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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얼을 노래하는 작곡가​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1월7일 10시24분    조회: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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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얼을 노래하는 작곡가
 
—박학림의 음악길을 따라서

글 로은화
 
 
 

 
음악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음악만이 가지고 있는 시너지는 엄청나다. 살아 숨 쉬는 음표로 우리한테 가슴 벅찬 감동과 공명을 선사해주고 문화예술에 목 말라있는 곳을 찾아 수백차의 무료음악공연을 펼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국가 1급 작곡가이자 지휘가이며 연변학림악단 창설자인 박학림선생이다. 〈제비가 돌아왔다네〉, 〈사랑의 푸른 하늘〉, 〈세월은 흘러도〉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저도 몰래 흥얼거릴 수 있는 이 노래들은 모두 선생님의 력작이다. 올해로 15주년을 맞은 연변학림악단의 회보공연을 금방 끝마친 선생님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긴 머리를 휘날리며 취재장소에 나타났다.
 
음악사랑을 고향사랑으로 녹여낸 학림악단
 
음악사랑으로 인연을 맺은 학림악단의 단원들은 어언 15년이란 세월을 동고동락하며 함께 해왔다. 때는 가무단에 출근하던 2006년, 박학림씨는 여러 단위와 학교의 합창지휘를 맡다보니 악대가 필요했고 그의 인격적 매력을 잘 알고 있던 9명 악사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악대가 설립되였다. 하지만 초창기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많았다. 그중 가장 발목을 잡은 건 자금난이였다. 공연을 하려면 악기는 물론 련습장소가 필요했다.
 
박학림씨가 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신세기악기상가의 리영진 사장이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몇만원에 달하는 악기를 무료로 제공해주면서 우리 민족 음악을 위하는 일에 일조하고 싶다는 심경을 내비쳤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끈 셈이였다. 악기를 장만한 악대는 매주마다 박학림씨가 물색한 련습장소를 전전하며 호흡을 맞춰나갔다.
 
악사들은 모두 여러 단위에서 온 전문악사들로서 자신만의 색갈을 가지고 있었다. 박학림씨는 악대를 부단히 윤색하고 다듬어 연변학림악단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차츰 육성해나갔다. 그 사이 악대의 활동반경은 점점 넓어졌고 악대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단원들도 늘어났다. 악대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박학림씨는 이 참에 악단을 설립해 고향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문예공연을 선물해주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되였다. 그 일환으로 2012년, 연변학림악단 합창대가 정식으로 설립되였다. 그렇게 40명의 악사, 60여명의 합창대 그리고 가수들로 구성된 대가족이 탄생하였다. 박학림씨는 악단의 단장으로 작곡과 편곡, 지휘를 도맡아하면서 공연을 조직했고 자신의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취지를 가진 학림악단 단원들은 공연일정이 잡히기만 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동안 그들은 산간마을, 사회가두, 학교, 부대, 병원 등 곳으로 가 무료 위문공연만도 수백차 지원했다. 또한 두만강문화관광축제와 같은 대형행사 축하공연, 음력설문예야회, 중조 수교 70주년 경축음악회, 새 중국 창건 70주년 경축 대형 텔레비죤문예야회 등 무대에서 공연을 펼쳐 고향인민들에게 아름다운 하모니로 달큰한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농촌위문공연을 할 적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옷을 받쳐입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노래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촌민들의 모습에 목이 멜 때도 있었고 하늘땅을 진감하는 부대 전사들의 박수소리에 힘이 불끈불끈 솟아날 때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씩 공연을 하고 나면 오히려 관객들로부터 더 큰 에너지를 받고 온다면서 단원들이 감격해한다.
 
이처럼 고향사랑을 실천하는 학림악단은 박학림씨 주위에 한마음한뜻으로 뭉쳐 지금은 우리 주에서 가장 큰 사단법인단체로 성장하였다. 
 
 
음악은 나에게 신앙과 같은 존재
 
1955년, 화룡현 복동에서 탄부의 아들로 태여난 박학림씨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싹수를 가지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화룡현 동성공사에 하향지식청년으로 가게 된 박학림씨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자습을 시작했다. 그는 악리부터 통달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음악노트에 빼곡이 적어놓고는 그것들의 창작특징을 파악했다. 곧이어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집체호의 기쁨 그 누가 주었나〉라는 처녀작이 세상에 나왔다. 1975년, 집체호생활을 끝마친 박학림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탄광로동자로 일하게 되면서도 음악에 자신을 용광로의 불길마냥 활활 태웠다. 그는 곡상이 떠오르면 탄모등(炭帽灯) 불빛을 빌어 탄갱 천정에다 곡을 적어놓군 하였고 틈만 나면 마을 뒤산에 올라가 그 곡들을 목청껏 불러보았다. 이렇게 박학림씨는 탄부가 아닌 작곡가의 길을 걸으려는 야심찬 꿈을 키웠던 것이다. 그러던 1975년의 어느 날, 유명한 조선족 작곡가인 동희철선생님이 복동탄광으로 음악취재를 왔다가 음악재능이 있는 젊은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박학림씨를 찾았다. 박학림씨의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해진 음악노트를 펼쳐보면서 동희철선생님은 많은 격려와 조언, 칭찬을 해주었다. 자신이 그토록 존경해마지않던 유명작곡가의 긍정은 젊은 박학림씨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큰 고무를 받은 박학림씨는 인차 〈채탄공의 노래〉를 작곡, 발표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뒤 박학림씨는 연변탄광자제학교 음악교원으로 지내면서 조직능력을 키웠고 현지에서 차츰 이름을 알리게 되자 1983년, 연변신화인쇄공장 문예선전대 지휘를 맡게 되였다. 1987년 11월, 연길시 신흥가두 문화소 소장으로 전근한 그는 〈외로운 넋〉을 창작하여 전 주 문예회보공연 1등상을 받아안았다. 악보에서 생명력을 끌어내는 훌륭한 작곡가로 되기 위한 길에서 박학림씨는 배움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선후로 장춘영화촬영소 음악창작반, 중국통신음악학원 리론작곡학부를 졸업했고 1991년에는 상해음악학원 작곡지휘학부 간부연수반에 입학하여 내실을 다졌다. 이곳에서 전통음악을 배운 기초상에서 현대음악까지 섭렵한 덕에 졸업후 연변가무단에 취직했을 때는 전업작곡가로서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박학림씨는 연변가무단 창작평론실에서 자신의 음악적 정열을 여지없이 불살랐다. 그는 〈제비가 돌아왔다네〉, 〈사랑의 푸른 하늘〉, 〈세월은 흘러도〉, 〈나의 집은 연변이라오〉 등 가요와 엄청난 센세이숀을 일으킨 텔레비죤드라마 《별찌》(상, 하집), 《사랑의 품》(8집), 《초연 속의 수리개》(15집)의 음악 및 무용음악, 연극, 창극, 동요, 민속가무극, 협주곡 등을 망라한 다양한 쟝르와 풍격의 음악작품 1,000여수를 창작하였으며 개인음악회도 다섯차례나 열었다.
 
그중 1995년에 방송된 《사랑의 품》은 당시 크나큰 인기몰이를 했다. 드라마 주인공이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오면서 겪은 애달픈 사연들은 주제가, 삽입곡과 어우러지면서 수많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박학림씨는 이 드라마의 대본을 받았을 때 단번에 그 속에 빠져들어 여러 밤을 패가며 읽고 또 읽었다. 텔레비죤음악인 만큼 시청자들의 심리적인 울림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하고 곡을 창작했다. “아― 아― 아― 백설화, 아름다운 백설화…”
 


애잔한 선률에 주인공의 고달픔, 슬픔, 아픔,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져 당시 드라마의 성공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집은 연변이라오〉라는 노래는 박학림씨가 조선 류학시기 중국대사관에서 음력설을 맞아 중국류학생들을 요청한 자리에서 령감을 얻어 창작한 작품이다. 그 날, 중국류학생들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생방송으로 중국음력설야회를 보고 있었다. 예쁘게 생긴 한족 녀가수가 격앙된 목소리로 〈중국은 나의 집이라네(我的家在中国)〉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그걸 듣고 있던 박학림씨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자매들, 친척친우들이 생각나면서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찰나 〈나의 집은 연변이라오〉라는 제목이 떠오르면서 만찬이 끝난 뒤 바로 통신국(중국의 우체국에 해당함)으로 가 김학송선생한테 전화를 해 〈나의 집은 연변이라오〉라는 제목에 걸맞게 작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생활 속에서 느끼는 감수들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악상이 떠오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길을 가다가도 쪼크리고 앉아 오선보에 힘있게 적어내려간다는 박학림씨, 그 많은 인내의 시간을 확인해주듯 그의 집게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단단히 배겨있었다. 그는 고향의 일초일목을 사랑했고 그것들을 오롯이 음악에 담아냈다. 그래서 그가 창작한 작품은 민족적 풍격이 물씬거리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무극 〈장백정〉 노래는 웅장한 기세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정서가 잘 묻어나있는 수작이다. 상급 부문에서 내려준 창작임무를 원만히 완수하기 위해 박학림은 몇달 내내 제대로 된 끼니와 잠을 챙기지 못했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어디 아픈가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래도 결과는 고무적이였다. 무극 〈장백정〉은 중공중앙 선전부 ‘다섯개 하나 공정상(五个一工程奖)’, 문화부 ‘문화대상’, ‘우수작곡상’ 등 영예를 휩쓸었다. 생각의 폭을 넓혀가며 쌓아온 그의 준비된 저력이 빛을 뿌렸다.
 
“든든한 예술지식으로 무장해야만 든든한 예술을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박학림씨는 창작의 질을 높이려면 작곡과 지휘를 더한층 심층 있게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2001년에 조선 평양음악대학 작곡지휘학부에 진학했다. 박학림씨는 류학생활이 자신의 음악생애에서 전환점이 되였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쉽게 차례지지 않는 소중한 기회임을 잘 알고 있는 박학림씨는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작곡공부에 매진했고 깔끔하고 감정이 깊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공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음악풍격을 굳히게 되였다. 그의 류학생활의 끝도 화려했다. 학교에서는 그만을 위한 ‘중국류학생 박학림 작품음악회’를 개최하여 화합의 장을 만들어주었다.
 
2014년 7월, 박학림씨는 평양음악대학 작곡지휘학부 석사과정을 끝마쳤고 지금은 박사공부를 계속하면서 〈중국문학예술작품을 각색한 조선식 가극 연구〉라는 론문의 집필을 끝마치고 박사학위론문 최종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와 같은 음악기반을 디딤돌로 삼아 박학림씨는 창극 《심청전》(2013년), 《춘향전》(2015년)의 음악을 편곡하여 전국소수민족문예콩쿠르 편곡상과 지휘상을 수상했고 《주덕해》(2012년)로 문화부 작품상, 〈장백산을 노래하다〉(2012년)로 제4회 전국 소수민족 문예회보공연 금상 등을 수상하였다.
아마 박학림씨처럼 작곡과 지휘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음악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창극 《춘향전》의 수상을 두고 연변가무단의 한 지도일군은 “초인간적 의지와 정신의 산물”이라고 평가한 적 있다. 그도 그럴 것이박학림씨는 공연을 한달 앞둔 시점에서 편곡을 맡아 훌륭하게 임무를 완성했을뿐더러 극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였으니 말이다. 2015년 1월, 연변가무단에서는 박학림씨에게 ‘특수공헌상’을 수여했다.
 

 
 
 
아름다운 동행
 
4남매중 맏이인 박학림씨는 12살 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였고 어머니 홀로 네 자식을 애면글면 키웠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월급을 타면 어머니한테 꼬박꼬박 바치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간주했다.
 
박학림씨는 어머니 살아생전에 고향사람들을 위한 음악회를 열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애석하게도 어머니는 그 날을 기다려주지 못했다.
 
2017년 7월 4일, 박학림씨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사랑을 담아 연변가무단극장에서 ‘복동탄광 로동자들을 위한 고향음악회’를 성황리에 열었다. 가무단극장은 관객들로 물샐틈 없었고 학림악단은 〈채탄공의 노래〉를 서곡으로, 〈고향의 봄〉을 엔딩곡으로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이끌어냈다. 박학림씨가 〈고향의 봄〉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지휘봉을 내려놓고 고향인민들에게 큰절을 올리자 장내에는 뜨거운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렇듯 정든 고향을 늘 가슴 속에 품고 살아왔던 그 이였던지라 몇년전에는 화룡시 서성진 장항촌 시골농가에 박학림창작기지를 세웠다. 지금 이곳은 학림악단 단원들의 힐링장소이자 련습장소이다.
 
박학림씨가 고비에 맞닥뜨렸을 때마다 포기하거나 뒤돌아섰다면 15년이란 세월을 굳건히 겪어온 지금의 연변학림악단은 없었을 것이고 더우기 우리 민족 음악은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올해 10월 29일, 학림악단은 창단 15주년을 맞이하여 연변가무단극장에서 기념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악단의 발전에 기여가 큰 19명 공로자들에게 감사패를 전하고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으로 다채로운 음악공연을 펼쳤다. 박학림씨는 “점점 개인화되여가는 이 시대에 우리 단원들은 음악을 통하여 서로 호흡을 맞추고 교감하며 소통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믿고 견지한 단원들이 가장 고맙고 힘 닿는 데까지 단원들을 책임질 것입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지금 여러 소학교 예술고문을 맡고 있는 그는 소학생들을 학림악단의 후배로 각종 공연에 동참시키고 있으며 민족예술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사업에도 경운(耕耘)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우리 민족 음악이 외면당하고 있는 시점에서 현대인의 구미에 맞는 음악을 창작하는 데 모를 박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음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여있습니다.”
 
문화예술의 토양을 다지며 음악으로 문화의 꽃을 피워낸 박학림씨, 음악에 대한 열정이 전해지는 그의 손끝에서 음표들이 소용돌이치며 환희의 절정을 이룬다.
박학림씨가 앞으로 더 찬란하게 그려갈 무지개빛 인생을 기대하고 박수 쳐주고 싶다.

<문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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