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행복한 추억속에서 만년을]
모주석의 접견 두차례나 받은 전국로력모범 강병칠
조양천에 가면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불편한 몸으로 매일 아침, 저녁 신체단련을 견지하는 한 로인을 볼수 있다. 일찍 중국인민은행 저금선진사업자, 전국로력모범에 당선되여 두차례나 모주석을 비롯한 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던 강병칠로인(83세)이다. 그는 중풍으로 왼쪽 반신을 잘 쓰지 못하고 허다한 기억들을 잊어버렸지만 모주석의 접견을 받던 그때의 그 감격스러운 순간만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강병칠은 1950년 중국인민은행 연길현지행에서 외근을 맡고 저금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떠돌이생활과 아동공생활을 했던 그는 후에 자습으로 겨우 조선글은 익혔지만 한자는 일자무식이였고 은행업무에는 더욱 생소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배우며 일해나가리라 작심했다. 당시 저금사업은 누구나 하기 꺼려하는 간고한 사업이였다. 사람들은 여유돈을 집구석에 숨겨둘지언정 은행에 저금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여러 공장, 기업을 돌면서 내심하게 설복했으나 오히려 반감만 살뿐 누구도 그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어느 한번 그는 룡정현인쇄공장에 찾아갔다. 공장장은 《우리 공장은 대부분 녀공들이기에 로임이 낮아 저금할 돈이 없습니다》고 하면서 외면했다. 그는 공장종업원들의 생활을 상세히 료해한후 몇몇 전형적인 랑비현상을 파악하고 그것을 실례로 끝내 공장지도부를 설득했으며 그들의 지지하에 전체 종업원들을 동원해 저금사업을 전개했다. 결과 공장 종업원 60명이 모두 저금에 참가했으며 저금액은 원래의 200원에서 800원으로 올랐다. 당시 룡정에는 84개 단위가 있었는데 그의 이같은 노력으로 종업원저금이 없는 단위가 없게 되였다.
그는 기업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가두를 동원하고 또 돈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 저금할것을 권장해 저금참가호를 대폭 늘였다. 그는 또 여러 사람이 돈을 모아 누가 어려움에 봉착하면 도와주는 호조저금회를 발족했는데 이 방법은 그후 전 현은 물론 전 주에까지 보급되였다. 1955년 룡정현에서는 저금임무를 106%로 넘쳐 수행했다.
1956년은 강병칠로인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한해이다. 이해 3월, 중국인민은행 저금선진사업자에 당선되여 북경에서 있은 대표대회에 참가해 맨 첫사람으로 대표발언을 하고 모주석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이해 5월에는 또 전국로력모범에 당선되여 다시한번 모주석, 류소기, 주덕, 주은래 등 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고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는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당시 마음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모주석 만세!》를 수없이 불렀다는 그는 80고령이 된 지금까지도 감동의 그 순간이 기억에 생생하다고 한다.
강병칠로인은 이후 천보산지행, 로투구지행, 조양천지행을 전전하다 1981년에 퇴직, 닭을 치고 남새를 가꾸며 쾌락한 만년을 보냈다. 1998년에 두차례나 중풍을 맞고 반신불수가 되였으나 매일 아침, 저녁으로 걷기운동을 견지한 보람으로 지금은 건강을 조금씩 되찾고있다.
김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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