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06.02.26 18:19:24]
“그는 한 많은 이국 땅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25일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젠덴쓰(全電通)노동회관에서 지난해 12월 28일 타계한 재일동포 고 김경득(金敬得)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이 열렸다. 한국인과 일본인, 민단과 조총련을 가리지 않고 회장을 메운 600여명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생전의 김 변호사를 이야기하며 울고 웃었다.
김 변호사의 큰 형 경화(敬和)씨는 “11살이나 어린 동생을 추모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절절한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동생은 한번 목표를 정하면 그 것을 이루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고 회고한 그는 “차별 때문에 신문기자를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자 사법시험 준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년간 육체노동을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와 함께 일해온 하라고 산지(原後山治) 변호사는 “사시 합격 후 한국국적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어려운 투쟁을 벌이는 그가 하도 안타까워서 ‘일단 일본 국적을 얻은 뒤 변호사가 돼 인권운동에 전념하는 것이 어떠냐’고 조언했다”며 “그러나 그는 ‘변호사가 안돼도 좋다. 차별과 끝까지 싸우겠다’고 일축했다”고 소개했다.
1980년대 초반 연세대에 함께 유학했던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아사히(朝日)신문 논설주간은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명쾌한 분석력, 강한 집념에다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인격을 가진 그가 일개 기자가 안된 것은 정말 잘된 일”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1949년 와카야마(和歌山)시에서 가난한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난 그는 와세다(早稻田)대 법학부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자기 민족에 등을 돌린 인간’이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 무렵 일본 사회의 차별을 직접 체험한 그는 ‘내ㆍ외국인 평등실현’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76년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외국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던 일본 최고재판소와 인생을 건 대결을 벌인 끝에 79년 외국인 최초 변호사가 됐다. 이후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온몸으로 맞서 온 그는 동포사회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추모회에서는 56세의 아까운 나이에 삶을 마감한 김 변호사의 마지막 당부가 공개됐다. 지난해 11월 구술한 ‘제언’이라는 글에서 그는 “재일동포는 한일, 북일 간의 중요한 가교역할을 하는 존재”라며 “이 같은 역할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려는 의사와 자각을 갖게 하는 동포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호소했다.
도쿄=김철훈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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