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중국 민족무용계의 상록수―최선옥
조글로미디어(ZOGLO) 2006년4월18일 09시14분    조회:699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1.

195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0돌을 맞이하여 금방 낙성된 인민대회당에서 경축행사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외국 수뇌자들을 위한 초대공연이 있었다. 이 공연에서 한 조선족처녀의 《물동이춤》, 《농악무》가 관람자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공연이 끝난 후 모택동 주석, 주은래 총리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배우들을 접견할 때 주총리는 특별히 이 조선족처녀를 보고 《춤을 아주 잘 췄소. 이후에 한어를 잘 배우도록 하오.》라고 치하해 주었다.

당년에 22세에 나던 그 조선족처녀가 바로 제9기, 10기 전국정협 위원이며 중국 당대 14명 걸출한 무용가중의 한 사람인 국가1급 안무가 최선옥(崔善玉)이다. 사람들은 그를 《중국 민족무용계의 상록수》, 《무용계의 한 떨기 꽃》이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은 국내는 물론 한국을 비롯해 국외에 널리 알려져 있다.

길림성 가무극단 예술위원회 주임, 예술총감독을 지낸 최선옥은 걸출한 무용가로서 국가1급 안무가이며 무용이론가이다. 무용과 인연을 맺어 50성상, 반세기에 달하는 무용생애에서 최선옥은 200여가지 작품에서 부동한 역을 출연하였으며 신화무용극 《금도끼와 은도끼》에서 주역을 담당해 인기를 모았다. 그는 선후하여 《장고춤》, 《용사의 기쁨(칼춤)》, 《향바레》, 《단오명절》, 《춘향의 노래》, 《광환절》 등 60여부의 무용작품을 창작하여 공연함으로써 무용계의 최고 영예상인 《삼협컵》, 길림성정부 장백산 최고문예상, 길림성 최고 특수상인 《평생개인예술성취상》, 《20세기 금질상》등 국가급과 성 1, 2급 상을 15차나 수여 받았으며 국무원에서 발급하는 특별 수당금을 받고 있다.

지금 그는 또 중국무용가협회 부주석, 중국소수민족무용학회 부주석, 중국안무학회 학술위원, 국제 동방인체문화연구센터 학술고문, 세계문화예술연구센터 연구원, 길림성문련 부주석, 길림성정협 상무위원, 길림성무용가협회 주석 등 사회직무를 겸임하고 있다.

이 모든 성과는 결코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무용예술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착심과 식을 줄 모르는 열정 그리고 끊임없이 탐색연구한 노력의 대가가 깊이 배어 있다.

2.

1937년 5월 25일, 길림성 화룡현의 한 조선족농민가정에서 태어난 최선옥은 부모들로부터 선량하고 부지런하며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훌륭한 품성을 물려받았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이목구비가 시원하고 조선여성의 특유한 기질과 개성을 소유한 그는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불렀다.

1953년 16세 꽃나이에 최선옥은 무용시험을 치르고 싶어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다. 한번 마음만 먹으면 꼭 해내고야 마는 최선옥은 밥도 먹지 않고 울면서 어머니를 졸라댔다. 후에 다른 사람의 권고로 어머니는 그의 요구를 들어 주었고 그는 마침내 시험에 통과되어 연변가무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부터 장장 반세기 남짓한 그의 무용생애가 시작되었다.

다년간의 염원을 실현한 최선옥은 일심전력 무용연습에 몰두하였다. 이른 새벽 남들이 아직 꿈나라에서 헤맬 때 그는 이미 춤연습에 땀벌창이 되곤 하였으며 저녁에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연습실에 남아 춤 동작을 익히군 했다.

어떤 때는 자리에 누웠다가도 문뜩 떠오르는 영감에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가 하면 길을 가다가도 춤 동작에 골몰하여 경적소리조차 못들을 때가 있었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새로운 무용동작이 떠올라 저도 몰래 팔다리를 움직이다 보니 옆 사람들로부터 의혹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1966년 국가문화부에서는 구소련과 조선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연변가무단의 무용을 지도하게 하였다. 최선옥은 중점양성대상으로 되어 외국전문가들로부터 발레, 고전무용, 서양무용, 조선민간무용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구소련 전문가 고르쎄브는 무용극 《금도끼와 은도끼》에서 주역인 선녀 역을 최선옥에게 맡겼고 그의 출중한 연기를 두고 《순박하면서도 우아하고 함축성이 있다. 전도유망하다.》고 치하 하였다. 20세기 50년대 최선옥은 여러 차례 모택동과 주은래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과 외국 수뇌자들 앞에서 《물동이 춤》, 《농악무》, 《기쁨》 등 민간무용을 출연하였고 발레, 민간무용 교원직을 맡고 많은 우수한 학생들을 양성하였다.

3.

최선옥이 한창 예술의 고봉으로 줄달음치고 있을 때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최선옥은 눈물을 뿌리며 남편을 따라 회덕현의 한 산간마을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늑한 훈련실에서 춤추던 보드라운 손에 장고 대신 호미자루가 쥐어졌지만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무용에 대한 그의 애착과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부뚜막을 맴도는 《농가집 아낙네》로는 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문예선전대 조직에 나섰다. 그는 다섯 살 난 어린애를 업고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그의 노력으로 마침내 이 편벽한 농촌마을에 문예선전대가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이때로부터 최선옥은 힘든 농사일과 가무 일을 마치고는 짬짬이 시간을 타 사원들에게 노래와 춤을 배워주었다.

그리하여 이때까지 문화생활과 동떨어져 살고있던 산간벽지에도 흥겨운 노래 소리와 장고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한 예술가의 생명이 바로 이 편벽한 산간마을에서 또다시 약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예공연을 관람하며 즐거워하는 농민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성취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생활이야말로 진정 무용예술의 원천임을 터득하게 되였으며 예술과 생활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무용창작을 할 때마다 농촌에 내려가 생활체험을 하는 것을 홀시할 수 없는 고리로 간주하였다. 노농대중을 늘 가슴속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나날에도 농촌이나 유전에 가 공연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76년 정책이 낙실되여 최선옥은 길림성가무극단의 안무로 배치받았다.

재난의 년대를 거쳐 또다시 사업터에 돌아온 그는 더욱 큰 열성으로 창작에 뛰어들었다. 착실히 닦아온 무용기량, 풍부한 생활체험은 그의 무용창작과 안무에 훌륭한 밑거름으로 되었다. 민족예술인으로서의 드높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지닌 그는 소수민족무용은 자체의 특색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민족의 전통예술과 생활미를 조선족의 예술미로 전환시키고 승화시켰다.

20세기 80년대 초 한때 창작사상의 혼란으로 무용계에서 서방화 경향이 나타났지만 최선옥은 전통무용의 계승과 창작원칙을 견지하면서 민족 풍격이 독특한 《용사의 기쁨》을 창작했다. 이 작품이 수도베이징에서 선보이자 대뜸 수도무용계를 들썩케 했다. 이 작품은 또 남경에서 열린 최대 규모의 무용창작회의에 참가하여 전문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국무용가협회 주석이며 저명한 민족무용가인 오효방선생은 《이처럼 민족성이 짙고 개성이 특출한 작품을 지난 몇 년 간에는 보기 드물었다.》고 치하하였다. 최선옥은 또 가무극단의 주요 무용배우와 발레, 민간무용 안무로서 고금중외 200여가지 무용종목 공연에 참가하였으며 60여부의 작품을 창작하고 12차의 대형 가무야회 총안무, 총감독을 맡았다.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의 새로운 환경에서 최선옥은 무용예술의 시대성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 최선옥은 예술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지니고 보다 시대적이면서도 건전한 무용예술을 창작하기에 주력하였다.

한동안의 피타는 탐색과 창작과정을 거쳐 그는 마침내 우아하고도 활발하며 건전한 문예야회 《고금중외 광환절》을 내놓았다. 최선옥이 기획하고 총연출을 맡은 이 문예야회는 전국순회공연에서 200여차나 무대에 올랐으며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려 예술성과와 경제효과의 쌍풍작을 따냈다. 또 《조국의 부름》, 《장춘은 언제나 봄》, 《신가무야회》, 《북방가무》, 《이국의 정취》, 《가을의 선율》 등 12개의 대형 가무야회를 직접 조직, 지도하여 무대에 올림으로써 길림성은 물론 중국의 무대가무예술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국의 정취》는 멕시코춤, 에스빠냐춤, 일본 부채춤, 로씨아 민간춤, 조선춤, 기네아춤, 흑인춤 등 세계 각국 여러 민족의 춤들로 구성되었는데 이국의 풍격과 세계적인 풍치로 수많은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다. 지식청년가무야회 《조국의 부름》은 길림성 1등상(1976년)을, 《장춘은 언제나 봄》은 중앙텔레비젼방송국에서 조직한 제1회 성광콩클에서 전국 1등상(1978년)을 수상하였다.

무용 《용사의 기쁨》은 1986년 길림성 제1회 장백산문예상을, 《즐거운 단오놀이》는 1991년 곤명 제3회 중국예술축전의 《독무, 쌍무, 3인무》민족무용콩쿨에서 전국 쌍무창작 지도 2등상을 수상했으며 제3회 길림성 장백산 문예대상을 수상하였다.

현대무용 《청춘 선율》은 전국 각지 문예단체와 공장, 학교, 군중들에게 보급되어 환영을 받았다. 1989년 대형 교향 무용 《즐거운 향바레》는 공화국창건 40주년을 경축하여 거행한 제1회 전국예술축전에 참가하여 창작지도 1등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1990년에 또 장백산 문예상을 수상했으며 그 이듬해 캐나다 국제민간예술축전에서 34차 공연되어 출국공연의 새 기록을 창조함으로써 나라를 위해 영예를 떨쳤다.

4

최선옥은 창작과 안무, 예술지도 뿐만 아니라 연기력과 기교면에서도 남다른 개성과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맹목적으로 유행을 따를 것이 아니라 창의성이 있는 새로운 창작유파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적인 예술원칙이다.

때문에 최선옥은 창작에서나 연기기교에서 자기의 특색을 살릴 수 있었다. 전통적이면서도 속되지 않고 섬세하면서도 절묘한 그의 연기는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무용예술의 신비함을 느끼게 하였고 끝없는 미적감수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1992년 북경에서 진행된 《중국당대무용정신기념공연》때 그는 춤 《향바레》를 출연해 당과 국가 지도자들과 문예계 인사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공연에서 그는 중국무용계의 최고상인 《삼협컵》을 받는 영광을 지녔다.

장고춤은 최선옥이 평생의 심혈을 몰부은 성공작이자 대표작이다. 그의 무대예술성과를 집대성한 대표작인 《장고춤》은 전통성과 현대성을 하나로 융합시켜 새롭게 탄생시킨 민족무용이다. 그는 1993년 5월 한국에서 개최된 세계 13개 나라 국제무용학술교류회의에서 《장고춤》을 출연해 세계 일류 무용가들의 절찬을 받았다.

1995년 최선옥은 중국문련에서 주최하고 중국무용가협회에서 주관한 《중국 일대풍류 <가을의 선율> 무용야회》에 참가하였다. 오래지 않아 환갑이 될 몸이었지만 이 야회에서 16세 때부터 고심히 연마하여온 대표작 《장고춤》을 선보였다. 젊은이 못지 않게 생기와 율동감으로 차넘치는 그의 춤 동작은 관중들을 매료시켰다.

전문가들은 그의 《장고춤》을 두고 조선, 한국의 장고춤과 비슷하면서도 중국조선족의 독특한 풍격을 갖춘 《민족예술의 진품》이라고 평가하였으며 그를 《중국 민족무용계의 상록수》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장고춤은 현재 세계 많은 나라와 지역에 널리 알려져 많은 학교, 단체들에서 그를 초청하여 수강하고 있다. 최근에도 대만 남화대학에 가서 4개월간 강의하였다. 1999년 장고춤은 타이 방코크에서 있은 제2기 세계화교예술축전에서 국제 영예 우수금상을 수여받았다.

민족무용을 발전시키자면 다른 민족, 다른 나라의 무용예술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최선옥은 형제민족과 세계 여러 나라의 무용을 익히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경쾌하고 성수나는 신강 춤, 이족 춤을 잘 출 뿐만 아니라 거칠고도 호방한 몽골춤, 우크라이나춤도 잘 춘다. 또 굳세고도 명쾌한 에스파냐춤, 메히꼬춤에도 조예가 깊다.

그가 화려하고도 힘있는 탱고, 열정적이면서도 줄기찬 왈츠를 출 때마다 더욱 눈부시다. 이미 세계 22개 민족의 춤기교를 장악한 그의 춤 세계는 언제나 새롭고 신비하고 풍부하다. 이로 하여 그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풍격을 갖출 수 있었고 가무연기와 창작의 넓은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다.

5

무용연구전문가들은 최선옥의 무용생애를 패기로 넘치는 배우생활시기, 창작과 안무시기, 이론탐구시기 등 3개 단계로 나누는데 이는 그의 인생의 3부곡을 이룬다. 사실 이 삼자는 유기적으로 융합되어 최선옥의 예술세계를 이룬다. 최선옥은 연기, 안무와 창작, 이론연구 면에서 모두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그 어떤 실천활동이든 이론을 떠날 수 없다. 장기적인 무용실천가운데서 최선옥은 무용예술에 대한 인식이 깊어짐에 따라 무용예술의 법칙을 이론적으로 천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10여년간 무용창작과 안무에 종사하면서 가치 있는 논문 14편을 발표하여 무용계의 주목을 끌었다. 《민족민간무용 창작에 대한 소견》, 《중국의 기백과 중국의 풍격》, 《연기와 예술생명》, 《자기창작과 새로운 발견》 등 논문들은 모두 중국 민족무용의 풍격과 발전을 천명한 무게 있는 논문으로 무용 이론계 전문가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국가급, 성급 간행물에 발표되었다.

그 중 《민족민간무용 창작에 대한 소견》은 제3회 세계중국인예술평의활동에서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독자적인 길을 열어 중국특색이 있는 조선무용을 발전시키자》란 논문은 제3차 중국예술축전 민족무용연구토론회에서 발표된 후 회의에 참석한 전문가와 학자들의 짙은 흥미를 자아냈다. 1992년 9월 국가문화부 고점상 부부장은 아시아무용가협회 회장 오화진녀사에게 《최선옥은 연기, 지도, 리론 면에서 전면적으로 발전한 다재다능한 무용예술가》라고 소개하였다.

실천과 이론 면에서 무용예술에 조예가 깊고 기여가 큰 최선옥은 점차 국내외에 이름을 날리게 되였으며 각종 문화교류활동에 빈번히 참가하였다. 1990년에 그는 길림성가무극단을 인솔하여 구소련에 가서 공연하였으며 1993년에는 한국에 가서 아시아무용가협회 창립 10주년 경축행사에 참석했다.

홍콩반환 직전인 1997년 음력설에는 초청에 의해 홍콩'97음력설 특별프로 《하나의 같은 꿈》행사에 참가하여 새로 창작한 《고향의 정》, 《상봉》을 출연하였다. 최근 몇 년간 그는 예술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솔직하고 정직하며 헌신적으로 기여하는 고귀한 품성으로 뭇사람들의 존경과 신임을 받고있다. 그는 예술사업을 위해 자기의 모든 심혈을 쏟아 부었지만 좀처럼 개인의 득과 실을 크게 따지지 않았다.

시종일관 무용예술을 자기의 생명, 자기의 천직으로 간주하면서 40여년을 분투해온 최선옥, 그는 정녕 중화민족 문화동산에 핀 한 떨기 꽃으로, 《중국 민족무용계의 상록수》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2006/04/15 흑룡강신문 전춘봉 박복선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룡정시문화관 관장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리광평씨는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집단이민사 연구에 떨쳐나섰습니다. 그는 자비로 오토바이, 사진기,비디오 등을 갖추었습니다. 회갑나이를 넘긴 그가 수십킬로그람 되는 사진기재 들을 지니고 수만킬로메터를 달린다는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였습니다.매년 ...
  • 2006-03-02
  • [한겨레] 재일동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온 ‘권투영웅’ 홍창수(31) 선수가 27일 세계 챔피언의 영광과 짐을 스스로 벗어던졌다. 홍 선수는 이날 세계복싱평의회(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 1차 방어전에서 도전자인 동급 1위 호세 나바로(24·미국)를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꺾은 뒤, 타이틀 반납을 선언했다. 그는 “...
  • 2006-03-01
  • [img count='1' width='400' img] 28일 2005전국10대법관으로 당선된 연길시 인민법원집행국부국장 비운룡이 영예를 안고 돌아왔다.
  • 2006-03-01
  • 중앙민족어문번역국 당위서기 국장 단주앙번 일가견 기자는 25일 오후, 중앙민족어문번역국 당위서기, 국장이며 현재 북경민족대학박사생 도사, 2년간 운남성 성장조리직을 맡았던 단주앙번(장족)을 만날수 있게 되였다. 3년전 처음 연변을 다녀온적이 있는 그는 먼저 연변조선족의 미풍량속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특히 《...
  • 2006-02-28
  • 26일, 최고인민법원, 인민일보, 중앙텔레비죤, 법제일보에서 련합으로 주최한 2005년 중국10대 우수법관평의활동이 북경에서 있었다. 연길시인민법원 형사재판정 부정장 비운룡이 2005년 길림성10대 우수법관에 이어 2005년 중국10대 우수법관으로 평의되여 최고인민법원 원장 소양으로부터 《금법추상》(金法槌奖)을...
  • 2006-02-28
  • [한국일보 2006.02.26 18:19:24] “그는 한 많은 이국 땅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25일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젠덴쓰(全電通)노동회관에서 지난해 12월 28일 타계한 재일동포 고 김경득(金敬得)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이 열렸다. 한국인과 일본인, 민단과 조총련을 가리지 않고 회장...
  • 2006-02-27
  • [원제: '신선족'으로 중국서 떳떳이 살고싶다] -흑룡강지역 첫 한국류학생 김재윤씨 최근년간 한국인들의 중국 진출이 많아지면서 '신선족'이라는 신조어가 동포사회에서 류행되고있다. 한국 웹사이트인 네이버 오픈사전에 따르면 신선족을 "류 학, 현지 근무 등의 명목으로 중국으로 건너왔다가 아예 중국땅에 눌러앉아 살...
  • 2006-02-27
  • 국내 최장기 연재 집필 이규태 떠나다 [조선일보 2006-02-25 22:03] 조선일보 이규태(李圭泰·73) 전 논설고문이 25일 오후 4시쯤 지병인 폐암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이 전 고문은 1983년 3월 1일자 본지에 ‘이규태 코너’를 연재하기 시작, 지난 23일자 신문에 독자들에게 보내는 고별사를 싣기까지 모두 6702회...
  • 2006-02-26
  • 얼마전에 연변의 한 문학지가 마련한 모임에서 성보호텔 정영채회장과 자리를 같이하였다. 여러 말이 오간 가운데 연변은 일본, 한국과의 물류관문으로서 장차 동북아물류중심이 될 복된 고장이라는 얘기와 더불어 지금은 문화인들이 어렵지만 이렇게 어려움속에서 성취를 해야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는 정회장의 말씀이 인상...
  • 2006-02-24
  • 민족력사에 혼 앗긴 리광인씨 《잠적》 10년동안에도 수백만자 력사서 써내 력사학자 리광인씨한테서 도합 4권으로 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한국학술정보[주])를 받아든 기자는 책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느낄수 없었다. 《남성편》(1, 2권), 《녀성편》, 《소년아동편》으로 묶어진 책은 총 125만자, 140편의 전기가 수...
  • 2006-02-2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