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성룡의 진실한 고백
조글로미디어(ZOGLO) 2005년12월2일 10시39분    조회:916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연변TV문화체널 "진신인터뷰"프로의 단독취재

> 기자:몹시 다망한 와중에도 몸소 연변에 찾아와 《룡의 자손마음 연변행, 손에 손잡고 사랑나누기》활동을 펼치고있는데 편벽한 변강의 작은 도시인 연길로 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성룡:이전에는 영대(永大)집단을 따라서 세계각지를 돌아다니며 자선활동을 펼쳤다. 캄보쟈, 윁남 등 나라에는 유엔을 통해 가려 했는데 마침 유엔에서 나를 친선대사로 초청했다. 그래서 내가 전화로 어느 나라에 가겠다고 하면 유엔에서 배치하군 했다. 이렇게 되니 개인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워 불편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이번에도 중국이 이렇게 큰데 연변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몰랐다.

몇년전 나는 한 자선활동을 통하여 그곳 어린이들이 공부하기 어렵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래서 친구들과 상의하고 나의 옷가지들을 경매에 붙이고 또 나의 수입에서 얼마간씩 떼내여 해마다 자선활동을 하게 되였다. 성룡기금회는 지금 세계각지에서 다른 내용의 사업을 하기때문에 나는 《룡의 자손마음》활동으로 교육사업을 도와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이 기구에 소속되여있는 사람들에게 상해, 북경 등 대도시가 아닌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편벽한곳으로 많이 물색하라고 한다.

기자: 힘든 걸음이였지만 당신은 자선사업의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성룡: 그들이 연줄을 놓아 먼저 조장(棗庄)에 가고 다음 륙반산(六盤山)에 갔다. 그런데이곳 연변의 지도일군 두분이 가는곳마다 우리를 따라다녔다. 그들은 자기들은 연변에서 왔다고 소개하면서 나를 연변에 초청하는것이였다. 나는 그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그것은 이번에 오지 못하면 명년에야 시간이 낼수 있기때문이다. 기실 이 며칠동안은 나의 휴식시간이다. 그런데 나는 휴식은 커녕 중국의 동서남북을 모두 돌아다녔다.

기자: 연변에 체류하는 기간이 너무 짧아 아쉽다. 기실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당신을 매우 존경하고있다. 지금 창밖에서 《성룡》,《성룡》하고 웨치고있다. 이것은 연변의 팬들이 당신의 예술매력에 매혹되여 보고싶어하는것도 있겠지만 더우기는 당신의 인격매력에 감화되여서일것이다. 이번의 연변행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성룡: 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연변땅을 밟았다. 연변의 풍경이 어떻는가고 묻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지하통로》로만 다녔으니깐. 래일 8시에 떠나야 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열성을 보았다. 연변에서의 사흘은 이 몇년래 내가 보고 겪은가운데 제일 열광적인 사흘이였다.

다음에 오면 연변에서 며칠간 더 체류하겠다. 그리고 나를 장백산에 데리고 가 달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장백산에서 조용히 홀로 있고싶다.

기자: 2004년 당신은 중앙TV의 《2003년도 중국을 감동시킨 인물》로 당선되였는데 당신은 그 칭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룡: 나는 주기만 하지 보답은 생각지도 않는다. 나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사랑을 줄뿐이다. 젊은 시절 나는 얼마간의 허영심이 있었다. 나는 노는데 시간을 많이 랑비했다. 그때 자선사업은 응부하기 위한것이였다. 그러나 매번 자선사업을 하면서 많은것을 느끼고 배웠다. 그래서 나는 자선사업을 하면 할수록 더욱 집착하게 되고 모든 신명을 다 바치게 된다. 이번에 연변에 와서도 나는 명년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후년에도 말이다. 나는 조장이나 륙반산에도 갈것이다. 해마다 많은 시간을 들여 이런 일을 하면서 나는 많은것을 배우고있다. 자선사업은 나에게 인간답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고있다.

북경올림픽유치위원회는 나를 또다시 올림픽유치형샹대사로 초청했다. 나는 올림픽유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몰랐었다. 나는 그저 가는곳마다에서 중국이 얼마나 좋다고 말해주군 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중국에 데리고 와서 우리가 영화를 찍는걸 보게 하고 또 영화를 통해 만리장성을 소개하군 했다. 나는 있는 힘껏 홍보했다. 나는 내가 이렇게 하는것이 유치에 얼마간의 도움이 된다면 나의 조국을 위해 저그마한 일이라도 해놓은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자: 올림픽유치의 성공을 통하여 중국은 세계에 우리도 할수 있다는것을 당당하게 선언하였다.

성룡:기실 중국은 세계적으로 그 위상이 올라가고있다. 이전에는 이런 감수가 없었는데 향항이 회귀한후 10여년래 중국은 대국으로서 세계적으로 그 중요한 위치를 구축해가고있다. 이제 50년후이면 미국을 초월할것이다. 우리가 한사람처럼 뭉치기만 한다면 말이다.

기자: 유엔친선대사는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사업을 하는가?

성룡: 락후한 지역이나 나라에 가서 사랑을 전파하는것이다. 윁남이나 캄보쟈 등 나라의 깊은 산속 아이들이 나를 알고있는것이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기실 그애들은 나의 영화의 복제품록상테프나 복제품 CD를 보고 나를 알았을것이다. 나으 책임은 에이즈에 걸린 아동들이 멸시받지 않게 하는것이다. 그애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그애들은 매설해놓은 지뢰 한매를 주어서 5딸라에 파는데 그 돈이 그애들의 몇달동안의 소비돈은 착실히 된다. 그러나 지뢰가 수시로 터질 위험이 있다. 그애들 어머니의 1년 수입이 60딸라이고 자식까지 여럿 딸렸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는 그곳에서 가정을 방문하면 꼭 운동도 잘하라고 당부한다. 그애들이 나를 본따기를 좋아하는데 나처럼 하려면 사지가 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적은 돈을 위해 지뢰를 줏거나 하면 얼마나 위험한가고말이다.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지 말것을 당부한다. 오토바이사고를 당해 죽는 사람이 너무나 많기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어느 나라에 가든 불쌍한 사람들을 돕군 한다. 유엔친선대사라는 명칭이 없어도 나는 자선사업을 할것이다.

기자: 지난 11월 12일 제 14회금계백화영화절에서 당신은 《신경찰의 이야기》로 《최우수남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액션스타로 이 상을 수상한데 대해 뜻밖이라고 생각하는가?

성룡:뜻밖이였다. 원래 여러번이나 후선인명단에 올랐었다.

기자: 시상식야회생방송을 보았는데 당신의 얼굴표정에서 격동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성룡: 나는 여러번 상을 수상했다. 세계적 상도 그렇고 특히 향항의 상도 그렇다. 나의 목적은 수상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좋은 영화를 찍어 전세계 사람들이 보게 하는것이다. 조선족, 한국인, 일본인을 포함하여 전세계인들이 모두 나의 영화를 보고 알게 하는것은 수상하기보다 더 힘들다. 나는 수상하기 위해 영화를 찍지 않았다. 제작하는 영화가 전세계관중들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 더구나 나는 동작위주의 액션영화를 찍는데 우리의 정감부분은 전부 잘려나간다.《신화》만 보더라도 원래 3시간 영화인데 만약 예술영화라면 그대로 놓아두었을것이다. 그런데 동작위주의 액션영화이기에 찍은 필림을 우리는 다 잘라버리고 1시간 50분으로 만들었다. 김희선과 감정을 말하면 영화에서 그와 나가 몸을 돌려 가버리는 작별장면이 있다. 내가 감정이 털끝만치도 없는 사람으로 되여버렸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수상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왜? 사랑의 눈길이 담긴 장면은 전부 삭제했으니깐.

기자: 일반적으로 액션배우들이 영화에서 싸울 땐 당당한 사나이이지만 련애에는 뒤전이라는 편향적인 생각들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룡: 한국이나 일본, 인도 그리고 아랍나라들에 가면 알아듣지 못하기에 성룡이 어쩌구저쩌구 한다. 그러니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때린다. 그러면 그들이 좋아한다.. 또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도 때린다. 그래야 세계의 시장이 있다. 물론 좀 과장된 말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어떤 장면은 리해하기 어려워하지만 대화보다는 신체언어를 어느 민족이든 다 알고있기에 이것이 수상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나는 수상에 대해 생각지도 않았다. 그날 시상식주비위에서 나를 삼아로 초청했을 때 나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은 내가 립후보자로 뽑혔다고 했다. 나는 아와티에 가는 일이 더 붕요하기에 못가겠다고 완곡히 사절했다. 그런데 두번째 편지에서 그들은 나더러 사진(謝晉)연출에게 시상하라고 했다. 덕망높은 연출에게 나더러 시상하라니 이는 큰 영예가 아닐수 없다. 시상이 끝나 나오려고 하는데 수상자로 나의 이름이 선포되였다. 나는 그때 어안이 벙벙했다. 호텔에 돌아와서야 나는 《아!》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기자: 당신은 명예와 리익을 추구하지 않음을 또 한번 밝혔는데 이것이 바로 당신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성룡: 나는 모든것을 다 겪어왔다. 만약 당신이 진정 나의 지나온 경력을 안다면 내가 명예와 리익 그리고 자만, 안하무인, 건달, 싸움질 등을 모두 해보았음을 알것이다. 자선사업에 몸잠그면서 사회대중과 나의 팬들이 일보일보 나를 가르쳐주었고 나를 오늘의 성룡으로 되게 했다. 나도 착오를 범할수 있다. 그 가운데서 나는 배운다. 내가 자선사업을 하는것은 자선사업을 통해 배울것이 너무나 많기때문이다. 어린시절 나는 공부를 못했다. 지금 나는 늦깎이공부를 하고있다. 그리고 배운것은 될수록 학생들에게 말하여 그들이 나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기자: 언젠가 당신은 《나는 수상이나 찬양소리를 듣기 위해 영화를 잘 찍으려 애쓰는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책임지기 위해 온 심혈을 다 쏟는다. 실패작이 나오는것은 스스로에게 통과시키지 못하고 총망히 관중들과 대면했기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실패하지 않겠는가?》고 했다. 이 말을 통하여 우리는 당신의 철저한 프로정신을 읽을수 있다. 그외 당신의 성공에 또 비결이 있다면?

성룡: 성공의 비결은 영원히 포기하지 않고 실패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대담하게 자신을 개변하는것이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개변하려 하지 않았는데 나는 지금 대담하게 자신을 개변하려 한다. 나의 양아버지인 가화(嘉和)회사의 하관중은 나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내가 《패왕별희(覇王別姬)》를 찍으려 하자 그는 안된다고 했다. 내가 《천대의 별빛(天臺的月光)》을 찍으려 하자 또 안된다고 했다. 모두가 예술영화이기때문이다. 내가 《초패왕(楚覇王)》을 찍으려 하자 또 내가 죽는다면서 안된다고 잡아뗐다. 그이가 세상을 뜬후 나에게 자주권이 있게 되였다.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답보하는건 질색이다. 그러나 두렵기도 하다. 실패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니기때문이다. 국내의 관중들이 받아들일지 몰라도 외국관중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것 역시 실패이다.《신경찰이야기》와 《신화》가 개변하기 시작한후의 성공작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제 몇년뒤 관중들은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성룡을 만나게 될것이다.

허성기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변신흥공업집중건설과 관련 계녕 기자물음에 답변 연변신흥공업집중구계획의 실시와 관련한 주정부의 소식공개회에서 연변신흥공업집중구관리위원회 계녕주임은 환경보호, 자금해결 등 초점문제와 관련하여 기자의 물음에 대답, 특히 각현, 시 개발구지간 대상건설에서 쌍방은 경쟁자이면서도 합작파트너로 될것이라고 밝...
  • 2006-11-21
  • 연길시조선족예술단 김철단장 《연변아리랑》으로 우리만의 선률을 우리 민족은 《아리랑민족》이라할만큼 각 지방에 천차만별 선율과 각양각색의 내용을 담은 《아리랑》민요가 수없이 많다. 하다면 연변《아리랑》은 대체 어떤 선율을 탄 《아리랑》이여야 할가. 연길시조선족예술단 단장 김철선생은 한국민요는 깊고 짙고...
  • 2006-11-17
  • 국내외에 유명한 중국해양대학 한국어학부의 창시인이며 이름난 번역가인 리룡해교수를 만난것은 바닷바람이 시원한 향항동로에 자리잡은 중국해양대학 한국어학부교무실에서였다. 1980년에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한 리룡해교수는 청도에 진출하기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번역국에서 국장으로 사업, 당시 연변주내에서 가장 젊...
  • 2006-11-13
  • 중국조선족중학생백명백일장 후원자 김의진 리란 부부를 만나 제2회중국조선족중학생《아리랑》컵 백명백일장 참석차 연변을 찾은 북경일진위업투자고문유한회사 김의진리사장과 부인 리란녀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서 그들의 짙은 민족애와 민족적사명감에 한껏 매료되였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하잖아요...
  • 2006-11-10
  • 한국 대구시인학교 주최 문학행사에 연변 시인 석화(48) 씨가 초청돼 특강을 진행한다. “문학의 고유한 향기뿐 아니라 우리말도 지켜야 하는 것이 연변 문학의 과제입니다.”시인 석화(48) 씨가 전하는 연변의 우리 조선족 문인들의 고민이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늘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 찾기로 귀결된다. 이는 ...
  • 2006-11-08
  • 기자(이하 기로 약함):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1979년에 일본에서 태여나 지금까지 줄곧 민족 무용을 전공해온 재일 조선인 이미순씨를 저희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미순(이하 이로 약함):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북경무용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미순이라고 합니다. 기: 이미순씨는 지금까지...
  • 2006-11-07
  • 그녀의 꽃을 보면 인생이 보이고 인간의 내심세계가 보이고 한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꽃은 관상용장식품으로서의 그냥꽃이 아니다.그녀의 마음이 담긴 부드러운 손길이 닿은 꽃은 그녀를 닮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된다. 만인의 화려한 련인 장미꽃으로부터 이름없는 잡초, 지어 보잘것 없는 지푸라기라도 그녀의 손...
  • 2006-11-03
  • 북경백마강음식오락쎈터 김정섭총경리를 만나 수도 북경에서 《백마강》하면 모두 인정해준다. 그만큼 인지도가 높고 실력이 탄탄하다는 얘기다. 일전에 중국조선족기업인경험교류회의 참석차로 북경에 갔다가 북경백마강음식오락쎈터 김정섭총경리와 인터뷰를 가졌다. 백마강쎈터는 지금 북경에만 하여도 6개 분점이 있는데...
  • 2006-10-26
  • [img count='200' img] 최규하(崔圭夏) 전 한국 대통령(향년 88세)이 22일 오전 로환으로 별세했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한국 전직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이었던 최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께 서울 서교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7시 37분께 영면했다. 지난 7월 미수(米壽...
  • 2006-10-22
  • 14개 종목 국가,성,주급 과학기술연구 수행 십년간 10여억원 경제효익 창출 연변농업과학기술연구원 생물기술연구소 부소장직을 맡고있는 현춘길(40)연구원은 대학졸업후 십여년간의 생물과학기술연구에서 나라의 공백을 메운 빛나는 연구성과를 이룩함과 아울러 10여억원의 경제효익을 창출하여 연변주의‘10.5’기간 특수...
  • 2006-10-2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