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반 없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자 김철남은 중경에서 해방을 맞는다. 당시 조선 국내의 정치상황이 불안했 탓으로 그는 중국에 머물러 사태를 관찰했다. 그래서 중국에 눌러 앉은 그는 1952년 페암으로 인하여 북경에서 세상을 떴다. 지금 북경에 건재하고 있는 이서군 녀사는 조선족에 대해 감정이 깊었으며 중국인으로서 조선에서 건너온 독립지사들을 많이 돌본 훌륭한 녀성이였다. 지금도 얼마간 조선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필자가 텔레비죤 제작을 위해 조선말로 몇 마디 할 것을 부탁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떠듬거리며 우리말로 이야기 하셨다. 《내가(나는) 조선사람을 고와해요. 조선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자고(했지요.) 바지저고리가 없어 내가 사서 (그들한테) 줬(지요.) 어디로 갈 때면 (돈을 줬지요). 》 필자가 또 다시 그들 가족한테 김철남선생이 번역한 <반달>노래를 부를 것을 요청하자 그들은 쾌히 승낙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그루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 ... ... ... 중국관내지방에서 활동했던 조선족 독립지사들 가운데는 홍군시기의 저명한 작곡가 최음파, 20년대 중국의 영화황제 김염, 저명한 화가 한락연, 인민의 음악가 정률성이 있는가 하면 중국의 저명한 예술가들인 김정평형제를 낳아주고 키워준 김철남과 그리고 그의 부인 이서군과 같은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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