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웃음의 설계사 최인호—가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10월26일 08시04분    조회:974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글을 쓰려고 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

2007년10월16일 새벽4시50분, 연변의 웃음의 설계사 최인호는 뇌출혈로 고별하셨다. 향년 61세이다.

세상 뜨시기전 닷새전 나는 우연히 거리에서 최연출님을 만났다. 당금 점심시간이라 나는 식사하러 가자고 청들었다. 《지금 낚시협회 동료들이 차에 앉아 기다린다》고 하면서 다음날 전화 할터이니 그때 자기가 한턱 낸다고 하시고는 작별을 고했다. 이것이 그이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최인호는 1946년4월22일,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북신가에 계시던 최정헌과 리영숙 두분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망과 어머님의 재가는 나어린 최연출에게 큰 타격이였다. 소학시절 어머니 생각이 나면 혼자서 슬피 울던 어느날 할머니가 동네 아즈마이들과 하시는 말씀가운데서 어머니가 연길 어느곳 어느 가에서 살고있다는걸 알게 된 최연출은 일요일 시간을 리용하여 도보로 연길에 가 수소문하여 어머니와의 상봉을 이룩하게 되였다. 하지만 재가한 어머니의 새 가정 환경이 그를 받아들일수 없는 형편이라 그날 밤으로 눈물을 날리며 또다시 도보로 룡정에 돌아오게 되였다. 한창 사랑을 받으며 커야 할 나이에 한번 본 어머니가 더더욱 그리워 학교를 간답시고 나와서는 모아산 큰 소나무밑에 책가방을 파묻어두고는 연길에 가 어머님을 뵙군 하였다.

그후 할아버지가 세상 뜨고 할머니 혼자서 인호를 거들어줄 능력이 없게 되자 또다시 재가한 어머님을 따라 그럭저럭 1955년까지 연길시하남소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가 조양공사에 자리를 옮기자 1959년사이에는 연길현조양공사소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에는 연길현조양중학을 다니다가 그해부터 1963년까지는 연길현조양공사 광영대대 4대에서 어머니를 도와 농업에 종사하게 되였다. 1964년, 연길현과외문예경연대회에서 그가 출연한 촌극《이 굴재를 어디다 내겠소?》가 출연되여 남편역에서 연기가 진짜농민처럼 신통하여 우수표현상을 수상하게 된것이 현문공단 전업가들의 눈에 들어 그이가 현문공단 배우로 뽑히게 되였던것이다. 하지만 팔도향 석산촌골안에서 소방목을 하던 그이는 숨차게 달려온 구락부 동료한테서 소식을 접하게 되자 온 산이 떠나갈듯한 목청으로 그렇게도 크게 높게 《아버지—어머니—》를 부르고 불렀다. 그날 밤으로 초막에 펴놓았던 이불짐을 꿍져지고 곧바로 룡정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전문단체에서 한창 희극배우로 앞날을 장식해갈 때 《문화대혁명》이라는 동란이 터졌다. 그는 또다시 이불짐을 둘러메고 고향에 돌아가게 되였다. 1978년, 당의 정책의 시달로 그는 다시 현문공단에 들어가 연극대 대장을 맡으면서부터 무용창작도 해보았고 작곡도 해보았으며 재담재간도 피웠는가 하면 북장고를 울리며 표연창도 부르면서 문공단성질에 어울릴수 있게끔 노력에 피땀을 날렸다.

1981년, 그는 김훈이 쓴 경희극 《두부장사》극본을 손에 쥐게 되였다. 배역이 부족한 문공단에서 그는 배역을 맡아하는 한편 자기의 첫 전업극단 연출을 맡아보게 되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경희극은 그해에 있었던 길림성순회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하게 되였다. 이렇게 그는 연출이라는 제2창조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고 그후로  장막경희극 《시름거리 웃음거리》의 연출을 맡았었는데 관객의 대절찬을 받았고 또 한번 성1등상좌에 오르게 되였다. 그후부터 《울고 웃는 사람들》,《변장련애》, 고전희극 《벌거벗은 량반》을 거치면서 1990년 그는 연변연극단의 연출로 초빙되였다.

여기에서 통속희극《털없는 개》를 연출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극은 근 2년사이 500회공연으로 총수입 백만원을 돌파하였고 사상 보기 드문 연극의 돌풍을 일으켰고 그로 하여 1992년에는 전국제2회연극경연에서 중앙문화부의 최고상인 문화부 《문화신극상》을 수상했고 따라 동북3성극목1등상, 길림성극목1등상을 수상했으며 한국《매일신문사》 요청으로 출국방문공연을 하였고 상해국제희극연극절주비위원회의 요청으로 상해에 가 초청모범공연까지 하였다. 그후로 장춘연극원에서 번역하여 한어로 공연하였고 하남성에서는 극본을 영화대본으로 개작하여 영화로 찍어 전국에 상영하였다. 하여 연변연극단은 물론 최인호연출의 명함은 국내외를 들썽케 하여 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또 그이가 맡아본 소품은 더 헤아릴수 없다. 그중에 그이가 직접 출연하였던 소품 《첫날이불》을 통해 그이는 《정치아바이》이라는 별호까지 얻게 되여 만나는 남녀로소마다 《정치아바이》라며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이는 생활의 재현자이자 가공자였으며 잃어져가는 민족의 생활언어의 전파자였고 방언의 보존자였다. 그이가 연출을 맡아본 소품마다에는 생활언어가 농후하고 소박한 인물의 방언과 격언이 많이 사용된것이 그 특징이다. 1965년부터 2007년 음력설까지 40여년사이 최연출님이 배우로 참여한 연극, 소품은 50여부이고 연극 연출을 맡고 창출한 연출작품은 20여부이며 소품 연출을 맡으신 작품은 도합 80여부나 된다.

그이가 수상한 상들을 펼쳐 보면 노력적 성과는 더더욱 아름차다. 그 대표적인 상들만 보더라도 1992년 중앙문화부 《문화신극목상》, 중국연극계의 최고상인 《금사자컵 연출상》, 동북3성《창작금상》, 《연출금상》, 《극목금상》 등, 1997년에는 영광스럽게 주직속문화계통민족단결진보표창대회에서 받은 《모범개인》칭호, 연변텔레비죤방송국과 연변텔레비죤신문사가 공동주최한 대중평의활동에서의 《최우수연출상》을 수상했으며 길림성과 연변에서 주최한 경연에서 받은 상들은 무지하게 많아서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2003년에는 영광스럽게 국무원 수당금도 받게 된 영광을 지녔으며 지난 9월12일에는 길림성문화청, 길림성문련, 길림성희곡가협회로부터 탁월한 그의 천재적예술재질에 대비해 《중국백년영예증서》평의활동을 거쳐 그이에게 《특수기여상》영예칭호와 증서를 수여하였다.

한 소몰이군 총각이 저명한 국가1급연출, 예술가로 성장된 그이의 인생길에는 눈물겨운 지난 어린 시절로부터 자강자립, 깊은 탐색과 창조가 깃들어있었기에 농민으로부터 배우, 다시 농민으로, 또 배우로부터 연출가로, 다음 웃음을 만드는 천사로 자신의 좌표계에 따라 한발한발 실천, 탐구, 새로운 착상의 절차에 이르기까지 그이는 뜨거운 정열을 중국조선족문화예술사업에 바치시였다.

중국조선족문학예술계는 하나의 웃음의 큰 별을 잃었고 중국조선족 관객은 웃음주머니를 잃었다.

존경하는 최인호연출님이여! 시름을 털고 홍모마냥 떠나시라! 저 높은 천국에서 앞서간 선배님들을 만나시여 그들께도 계속 《웃음푹탄》과 유머를 선사하시라! 지상에서 반짝이던 웃음의 큰 별자리는 비였어도 저 하늘가에서 반짝이게 될 새로운 웃음의 별자리에 남아 영원히 우리를 고무, 격려할것이다!

김학송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장백현 장백진 록강거리에 가면 식당업으로 알차게 살림을 꾸려가는 한 조선족녀성이 있으니 그녀가 바로 금강산식당 주인(45) 조금춘녀성이다. 1990년 조금춘녀성은 27세의 꽃나이에 십이도구촌에서 교원사업을 하는 김영호씨와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두 딸을 아기자기 키우면서 알뜰살뜰 화목하게 살아왔다. 하지...
  • 2008-04-17
  • 연길인사복무유한회사 명인영업부를 운영하고있는 리영빈﹙43살﹚씨는 돈을 벌줄도 알고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돈을 쓸줄도 아는 따뜻한 사람이다.태여나서부터 어려운 생활을 해보지 못한 쌍둥이를 키우는 리영빈씨는 얼마전 쌍둥이를 데리고 화룡시에 있는 “사랑의 집”에 찾아가 부모곁을 떠나 살...
  • 2008-04-17
  •   화룡시 팔가자진 룡산촌의 리옥순 부부는 다각경영으로   해마다 순수입 15만원 올리고있습니다.   지난 2002년부터 리옥순 부부는 가공소를 경영하는 한편  밭 20여헥타르를 도급맡아 다루었습니다. 치부하려면 기계화농사에 의거해야 하고 가공소도 현대화기계를 갖추어야 한다는 일념으...
  • 2008-04-16
  • 훈춘시제1실험소학교 김화련(37세)은 길림성 우수교원입니다. 그는 1992년에 연변제1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불타는 열정과 꿈을 안고 애들의 “코기러기”로 되였습니다. 17년간의 교육생애에서 김화련교원은 모성애로 학생들의 종신발전을 위해 기반을 닦아왔습니다.        ...
  • 2008-04-14
  • 2008년 북경올림픽에 선정된 우리 민족의 유일한 “꼬마기자” 리려영은 대련시조선족중학교 재교생입니다.리려영은 지금 올림픽을 계기로 집중훈련 중인것으로 확인됐는데 이미 초급단계의 수련과정은 마친 상태로 23일부터 고급단계 수련과정에 들어갑니다.초급단계 주요내용은 신문에 대한 리론지식과 취재기...
  • 2008-04-11
  • “동포청 참정권은 앞으로 제가 맡겠습니다.” 재외동포출신으로 18대 국회에 입성하게 된 조원진 당선자는 동포정책 관련한 앞으로의 활동계획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이어서 대한민국 밖에서 거주하는 국민들에게 차별이 없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필요한 심부름을 하겠다고 말했다. 한나라당과...
  • 2008-04-11
  • —안도현 만보진 영부촌 악문화녀성 1977년, 악문화(50세, 조선족)녀성은 안도현 만보진 영부촌에 시집갔다. 당시 시아버지는 일찍 세상뜨고 시어머니가 1남 1녀를 데리고 몇무 안되는 경작지에 매달려 생활하다보니 집은 째지게 가난해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것이 없는 극빈호였다. 설상가상으로 결혼 2년만에 아이가...
  • 2008-04-11
  • 연변과기대 IT교육원 구병국 교수, "IT교육으로 조선족 청년 자립지원"봉사활동 계기 중국행 결심현지기업에 취업 연결 보람평범한 고등학교 교사에서 유명 서버 프로그램의 국내 최고 전문가로의 변신 그리고 다시 중국 길림성 연변 과기대 IT 교육원의 교수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독특한 이력의 구병국씨는 조선...
  • 2008-04-11
  • 국제무역청사 1층에 가면 1평방메터 남짓한 시계수리방이 있는데 이곳에서 매일 손님들에게 고장난 시계를 열심히 수리해주고있는 장인이 있다. 21살에 시계수리를 배워서부터 장장 38년 동안 시계수리를 해온 류신유﹙59살﹚씨이다. 그는 어린 시절 성장발육이 멈추면서 키가 제대로 크지 못해 장애인으로 취...
  • 2008-04-10
  • ㅡ《인민법원보》 유성일사적 소개  “백성원장”의 칭호는 정부측에서 준것이 아니고 자기절로 봉한것도 아니며 길림성의 2700만 백성들이 무기명투표방식으로 선거해 이룬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2007년 “감동길림”10대인물의 한 사람으로 평의된 연길시인민법원 원장 유성일이다.지난 2월 2...
  • 2008-04-0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