 김영식은 괜히 설레여서 그 날 밤 잠까지 설쳤다. 이튿날부터 그는 일본어책을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조선어책을 읽으면서 우리말을 차곡차곡 다듬어보았다. “해금연주하는 외삼촌을 따라 해금이나 배울 것이지 만담은 뭐하러 배우냐.” 부모님의 반대에도 김영식의 굳은 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그러다 ‘책만 읽어서야 언제 만담배우가 되랴.’는 생각에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송림에 사는 작가 김창봉(만담 〈술〉, 재담 〈입담풀이〉 등을 창작)을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언감생심 청탁하였다. 안면부지인 어린아이의 소행을 기특하게 여긴 김창봉은 흔쾌히 허락하였고 그 날 이후로 김영식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김창봉의 댁에 다니면서 재담, 만담 표현기교를 배웠다.
처음 재담을 접했을 때 김영식은 관객들의 시선을 ‘강탈’하자면 소리부터 높아야 된다는 나름의 생각에 수업만 시작되면 우정 목청을 높여서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인차 김창봉은 따끔하게 충고해주었다. “영식아, 재담이든 만담이든 잘하는 사람일수록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한단다. 능력 있는 목공은 못을 적게 사용하고도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지만 수준 미달인 목공은 같은 제품을 만들면서도 못을 배로 사용하게 되거든. 재담이나 만담을 할 때 꼭 내용의 중점을 잘 파악하고 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여야 한다. 대구 소리만 높여서야 어찌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느냐.” 그후, 김영식은 꾸준히 기교를 배우는 한편 라지오에서 방송되는 〈과학할아버지와 꽃분이〉, 림양길선생의 재담 등을 청취하며 그들의 말투를 따라해보기도 하였다. 한달 두달 지나자 김영식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한명, 두명 늘었고 급기야 마을행사나 환갑잔치 등 모임에 주례로 초청받게도 되였다. 그렇게 김영식은 어린 나이에 동네어른들 앞에서 아직 익숙하다고 하기 힘든 재담을 표현하게 되였는데 다행히도 모두들 김영식이 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동네가 떠나갈듯 왁자지껄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반겼기에 커다란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풀 같은 인생
1981년, 연길에 와서 김영식은 김창봉의 알선으로 강동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재담을 배우게 되였다. 강동춘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우수했던 그는 1985년에 해란강구연단에 취직하게 되였고 3년 동안 월급 없이 강동춘, 최수봉을 따라다니며 무대경험을 쌓았다. 1986년, 재담 〈비결〉로 연변TV음력설문예야회 무대에 올랐고 1988년, 소품 〈깍쟁이우승컵 결승전〉, 만담 〈중성어〉, 〈질투병〉이 히트 치면서 대중들에게 점차 얼굴이 알려지게 되였다.
김영식은 지금도 만담 〈중성어〉를 첫 공연할 때 있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때 화룡극장에서 공연하였는데 리허설을 하려고 보니 만담용 무대 소도구가 없었다. 아침에 호텔에서 급히 나오면서 빠뜨렸던 것이다. 강동춘에게 사실을 알리고 다시 호텔로 돌아가 소도구를 가지고 부랴부랴 극장에 들어가려는데 극장직원이 대문 앞을 막아서며 입장권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그 당시 배우들은 대부분 잘생긴 외모를 소유했기에 아무리 자초지종을 설명해도 “외모가 배우감이 아닌데, 어디서 거짓말이냐.”며 김영식의 말을 믿어줄 념을 안했다. 그렇게 한참 싱갱이를 하던 와중에 강동춘이 김영식을 찾으러 나와서야 무사히 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억울하기 그지없었으나 공연시 박장대소하는 관객들의 모습에 서운한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고 한다.
“해란강구연단에 있는 동안 훌륭한 스승님 덕분에 기교면에서 많이 향상되였습니다. 강동춘선생은 공연이 끝나면 꼭 저와 김홍옥을 불러 무대표현을 총화해주었고 부족점을 지적해주었습니다. 같은 내용을 하루에 세번씩 공연할 때도 있었으니 어찌 수준이 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스승님을 따라다니며 만담, 재담 기교를 배우던 김영식은 해란강구연단의 해체로 아쉽게도 꿈의 날개를 접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실오리같은 희망을 안고 연변연극단에 찾아갔고 결국 접수실에서 당직을 서는 조건으로 림시 취직하게 되였다. 연변연극단에 있는 동안 그는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천덕스런 연기를 보여주었고 저녁마다 접수실에서 《문학개론》을 비롯한 서적을 탐독하며 문학공부에 몰두하였다.
1994년, 김영식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 공연을 하며 인연을 맺어왔던 연변TV방송국 문예부의 감독으로부터 〈주말극장〉프로의 구성작가를 맡아보라는 제안을 받게 되였다. 밤을 패가며 했던 문학공부가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1997년, 〈주말극장〉프로에 ‘앵무새’코너를 창설하고 〈모스크바중국어방송〉, 〈편지〉 등 만담을 표현하였는데 작품마다 히트를 쳤다. 특히 〈모스크바중국어방송〉에서 앵무새가 남을 따라하듯이 여러 나라 아나운서의 흉내를 신통스럽게 내고 성대모사까지 맛갈스럽게 잘하여 ‘앵무새’란 별칭을 얻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대중들은 김영식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앵무새’ 하면 모두 알아봐줄 정도였다. 이렇게 시작한 구성작가의 길은 연변TV방송국 〈백두대축제〉프로에까지 이어졌다.
2001년, 연길시조선족구연단으로 전근한 김영식은 업무단장을 맡고 작품창작에 정력을 쏟았다. 당시 시장경제의 물결 속에서 관객들의 심미적 감상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김영식은 꾸준히 새로운 프로들을 개발해나갔다. 그 시기 창작한 재담 〈길쭉이 짤쭉이〉, 노래이야기 〈그 때 그 시절〉 등은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였다. 2007년, 리경화와 함께 출연한 재담 〈노래번역〉은 전국소수민족곡예전시공연 2등상을 수상하였고 한달 뒤 두 사람은 중앙텔레비죤방송프로 〈곡원잡담〉에 등장해 특유의 입담으로 시청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는 중앙텔레비죤방송에 나간 첫 조선족 재담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웃음 찾아 삼만리
“‘앵무새’는 왜 이리 하나도 안 늙나 그래…”
“여러분이 그리워 늙을 새가 없어요. 하하하…”
2009년,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으로 자리를 옮긴 김영식은 십여년간 줄곧 연변의 8개 현, 시의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혜민공연에 정열을 쏟았다. 어찌나 자주 다녔는지 이젠 익숙하다 못해 동네 골목골목이 다 환할 정도였다. 혜민공연을 내려가면 동네어르신들은 텔레비죤에서 봤던 배우들이 왔다며 반겨주고 오래전부터 알고지내던 사이인듯 스스럼없이 문안인사를 보낸다. 맛갈나는 입담, 구성작가로서의 경험, 각종 활동으로 쌓은 사회실력… 김영식은 혜민공연에서 매번 사회는 물론 프로구성과 원고 작성까지 도맡아하였다.
“제가 하는 일이 별거 있나요. 제가 이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저만 봐도 웃음보를 터뜨려주는 관객들 덕분입니다.”라고 어깨를 낮추는 김영식임에도 그의 재치 있는 입담과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관객들의 웃음주머니를 풀어놓기에 충분했다.
2018년, 왕청현 하마탕에 내려가 공연할 때였다. 날씨가 우중충하여 설마 하면서 공연을 시작하였는데 하필이면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비가 쏟아질 줄이야. 중도에 공연을 멈출 수도 없고, 배우들도 끝까지 공연을 이어가리라는 결의를 보인 터라 김영식은 비를 무릅쓰고 무대에 올라갔다. 객석에서 박수소리가 울려퍼져 한번 둘러보았더니 객석은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차있었다. 어떤 관객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김영식에게 우산을 펼쳐주기도 하였다. 공연을 하다 보면 종종 생기는 이런 감동적이고 고마운 일들은 김영식에게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긍정에너지로 되였다.
혜민공연을 다니면서 김영식은 늘 우리말 구연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아름다운 우리 전통음악에 해학적이고 절주감이 있는 우리말 입담을 곁들이면 언어가 다른 민족들도 즐길 수 있지 않을가 라는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되였다. 그렇게 창작된 작품이 마당놀이형식의 우리말 구연이였다. 2019년, 드디여 김영식이 창작, 연출을 맡고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에서 공연한 마당놀이 〈우리 마을〉이 관객들과 만나게 되였다. 55분 분량으로 된 이 공연은 〈오늘 오신 손님〉, 〈해방된 기쁨〉, 〈그 때 그 시절〉, 〈어머니〉, 〈고향〉 등 5개 부분으로 구성되였고 재담이나 만담, 판소리로 막간을 장식하는 형식으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 해 7월, 마당놀이는 북경에서 열린 중국곡예가협회 설립 70주년 축하 회보공연 무대에 올랐고, 같은 해 내몽골자치구 훅호트시에서 펼쳐진 제7회 전국소수민족곡예콩쿠르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2020년 9월에는 연변문예계 최고상인 진달래문예상까지 수상하는 감격을 누렸다. 이는 어려움을 딛고 꿈을 향해 달려온 김영식의 의욕이 반짝 빛나는 순간이였다.
최근에는 언변도 있고 노래도 잘하는 다재다능한 신진 만담배우 김하영을 발굴해낸 것이 최대의 기쁨이라고, 이제 남은 과제는 무형문화유산 전승인으로서 만담, 재담 교과서를 만들어 후세에 남기는 것이라고 흡족한 심경을 터놓는다. 우수한 만담배우가 되리라는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달려온 김영식, 그는 자신을 풀 같은 존재라고 한다. 겨우내 잠들었다가 봄이면 다시 싹을 틔우는,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강인한 의지를 가진 풀 말이다.
취재기사를 마무리며 김영식이 자신의 인생길을 떠올리면서 썼다는 시 〈나는 풀이다〉를 적어본다.
나는 풀이다
길가에 피여난 이름없는 풀이다
철따라 피고 지고, 졌다가 다시 피는
나는 풀이다
풀이면 풀답게 살아야 하는데
가끔은 진달래가 부럽다
때로는 장미꽃 되려고 애도 써본다
지금은 꽃도 지고 푸르른 세상
모두가 한때 영광인 줄 이제야 알겠다
나는 풀이다
세월의 길목에 피여난 한포기의 풀
풀잎에 이슬이 맺히면
새로운 태양이 떠올라
또 다른 하루를 만든다
나는 풀이다
《예술세계》 2021년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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