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시즌 연변팀서 가장 무서운 잠재력을 보여준 선수다.
1989년 8월 21일생, 신장 174센치, 포지션: 미드필드. 연변팀서 가장 나어린 선수다. 년초 고훈감독이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선수는 천부적인 자질을 갖춘 선수”라고 극찬하던 장담이 시즌을 경과하며 현실로 다가온 셈이다. 어린 나이에 비해 경기를 읽는 시야가 탁월하고 그의 발끝에서 터지는 송곳패스는 팬들에게는 무한한 즐거움을 주었고 상대 수비수들에게는 절망만 갖다 주었다.
연변팀 12번 박성선수는 축구를 위해 태여났다.
박성선수는 “축구는 자신이좋아서 시작했고 그 동안도 쭉 좋아서 해왔기때문에 축구를 생각하는 마음과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컸다”면서 “다시 태여나도 축구를 하고싶다”고 말한다.
필자가 본 박성선수는 동그란 얼굴에 머쓱한 미소를 짓고있는 동년배친구들에 비해서 많이 성숙된 모습이였다. 아마 축구의 험난한 길을 고집하는 남아의 배짱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서 일가?
박성선수가 축구에 눈을 뜬 계기는 그의 소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성이 연길시연북소학교 1학년생이였던 그해,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을 굴리는 모습이 우연히 체육선생님이시던 최철구선생님의 시야에 안겨들었다. 이러한 연줄로 축구신동의 축구인생이 시작되였다. 박성이는 최선생님의 지도하에 학교축구팀에 몸담그고 꾸준한 훈련을 견지하면서 축구인생을 살아나가기 위한 토대를 착실히 닦아나갔다. 소학교졸업을 마치고 박성이는 당시 연길시 OK축구구락부로 자리를 옮겼다. 프로축구를 위한 첫 발자국을 대디딘 셈이다. 박성이는 어린 나이지만 또래에 비해 열심히 훈련하며 땀동이를 쏟아갔다. 박성의 이러한 모습은 곧 구락부의 책임을 맡았던 홍순구코치의 눈에 띄였다. 이어 구락부측의 주선으로 박성이는 중경력범 3선팀에서 기량을 더 련마할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 함께 중경행을 했던 친구들은 박성이를 포함해 도합 4명이였다. 이중 3명은 타향설음을 못이겨 중도하차했지만 박성이만은 홀로 남아 견지를 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 타국에서 애면글면하는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견지를 하리라 결심했다.
박성이는 어릴적부터 량친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와 생활해왔다. 박성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찍 그를 두고 로씨야장사길에 올랐으며 현재도 어머님만 그의 곁을 지키고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한국에서 품을 팔고있다.
고향과 먼 중경땅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는 애제자 박성이를 항상 주의깊게 눈여겨보아왔던 김영수코치가 그를 연변 2팀에 불러들였다. 그의 축구인생에 있어서 실로 고마운 부름이였다. 박성이는 곁눈 한번 팔지 않고 2년반가량 연변2팀에서 차곡차곡 기량을 쌓아갔다. 올초 고훈감독의 눈에 들어 연변팀의 조선전지훈련에 합류하며 그는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조선전지훈련서의 기대이상의 활약으로 연변팀감독진의 마음을 앗아간 이 꼬맹이는 드디여 올시즌 연변팀 12번 유니폼을 입게 되는 행운아로 되였다. 시즌 초반 선발출장의 기회는 없었지만 일단 교체멤버로 투입돼서는 감독진이 만족할만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그는 점차 팀에서의 립지가 넓어지며 주전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올시즌 그는 외적용병 김영준선배와 호흡을 맞추며 하프선의 중추역할을 해왔다. 공격진에 수송하는 패스질은 물론 공수를 조률하는 능력도 팬들의 찬탄을 받았다.
이제 박성선수는 겨우 18주세다. 고중생이 되여 교실에 앉아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가야 할 나이다. 하지만 박성선수는 자신이 선택한 축구의 길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참된 수양과 지식은 쌓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박성이는 지금도 틈나는대로 영어와 한어 학습에는 절대 게을리 하지 않고있다.
멀지 않은 장래 우리의 기대주 박성선수가 연변축구는 물론 중국축구를 “호령”하길 기대해본다.
◎ 프로필
출생년월일: 1989년 8월 21일생
신장: 174센치
포지션: 미드필드
배번:12번
특점: 어린 나이에 비해 경기를 읽는 시야가 넓다
소속: 연변구단서 림시 임대
애호: 음악을 즐겨 감상
리영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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