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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채 그는 정녕 우리 연변 사람이였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8월6일 08시58분    조회:7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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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성보국제상무빌딩유한회사의 정영채회장이라면 연변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별반 없을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기업가로서가 아니라 우리 연변 사람으로서의 정영채회장이라면 잘 안다고 자부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것이다. 정영채회장에 대한 필자의 인상도 워낙 연변에 와 사업에 성공하여 돈도 많이 벌고 여러가지 사회일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한국기업인이라는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금년 6월하순 정영채회장이 조직한 제3차연변경제문화인한국고찰단일행으로 정영채회장과 8일간 동행하는 과정에서 정영채회장에 대해 더욱 직관적이고도 원초적으로 알게 되였다.  

한국고찰기간 정영채회장은 연변의 상황을 소개할 때마다 《연변》앞에 《우리》를 첨가하여 꼭꼭 《우리 연변》이라고 칭하군 하였는데 그렇게도 자연스럽고 떳떳할수가 없었다.

하도 인상적이여서 필자가 문의하였더니 정영채회장은 그저 《내가 그랬던가요?》하면서 사람좋게 웃고마는것이였다. 보아하니 정영채회장의 우리 연변이란 말구는 그 무엇을 나타내려거나 그 무엇을 보여주려는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라 이미 온몸에 슴배인 순수한 정감의 발로였다.

◎ 첫눈에 맺은 끈끈한 정

정영채회장의 연변에 대한 감정을 찰떡궁합, 천생연분이라 말함은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        

정영채회장의 중국진출의 목적지는 워낙 연변이 아니였다. 1992년 5월, 정영채회장은 당지정부의 요청으로 천진시를 방문하였다.

당시 천진시정부에서는 성보가 천진에 투자할 경우 당고개발구에 새로 지은 1500여평방메터의 2층 건물과 2500평방메터의 부지를 무상으로 주며 외자기업에 대한 기성우대정책외에도 별도로 특별정책까지 적용해주겠다면서 성보가 투자하기를 간절히 기대하였다.

중국 화북지역의 공상업중심지인 경제적위치와 북경, 화동, 서북, 동북과 린접된 지리적위치, 륙로, 수로 및 항공로의 교통중추의 전략적위치 그리고 그들의 열정과 우대정책이 정영채회장으로 하여금 천진에 투자할 결심을 내리게 하였다.

하지만 그해 여름의 연길행이 정영채회장의 천진투자결심을 대번에 바꿔놓았다. 연길역에 초행의 첫 발걸음을 내디딘 정영채회장은 여기저기에서 눈에 안겨들어오는 조선문간판에 너무나도 감수가 깊어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더우기 조선문간판을 보면서 느낀 놀라움과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전에 그의 가슴은 또 영빈교 량쪽교두에 자리잡은 물동이를 이고 서있는 조선족녀인의 생생한 조각상에 한없이 설레이게 되였다.

《아, 이런 땅이구나, 연변은 !》 정영채회장은 이곳이 바로 자기가 꿈결에도 찾아 헤매던 고장이였음을 깊이 느끼게 되였다.

그후 며칠간 접촉한 연길시의 몇몇 지도자와 사업일군들의 순박하고 솔직한 마음가짐은 정영채회장의 심금을 울려놓았다. 그리고 정영채회장이 《일자식뒤간》이라 일컫는 락후한 공중화장실과 기타 뒤떨어진 구석들도 정영채회장에게 내 동족들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여주려는 강렬한 충동을 안겨주었다. 정영채회장은 심사숙고끝에 천진의 투자를 포기하고 연길을 선택하기로 작심하였다.

당시 친척친우들과 친분있는 기업인들이 《먼저 연변에 진출한 사람들이 일이 잘 안풀린다며 중국내지로 옮겨가는 판국에 천진의 그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되려 연변에 들어가다니, 망할 징조라》며 도리머리를 하였지만 정영채회장은 요지부동이였다.

한것은 그가 돈을 많이 벌고 빨리 버는것을 우선으로 한것이 아니라 동족에 대한 사랑을 우선으로 하여 《인간의 깊은 정과 나를 리해해줄수 있는 내 동족이 바로 여기에 있거늘 어찌 돈과 그 가치를 비길수가 있으랴.》, 《나의 여생을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 하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기때문이였다.

◎ 고운 정 미운 정 다 함께

아무리 《첫눈에 든 정》이라도 아기자기한 고운 정은 물론이고 낯을 붉히는 미운 정도 함께 하는 가운데서 지켜지고 깊어지는 법이다.

한 기업인으로서 투자방향을 바꾸는 결단을 내리기도 조련찮은 일이지만 이것을 실행하는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였다. 한것은 지방마다 저마끔의 부동한 실정이 있기에 투자방향의 전이는 왕왕 투자대상의 전이를 동반하게 되기때문이다 한동안의 고심한 고찰과 연구를 거쳐 정영채회장은 가공업, 제조업도 좋지만 그보다도 연변의 지리적특색과 인문적우세를 살려 연길을 중국에서 으뜸가는 한국상품집산지로 건설하는것이 기업의 발전을 도모하고 나아가 연변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더욱 유조하리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였다.

몇십년간 기량을 닦고 성공을 거듭한 무스탕옷가공과 제조업을 그만두고 60세 고령에 미지의 령역에 발을 들여놓는다는것 그 자체야말로 크나큰 모험이고 도전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연변의 발전과 수요에 초점을 두고 정영채회장은 이 모험과 도전을 달갑게 받아들이고 실행해나갔다.

《호사다마》라고 첫걸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정영채회장이 매입하려는 성보빌딩부지는 이에 앞서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매입협의서에 서명도 했고 이런저런 약속도 하였지만 한국에 돌아간후로는 모두 종무소식이여서 시비가 좀 많은 땅이였다. 하여 연길시 관련부문들에서는 정영채회장이 이 땅을 매입하려는 의향을 밝히자 의례 반신반의하는 태도였고 워낙 760원으로 알았던 땅값도1993년부터는 평방당 2200원으로 껑충 뛰여올라있었다.

이렇다면 부지매입비용이 원 예산투자의 2배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 어찌할것인가? 마음의 갈등끝에 정영채회장은 《760원이면 어떻고 2200원이면 어떠랴. 내 인생의 마지막 사업이요, 동족을 위해 큰 일을 하려고 결심한 자신이 아닌가?! 가격차이는 크지만 그 차액을 연변에 기여한다고 생각하자. 어차피 그들에게 다 주려고 작심하지 않았느냐!》고 자신의 심경을 정리하고 토지매입의향서를 체결하게 되였다.

그런데 연길시 관련부문에서 작성한 토지매입의향서에는 15일내로 토지값을 입금시키지 못하면 토지매입이 자동무효된다고 밝혀져있었다. 15일이란 너무나도 촉박한 시간이였다. 이 짧은 시간내에 한국에 돌아가 해외투자허가수속을 끝내기도 바쁜데 해외투자자금 금융대출까지 받아서 중국에 보내온다는것은 그야말로 무리가 아닐수 없었다.

이것은 국빈대접은 다 받고 수속은 수속대로 다 해놓고 한푼도 투자하지 않은 일부 한국인들의 위약행위때문이라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정영채회장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 일을 성사시키리라 작심하였다. 정영채회장은 아예 한국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관련부문들에 줄박이로 출근하면서 자격있는 기업인의 체면을 걸고 이들에게 《중국에 가서 투자를 한답시고 큰소리 치고 접대만 받고 식언(食言)해버린 한국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는데 나만이라도 약속을 지키고 또한 한국사람으로서의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고싶다. 기업인의 약속은 곧 생명이 아니냐》고 열변을 토하였다.

정영채회장의 열정과 성의에 감복된 한국 관련부문들에서는 일심협력, 속성속결하여주었다. 하여 정영채회장은 단 4일만에 자금배정과 해외투자허가서까지 획득하게 되였고 중국을 떠나온 7일만에 연길에 토지값을 송금하였다.

연길시정부에서는 이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으며 1994년 4월 연길시호텔에서 환영연을 열고 정영채회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한편 소득세, 지방세 등 여러 면의 우대정책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연길시의 시책은 아주 좋았으나 관련부문의 일부 사업일군들의 그릇된 사업작풍으로 말미암아 관련지도자가 태도표시한 투자대상수속이 차일피일 미루어지거나 어떤 부문은 18번씩이나 다녔어도 수속이 다된 영업허가증을 손에 쥐지 못하는 등 인위적인 장애가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연길시정부에서는 연성환경건설을 강화하며 투자유치를 격려하는데 취지를 두고 이와 같은 페단들에 대해 비판감독하거나 인사조정하는 등 조치를 취하였다. 하여1994년 7월, 정영채회장이 8000만원을 투자하여 건설할 성보빌딩종합건물이 드디여 착공에 들어가게 되였다.

그런데 건축시공이 막바지단계에 들어섰을 때 일부 시공질이 허점이 드러나자 시공대는 공사를 포기하였을뿐만아니라 공정자금을 내주지 않았다는 허위사실을 꾸며 성보를 법정에 내세우려고까지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이러저러한 뜻밖의 일들은 정영채회장의 심신을 몹시 괴롭혔다.

하지만 정영채회장은 《내가 하는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큰 성공은 큰 대가를 치르기마련이다. 그래,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야 하며 어떤 고통도 참아내야 한다!》며 자신을 격려하였고 시공비용을 더 지불하면서 우수한 시공대를 청하여 시공을 계속하였다.

정영채회장이 이와 같이 합작의 단맛과 애로의 쓴맛을 모두 감내하면서 시종일관 변함없는 끈기와 인내력을 보일수 있은것은 사업성공에 대한 그의 불타는 의욕외에도 주, 시 정부의 다함없는 지지와 배려가 안받침되여있었기때문이였다. IMF비상시기 한국에서 들어오던 건축자금이 동결되여 시공이 중지상태에 처하게 되였다.

이 급박한 상황을 료해한 주, 시 정부에서는 성보에 대부금을 해결해주기로 하였다. 헌데 성보빌딩이 완성단계에 있는 건물이기에 담보물인 가옥소유증을 제공할수 없는것이 문제였다.

주, 시 정부에서는 대상유치를 추진하고 특수일은 특수처리하는 원칙에 좇아 각 관련부서들에서 성보에 특수결재를 해줌으로써 앞당겨 가옥소유증을 발급함과 아울러 대여금을 대출받도록 하여 시공의 순조로운 진척을 담보하였다.

이뿐이 아니였다. 1998년 성보빌딩이 완공될 때까지만 하여도 국내에서는 외국인의 백화점이나 호텔 경영이 허용되지 않고있었다. 어찌할것인가? 모든 준비가 끝나고 개업이 당금인데…정영채회장의 고충을 헤아린 주, 시 관련부문에서는 또 백화점경영허가를 할수 없는 상황하에서 한국상품전시매장의 명분으로 경영하도록 배려해주었다.

◎ 융합된 정 알찬 결실

서로 믿으면 믿을수록 주면 줄수록 낙언을 실천할수록 정은 더더욱 깊어지고 둥글어지고 알차고 주렁진 결실을 맺게 된다.

성보를 연변, 나아가 중국에서 으뜸가는 한국상품집산지로 부상시키기 위하여 1997년부터 정영채회장은 무상으로 장소를 제공하여주고 한국기업인들을 련계, 초청하는 등 다방면으로 연길시정부를 협력하여 3차례의 한국상품전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여러가지 경로로 한국과 류통이 원활하고 온당한 상품물류망을 구축하는 등 사업을 내밀었다.

하여 성보백화점을 1998년 개업이래 국내 25개 도시를 대상하는 한국상품 년판매액이 7억여원에 달하는 명실공한 한국상품집산지로 건설함으로써 연변의 대외 지명도와 영향력을 높이고 2000여개의 일터창출효과와 300여명 공상업주들이 치부의 꿈을 이루도록 하였다.

성보의 사업뿐만아니라 연변에 유조한 일이라면 정영채회장은 발벗고 나섰다. 정영채회장은 한국에서 《내가 본 연변》특강을 여러차례 조직하고 이를 신문지상에 발표함으로써 연변을 폭넓게 홍보하였고 3차나 연변경제문화인고찰단 한국방문을 조직하여 교류를 활성화하였으며 연길한국중소기업전용단지건설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연변의 문화교육과 자선사업에도 열성적이였다. 교육부문과 희망공사에 매년 10만 8000원, 문화발전사업에 루계로 70여만원, 사회 및 기타 공익사업에 루계로 150여만원을 기부하였다.

정영채회장과 성보국제상무빌딩유한회사의 사랑의 온정은 풍성한 결실을 낳았다. 각급 정부에서는 시종 정책, 도의, 재력, 여론 등 다원적으로 성보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긍정하여주었다. 성정부에서는 정영채회장에게 우수외국인전문가 칭호와 영주권 영예를 하사했으며 주정부에서는 성보에 연변중점보호기업, 봉페식관리기업 특혜를 주었다. 연길시정부에서는 정영채회장에게 연길시명예시민 칭호를 수여하였다.

정영채회장은 예기한 사업에서 큰 성공을 이룩하였다. 그는 자기의 성공비결을 동족에 대한 사랑과 중국의 당과 정부 시책에 대한 믿음 두가지로 개괄하였다. 바로 동족에 대한 사랑의 정, 중국의 당과 정부에 대한 믿음의 정이 있기에 성보의 사업 나아가서는 연변의 사업에 헌신하는 모범을 보이게 되였고 이 과정에서 점차 연변과 정감의 융합, 목표의 통일, 행동의 일치를 이루어 명실공한 《우리 연변》 사람, 우리 연변 사람의 일원으로, 우리 연변의 자랑으로 된것이 아니겠는가.

사진설명: 한국방문 고찰기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 김원웅의원을 만나는 자리에서 정영채회장은 스스럼없이  《우리 연변》의 투자유치정책과 투자환경을 소개하였다.

리련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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