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재일동포 인권 찾기 26년 외길
조글로미디어(ZOGLO) 2006년1월3일 08시54분    조회:933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2005.12.31 06:08:26] 재일동포 인권운동의 구심점으로 활동해 온 김경득 변호사가 12월 28일 밤 일본 도쿄에서 위암으로 별세했다. 56세. 최근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고인의 갑작스런 타계 소식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30일 조촐히 치뤄졌다. 부고조차 하지 않았다.김 변호사는 외국 국적자로서는 최초로 일본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따낸 사람이다. 하지만 그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 사법부와 싸워 쟁취한 것이었다. 그래서 '변호사 김경득'이란 직함은 재일동포 차별 철폐 운동의 상징이 됐고 26년간의 변호사 생활 역시 동포 인권운동에 투신한 외길이었다. 1949년 와카야마(和歌山)시에서 재일동포 도금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학창시절엔 재일동포란 사실을 감추고 살았다. 부당한 차별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의 인생의 전기는 대학 졸업과 함께 찾아왔다. 명문 사립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했으나 국적 때문에 아무 데도 취업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일동포로서의 정체성에 비로소 눈을 뜬 청년 김경득은 그때부터 가나자와(金澤)란 일본식 성을 버렸다. 그리고 사법시험에 도전해 76년 합격했다. 일본 사법부는 예비변호사 김경득에게 귀화를 종용했다. 외국인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어 변호사 자격 취득이 불가능하다는 통보와 함께였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국적 조항 철폐운동을 벌였다. 김 변호사는 생전에 "소송을 벌인다면 최종 판결까지는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렇다고 귀화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많은 법조인들이 김 변호사에게 동조했고 일본 사법부는 마침내 국적 요건을 완화해 그에게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지금까지 40여 명의 재일동포들이 한국 또는 조선 국적을 유지한 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은 김 변호사의 투쟁 결과다. 79년 개업한 그는 재일동포 인권 운동의 구심점이 됐다. 법률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던 동포들과 아픔을 함께했고 이에 맞서는 갖가지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대표적인 것이 80년대의 지문날인 거부 소송이다. 외국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부당?지문 날인 의무를 철폐하자는 운동으로 많은 재일동포가 동참했다. 이 밖에 국민연금 소송, 도쿄도 관리직 채용 거부 소송 등 동포들의 인권과 관련한 소송에는 빠짐없이 김 변호사가 끼어 있었다. 전후 보상 소송을 통해 일본인의 식민책임에 대한 반성과 보상을 촉구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업적이다. 최근에는 재일동포들의 지방 참정권 요구운동에 앞장서 왔다. 그는 '나를 되찾는 길'이란 글에서 "재일 한국인은 일본 식민통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 정체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일본의 역사적 책무"라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활동으로 본인의 건강은 잘 보살피지 못했다. 처음 찾아온 암은 극복했으나 최근 다시 암에 걸려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2남 2녀가 있다.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지인들은 그의 발자취를 기리는 추모 모임을 2월 도쿄에서 갖기로 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광동지역 모바일 부품 선두주자 [심수 할루야전자 올들어 매출 실적 1억 2000만달러] 조선족 기업인 남화섭 총재(42세)가 이끄는 심수 할루야전자유한공사는 중국 최고의 모바일 부품 판매, 개발회사로의 비전을 꿈꾸며 이 분야에서 광동지역의 선두주자로 달리고 있다. 고신기술 분야의 부품 수출입 무역이 주업인 이 회사...
  • 2005-09-07
  • [정의의 부를 위한 사업] —한국 '731부대죄증'연구소 소장 허유선생 인터뷰 '저가 중국에 오기전까지만 해도 731부대에 대한 료해는 교과서나 영화를 통해 약간 아는 정도였습니다. 1990년도 사업차로 중국에 왔다가 중국의 731죄증진렬관을 참관하게 되였는데 그때 일제침략군의 잔인무도한 폭행에 격분을 금치 못했...
  • 2005-09-06
  • 중국 문단에서 어색한 세대로 불리우는‘70후’ (70년대 생을 말함) 작가들은 상하 두 세대를 이어주는 군체로서 4년전부터 ‘미녀작가’로 불리는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였을뿐 실력파들로 불리우는 작가는 없었다. 그러나 ‘70후’작가군체에 ‘미녀작가’만 있는것이 아니라 실력파도 없지 않았으며 ‘미녀작가’속에서도...
  • 2005-09-06
  • 중국에서 한국어교육의 대표인물로 불리우는 강신도 교수 안녕하십니까? 이 시간에는 "중국에서 한국어교육의 대표인물로 불리우는 강신도 교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과 이웃한 한반도는 예로부터 중국과의 내왕이 밀접했습니다. 그만큼 한국어의 위치도 두드러집니다. 일찌기 공화국이 창립되기 전인 1940년대에 이미...
  • 2005-09-05
  • 베이징 희리양광과학기술발전유한회사 한국부 엄춘연과의 인터뷰 기자(이하는 기로 약칭함) 엄춘연(이하는 엄으로 약칭함) 기: 안녕하십니까? 엄: 안녕하십니까? 기: 바쁘신 시간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선 본인소개와 회사소개 부탁드립니다. 엄: 저의 회사는 베이징시 희리양광과학기술발전유한 회사라고 하는데...
  • 2005-09-05
  • 기: 오늘의 문화현장에서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문예부 부장으로 다년간 활약하면서 많은 텔레비죤문예프로를 제작하셨고 또한 많은 훌륭한 음악작품을 창작하신 고창모선생님과 이야기를 자리를 함께 했다. 음악에 뜻을 두게 될 때는 언제부터였는지? 고: 집의 부친이 바이올린을 켰고 삼촌이 첼로를 켰다. 어렸을 때부터 ...
  • 2005-09-05
  • 베이징희리양광과학기술발전유한회사 김영 지배인과의 인터뷰 [img count='1' width='350' img] 사회자: 개혁개방 20여년간 중국은 전통산업의 양적 팽창에 힘입어 눈부신 경제성장을 지속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국경을 초월하는 인터넷 산업에 대해 아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IT산업의 육성을 21세기초 국가의 중점산업 발...
  • 2005-09-01
  • 중앙민족대학 김명숙 선생님과의 인터뷰 기자:(이하는 전부 기로 약칭함) 김명숙(이하는 전부 명으로 약칭함) 기: 올해 7월이면 학생들이 졸업이잖아요. 현재 반급의 32명 학생들의 취직 방향은 어느정도 실현돼 가고 있습니까? 명: 취직은 학생들이 아직 자기가 취직한 자리를 공개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제 한두달 정도...
  • 2005-09-01
  • 중국기업문화촉진회 조선족연의회 김정섭 부회장과의 인터뷰 (기자)안녕하십니까? (사장) 안녕하십니까? (기자) 녜, 오늘 이렇게 바쁘신 시간을 내주시고 방송국까지 찾으시여 감사합니다. 백마강음식점 하면은 베이징에서 참 오래됐다는 인사을 받게 되는데요, 최초 영업을 시작한지는 언제지요? (사장) 백마강음식점은 19...
  • 2005-09-0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