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호 선생은 함북 회령 출신으로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으로 이주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옌볜지역 조선인들은 룽징시내 광장에서 반일민중대회를 열었고, 이때 16살 소년이었던 선생은 천주교회 종루에 올라가 행사 시작을 알리는 교회종을 쳤다. 일제의 총칼에 시위대 수십 명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목격한 그는 '나도 공부를 해 저런 용감한 청년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고, 1926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다. 1933년 1월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돈을 받아가지고 함흥으로 돌아왔다 체포돼 징역 6년을 언도받았고 이감 중 만세를 불러 징역 10월이 추가됐다.
1949년에 설립된 옌볜대학교 초대 부총장으로 민족대학의 기틀을 마련했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숙청돼 죽음을 맞았다. 할아버지가 세운 옌볜대학을 졸업하고 2005년 충북대 대학원에 입학한 임씨는 "조선족 사회의 붕괴로 점차 잊혀져 가는 한민족 고유의 민속문화를 지켜내기 위해 옌볜지역의 세시풍속 등을 심층적으로 다루는 논문을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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