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무역청사 1층에 가면 1평방메터 남짓한 시계수리방이 있는데 이곳에서 매일 손님들에게 고장난 시계를 열심히 수리해주고있는 장인이 있다. 21살에 시계수리를 배워서부터 장장 38년 동안 시계수리를 해온 류신유﹙59살﹚씨이다.
그는 어린 시절 성장발육이 멈추면서 키가 제대로 크지 못해 장애인으로 취급되였다. 1967년 초중을 졸업한 류신유씨는 훈춘 경신진 모 촌에 하향지식청년으로 내려갔지만 그의 허약한 체구로 농사를 짓는다는건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시계수리부에 학도공으로 들어갔지만 시계수리를 배운다는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시계수리는 고급기술직업이였기에 시계수리공들은 이런 기술을 학도들에게 수월히 전수해주지 않았다. 그는 매일 출근해서는 청소만 했고 기술자의 동의가 없이는 시계를 만져도 보지 못했다. 이렇게 몇년이 흘러서야 겨우 시계를 만져볼수 있었고 점차 시계수리기술을 익히게 되였다.
모든 물품이 귀했던 시절이였던것만큼 시계를 살 때도 표제를 실시했고 표를 구하지 못하면 시계를 갖출 궁리를 아예 하지 말아야 했다. 이처럼 하나의 장식품이자 필수품이였던 시계였기에 한번 고장나면 주인의 가슴은 억장이 무너지는듯했다. 시계를 파는 백화점들에서는 이런 고객들의 심리에 맞춰 시계수리장인을 모집했는데 류신유씨도 그때 운좋게 연길시에 전근되여 제1백화점과 제2백화점에서 시계수리를 하게 되였다. 그의 뛰여난 기술은 고객들의 긍정을 받게 되였고 인기를 한몸에 지니게 되였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활수준이 향상되자 손목시계는 더이상 값진 물건이 아니였다. 따라서 시계수리직업도 인기직업에서 서서히 물러나야만 했다. 대부분 시계수리장인들이 손을 털고 나앉았지만 류신유씨는 시계수리를 멈추지 않고 오히려 눈길을 고급시계에 돌렸다. 그는 지금도 짬만 나면 고급시계서적을 들여다보면서 재충전을 하고있다.
류신유씨에 따르면 로투구진에 사는 한 갑부는 인민페로 40여만원씩 하는 로렉스시계를 차고있는데 이런 갑부가 주적으로 적지 않다고 한다. 400~500딸라씩 하는 시계를 갖춘 사람은 셀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것이다. 일단 이런 시계가 고장나면 수리비도 만만찮기에 시계수리직업이 절대로 밀려나는 일이 없을것이라며 오늘도 그는 시계수리에 열을 올리고있다.
글/사진 김광석기자 실습생 박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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