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김산 발굴한 중국동포 학자의 '쓸쓸한 영면'
[오마이뉴스 조창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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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산의 <아리랑>(Song of Arirang) 책 표지(김산-님 웨일즈 공저로 돼 있다). |
ⓒ (사)아리랑연합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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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우연은 없지만 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훗날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작가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 님 웨일즈는 르포를 쓸 혁명가를 찾다가 루쉰도서관에서 영문서적을 많이 빌려간 한 남자를 찾는다. 면담을 거부하던 남자는 그녀를 찾아와 동기를 묻고 인터뷰를 시작한다.
그 남자가 김산(본명 장지락)이고, 이 남자를 인터뷰한 기록이 1941년 미국에서 발간된 <SONG OF ARIRANG(<아리랑>)>이다. 이 책은 일제 때 조국을 떠나 중국 대륙에서 투쟁하던 수많은 조선의 독립전사들의 삶과 의지를 잘 보여준다.
2차 대전이 후반기로 치닫던 1943년 11월 22일 카이로에서 루즈벨트와 처칠·
장제스 등이 만나 종전 후를 논의했다. 우리 역사 교과서에는 그때 한국의 독립이 논의됐다고 나온다.
그런데 그 뒤편에 한 이야기가 있다. 루즈벨트가 참모들에게 한반도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요구하자, 한 해군 장교가 <SONG OF ARIRANG>을 추천했다. 루즈벨트는 <아리랑>을 통해 한국을 인식한 것이다.
만약 그가 <아리랑>이 아니라 일본의 관점에서 한반도에 대해 쓴 책을 봤다면, 그 후 한국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김산·정율성 등 항일운동가를 구해낸 고 최용수 교수
이처럼 의미가 큰데도, 김산은 한국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있다. 1984년 동녘에서 출간된 책을 지하서적처럼 돌려읽은 것이 김산에 대한 주요한 논의였다. 그 후 출판 금지는 풀렸지만 과문해서인지 김산을 비롯한 중국 내 항일운동가의 행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이도, 연구 기록도 찾기 힘들다.
김산 뿐만 아니라 인민해방군가인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 한락연(??然), 양림(?林), 김염 등 많은 공을 세운 중국 내 항일 운동가들에 대해 많은 사람이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할 만큼 우리의 무지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 가운데 통탄할 만한 소식을 최근에 들었다. 지난해 8월 19일 중국 내 항일운동 연구의 큰 별인 최용수(崔?水)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 교수가 영면했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기자를 포함해 어떤 한국인도 그 모습을 지켜보지 못했다. 고인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고국 친구들의 무관심 속에서 그렇게 쓸쓸히 하늘나라로 향했다.
생전에 고인은 조국에서 온 사람이 찾으면 언제라도 달려갔다. 아픈 몸을 이끌고 한국 답사단의 옌안(延安) 답사에 동행해 주었고, 결국 한국에서 강연하다가 쓰러졌다. 거의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몸으로 중국에 돌아와 투병했지만, 지난해 8월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중국 혁명열사들의 영구 장소인 빠바오산(八寶山)에서 치러진 고인의 장례식을 찾은 한국 사람은 없었다. 소식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기자는 우리 역사 연구의 가장 위대한 학자 중 한 분이 돌아가신 소식이 반년이 지난 후에야 알려질 만큼 한국의 인물 관리 시스템이 허술함을 절감한다.
목숨 바쳐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쓴 이들도 한없이 소중한 분들이지만, 망각의 수렁에 잠길 수도 있던 이들의 역사를 기록한 이 또한 소중하다. 고 최용수 교수는 중국에서 산화한 우리 독립운동가를 망각의 수렁에서 구해낸 위대한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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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인은 한국이 부르면 어디라도 달려가서 내용을 설명해주셨다. 고인이 작고하기 전에 갔던 옌안의 한 모습. |
ⓒ 조창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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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과 기자의 짧은 인연은 2005년 7월에 방송된 <아리랑> 김산의 다큐(KBS 스페셜 <나를 사로잡은 조선인 혁명가 김산>) 제작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 전해 늦겨울부터 그해 봄까지 진행된 중국 취재에서 우리는 최 교수님을 몇 번 찾아뵈었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 제작을 담당한 양승동 피디(현 PD연합회장)와 함께 고인의 댁을 찾았다. 우리는 약간은 어둑한 그 집에서 오랜 시간 자료를 뒤척이고 촬영했다. 그 때도 최 교수님은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셨지만, 우리는 최 교수님이 설마 위암에 걸렸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취재 후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최 교수님의 그간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 협조에 대한 수고료를 조금 건넨 우리보다 먼저 다녀간 많은 학자와 언론인들이 작은 예의조차 지키지 않은 것에 조금 섭섭한 느낌도 있어 보였다.
최 교수님은 본인이 사재를 털어 발굴한 자료를, 많은 학자들이 마치 자신이 찾아낸 것인 양 홍보한 것에 대해 적지 않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와달라는 요청이 오면, 최 교수님이 언제나 버선발로 나가셨다고 사모님은 기자와 통화에서 회고했다.
김산 관련 프로그램 방송 후 기자는 방송본을 들고 다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방송본을 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보도를 본 한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김산의 평전을 쓸 생각으로 찾아간 것이다. 자료를 드리고 고인과 기자가 공동저자로 집필하는 것으로 큰 틀에서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 후 기자는 찾아뵙는다고 여러 차례 마음을 먹었지만 찾아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결국 최근에야 일 때문에 최 교수님 댁에 연락한 박현숙씨를 통해 유고 소식을 접하고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일이 있으면 연락하던 한국인들이 단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에 사모님이 마음 아파한다는 말을 듣고 더욱 그랬다.
사모님은 기자와 통화할 때에는 "당신(고 최용수 교수)은 자기 돈으로 자료를 찾아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고국에 찾아가 발표하려 하셨고 결국 고국에서 돌아가신 거나 마찬가지다, 고인의 뜻대로 활동하셨으니 한이 없을 것이다"고 말씀했다.
사재 털고 발로 뛰어 찾은 자료들, 다른 이들에게 아낌없이 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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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최용수 교수의 고향인 신빈 왕청문에 세워져 있는 양세봉 장군의 기념상. |
ⓒ 조창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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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1936년
랴오닝성 신빈(新?)에서 태어났다. 신빈은
조선의용군의 최고 명장인 양세봉 장군(1896~1934)이 활동 후반기에 주둔했던 장소이자 이홍광 등 중국 내에서도 이름 높은 조선인 항일 혁명가들이 살았던 독립운동의 교두보였다.
고인은 1962년
베이징대학 철학과에서 저명한 학자인 펑요우란(馮友?)의 지도 아래 '공자, 사람을 발현하다'(孔子??了人)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다. 문화대혁명(문혁) 시기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다.
고인의 학문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초반기에는 마르크스주의 등을 해석하는 사회주의 철학자였다면, 1990년 이후에는 원래 전공으로 돌아와 조선의 유교 철학을 중국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고인은 <
조선 유학사의 특점과 그 작용>(1990년), <퇴계철학의 방법론>(1985), <퇴계의 지행관>(1997년), <이퇴계 이기관 분석>(1989년), <퇴계 변증법 사상>(1992년), <율곡의 실학사상>(199년), <율곡의 도통론>(1993년), <율곡의 화폐개혁의 혁명사상(2004년) 등의 저작으로 중국에 한국 유학을 알렸다.
이러한 철학 연구에 버금가는 공적 중 하나가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운동가 발굴이다. 조선 민족의 문화나 역사가 터부시되던 문혁 등의 시기를 견뎌낸 후, 고인은 1982년 재직 중이던 중앙당학교에서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군사위원을 지낸 조남기 장군을 만났다. 그 만남에서 조 장군은 고인에게 우리 민족사 연구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줬다.
그 후 어지간한 사람들은 접근할 수도 없던 당안(黨案)을 당 학교 교수로서 볼 수 있었던 고인은 김산을 처형한 캉셩(康生)의 서명을 비롯해 소중한 독립운동 자료를 발굴했다. 고인은 이후 <3·1운동과 중국 5·4운동 비교(1993년)>, <중국해방구에서 조선혁명가의 항일투쟁(1997년)>, <
저우언라이와 조선혁명 지사(1999년)>, <신화일보와 한국임시정부(2002년)> 등 저작을 출간했다. 특히 고인은 김산은 물론 한락연·양림·이철부(李?夫)·주문빈(周文彬)·정율성 등 조선의 항일운동과 중국 항일 운동의 교류에서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지사들의 자료를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고인은 한국에도 김산의 장시 <한 해 동지를 조문하여> 등을 소개, 발표했다. 또한 고인의 이름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의 상당 부분은 고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중국 내 항일운동가 등을 취재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찾은 이가 고인이었다. 김산의 아들인 고영광 선생을 비롯해 많은 이들은 이러한 고인을 어르신으로 모셨다.
한국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갔지만... 그는 쓸쓸하게 떠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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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빈 왕청문 복화소학. 많은 조선족 후예를 길러내던 복화소학은 학생 수 부족으로 폐교됐다. |
ⓒ 조창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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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최용수 선생이 복원하려 노력했던 인물 중 하나인 항일운동가 한락연 선생의 자화상. |
ⓒ 중국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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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8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이나 중국 내에서 일제 때 한중 합작 활동을 연구한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던 소수도 문혁 시기에 대부분 큰 피해를 봐야 했다. 소수민족을 탄압한 문혁 당시에는 소수민족의 활동 연구 자체를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활동했고 2차 대전 이후에도 중국에 남은 이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계열이었기 때문에 연구자 자체가 극히 드물었다. 이런 가운데 마지막 세대가 살아 있던 시절에 고인을 비롯한 몇몇 조선족 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다. 또한 옌지(延吉)에 있는 옌볜방송국 등이 이런 발굴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급속한 이주로 인해 조선족 자치주의 위상이 약화되고, 옌볜방송국 내부에서도 그러한 발굴 흐름이 한계에 부딪혔다. 이런 가운데 중국내 한국 항일운동사를 연구하던 고인의 운명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에 큰 공백을 불러올 것이다.
중국 내 항일운동사의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더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사 등 변강사 문제는 한중 양국의 갈등을 불러올 수 있는 반면, 한국과 중국이 합작해서 항일운동을 펼친 행적은 당연히 한중 화합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수 있는 작업이다.
한국과 중국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이러한 콘텐츠의 발굴과 공유가 소중한 이 때, 최 교수의 운명은 그러한 흐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안타까운 사건이다.
그간 고인과 오랫동안 교류해온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여사는 "선생님은 시아버님(단재 신채호 선생)이 베이징에 계셨던 16년 동안의 유적지 대부분을 당신의 몸으로 뛰어 찾으신 분이다, 시아버님에 대한 것뿐 아니라 모든 독립 유적을 그렇게 발굴했다, 또한 베이징에 남은 17가구 정도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연결해주신 분이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사 전공자인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최 교수님은 자료 공개에 대한 부담을 딛고 수많은 자료를 발굴해 중국 내에서 진행된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연 분이셨다"고 말했다.
이어 "당신이 발굴한 자료를 한국 학자들이 스스로 발견한 것처럼 발표한 것 때문에 좌절감도 많이 느꼈지만, 그럼에도 최 교수는 언제나 한국 연구자가 가면 직접 만나 다양한 자료를 주셨다, 한국에서 지원받지 못하면서도 그런 자료를 발굴했던 최 교수님이 떠나신 것은 역사학계의 큰 손실일 뿐 아니라 그 때문에 생길 자료 공백 문제도 안타깝다"고 말했다.
현재 중국 내 우리 역사 연구는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박창욱 교수를 비롯해 김성호,
김춘선,
김태국, 김병호 교수 등이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적 한계 때문에 중요 문서 발굴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고인은 중요한 사적을 발굴해서 한중 교류사 연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고인이 영면했으니 이제 이 부분을 채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이후 누가 고인의 연구를 이을지 걱정부터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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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신채호 선생 유적지. 베이징 백탑사 앞, 단재 신채호 선생이 살았던 진스팡지에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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