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근선생의 연극인생
-저명한 표연예술가 리영근선생의 연기생활을 뒤돌아본다
장장 60년간 표연예술의 외길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 민족 연극소품의 대명사로 불리울만큼 대중들과 익숙해진 국가1급배우 리영근선생,1991년 리직휴양한후에도 연기생활을 멈추지 않은건 물론 주정협위원, 연변주문련 고문,연변연극가협회 고문 등으로 활약을 계속하던 선생이 인젠 년세가 많고 건강상황도 좋지 않아 새로운 작품에 출연하지는 못하고있지만 많은 기성작품들은 지금도 라지오방송이나 텔레비죤화면을 통해 청취자,시청자들과 대면하면서 가가호호의 안방에 웃음을 선물하고있다.
곡절많은 인생
1930년 12월(양력 1931년 1월)에 룡정에서 태여나 훈춘에서 첫돌을 쇤 리영근선생은 소년시절 극장부근에서 살면서 공연관람에 취미를 붙였고 구경한것들을 학교에 나가 자랑하면서 흉내를 내다보니 자연 재간이 늘어 제법 연극을 할수 있게 되였다.
소학교 1학년때 《함정에 빠진 호랑이》라는 과문내용을 가지고 만든 연극에서 호랑이역을 맡은적 있는 그는 해방을 맞던 해인 국민고등학교 3학년때 홍군을 환영하는 연극을 자체로 창작,공연하여 교내에서 소문을 놓았다.그 연극을 사회에 나가 공연하면서 자신심이 생긴 그는 두번이나 자기가 대본을 쓰고 연출도 맡은 연극을 내놓아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졸업후 조선에 나가 공부할 타산으로 집에서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던 1947년의 어느 하루,김철홍이라는 사람이 집에까지 찾아와서 문공단을 조직한다며 연극을 하지 않겠는가고 제의해왔다.이렇게 《혈채》라는 연극에서 지주집 돼지몰이아이의 역을 맡으면서 두루 활동에 참가하다가 훈춘연극단에 들어간 선생은 선배님의 원고를 정리해주면서 극본쓰는 요령을 배웠고 얼마후에는 문예부장직을 맡고 《돌아선 사람》,《쑥덕이》 등 극본을 창작,공연하기도 하고 《태양을 기다린 사람들》 등 조선의 극본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던 1950년 초봄 훈춘연극단이 연길에서 공연을 펼치게 되였는데 그번 공연에서 싹수있는 젊은이로 점찍힌 선생은 그해 11월에 연변문공단(연변가무단 전신)에 전근하여 연극인생을 본격적으로 살아갈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1956년 1월 연변연극단이 정식 설립된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연극 《춘향전》에서 호방,방자의 역을 맡은 선생은 그해 3월 북경에서 펼쳐진 제1차전국연극콩클에 참가하여 허동활,정인덕선생과 어깨나란히 연기3등상을 수상하였다.(당시 《춘향전》은 집체공연1등상을 수상)
그뒤를 이어 《심청전》,《뻐꾹새 운다》,《청춘의 노래》 등 연극에서 배역을 맡고 장춘영화촬영소에 영화배음도 다녀오던 선생은 1958년 8월 우파로 획분되여 변소청소를 하고 강철을 녹이는 현장에 내려가 로동개조를 하다가 나중에는 농촌에 쫓겨가야만 하는 서러움을 지녀야 했다.
1960년에 모자를 벗고 연극 《장백의 아들》에서 리원길의 배역을 맡는 등 사업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의연히 자산계급으로 몰리운 선생은 공회조직에도 들지 못하고 모범으로 선거될 자격도 얻지 못하였다.그리고 문화대혁명이 시작된후에는 또다시 투쟁대상으로 지목되여 무거운 패쪽을 메고 조리돌림을 당하며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고진감래
개혁개방후 마음껏 재간을 뽐낼수 있게 된 선생은 삼로인 《새로운 장정》 등 작품을 창작,연출,출연함과 동시에 연극 《해란강반에 봄이왔네》( 최정연 작, 리동철 연출) 등에 출연하면서 연극인의 자랑을 체험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30돐헌례작품인 이 연극은 후에 《첫봄》으로 탈바꿈되여1982년부터 1983년까지 연변 각지를 순회하면서 100여차 공연되였고 문화부의 초청으로 북경의 무대에서도 선을 보였다.이 작품은 또 장춘영화촬영소에 의해 영화로 개편되여 전국에 상영되기도 했는데 영화와 연극에서 선생이 맡은 리귀남의 형상은 너무도 진실해서 호평을 받았다.
이시기 선생은 또 《조선어대사교재》 6책 도합 70여만자을 집필하여 중앙연극학원 조선족반학생에게 강의용교재를 제공하였고 1984년부터 1988까지 직접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1989년에 소품 《사위감점고》를 창작하고 한성후선생과 함께 연출을 본 선생은 작품에서 복금의 삼촌 역을 맡고 희극적인 연기를 펼치여 대중들에게 폭소탄을 안겨주었다. 1989년12월에 무대에서 공연되고 1990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음력설야회에서 방송되여 인기를 몰아온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조선족대중들의 환영을 받아 이따금 《요청한마당》프로에 등장하고있다.
하지만 리영근선생이 진정으로 연기인생의 전성기를 누린 시기는 그래도 환갑년인 1991년부터 꼽아야 할것이다.
1991년, 중국연극연구회의 첫 금사자컵평의에서 《연기 금사자컵》을 수상한 리영근선생은 리직휴양한후 연변연극단의 예술고문으로 재초빙받고 연기생애의 두번째 청춘을 맞이하였다.이시기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짝지지 않을 정도로 정열적으로 사업을 펼쳐나갔는데 희극 《털없는 개》에서는 주인공 성구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여 국내외에 소문을 놓았다.
리종훈, 김웅걸 작, 최인호 연출로 된 《털없는 개》는 1992년 5월 제2차전국연극예술콩클에 참가하여 문화부로부터 《신극목상》과 《문화표연상》을 수상하였고 그해 할빈에서 열린 동북3성연극콩클에서 극목공연《1등상》을 수상하였으며 리영근선생은 《표연연기1등상》을 수상하였다.이 작품은 또1992년 상해국제희극축제 주비위원회의 초청으로 상해에서 공연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1995년까지 동북삼성 각지에서 도합 446차 공연(위문공연은 포함하지 않았음)되였고 총수입 100만원을 돌파하였으며 한국《매일신문사》초청으로 한국에서 6차의 공연을 펼치여 연변연극단력사이래 첫 출국공연작품으로 기록되였다.따라서 성구의 형상으로 가는 곳마다에서 인기를 누린 리영근선생 또한 1992년에 중국조선족 《진흥컵》 배달우수문예상을 수상하고 1993년에 길림성연극예술콩클에서 연기1등상을 수상한외 1992년 10월 1일부터 국무원특수수당금을 향수하게 되였으며 1993년에는 길림성정부로부터 대공을 1차 기입받았다.
인기정상을 창조
1990년대 중반에 들어와 리영근선생은 많은 작품을 창작하고 직접 출연에 참가하면서 인기정상을 창조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선생이 직접 창작,출연한 소품 《보고전의 보고》와 《렬사증문제》(김정권과 합작)라고 할수 있다.
공금으로 질탕 먹고마시는 현상을 신랄하게 폭로풍자한 소품 《보고전의 보고》와 술중독증에 시달리는 퇴직휴양간부의 형상을 빙자한 소품 《렬사증문제》는 현실생활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반복적인 사색에 립각하여 창작한 작품으로서 관객들은 선생의 출중한 연기를 통해 단순한 작품흔상만이 아닌 심오한 사상내용을 터득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연변TV방송국의 1996년 음력설야회에서는 《렬사증문제》가 최고인기를 누리고 1997년 음력설야회에서는 《보고전의 보고》가 기둥종목의 하나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이밖에 역시 선생이 출연에 참가한 작품 《BB극조》또한 1997년 음력설야회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이시기 리영근선생이 직접 창작하고 출연한 소품으로는 며느리를 끼고사는 로인네들의 고충을 그대로 펼쳐주는《우리 집 아침》,홀로 외롭게 사는 로인들의 황혼사랑을 그녀낸 《팥죽련정》,사회적으로 점점 더 크게 만연되여가고있는 도박바람을 풍자한 작품 《노랑각시》 등 이밖에도 여러부가 있다.
1995년부터 2000년사이 선생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문예부의 예술고문으로 초빙되여 편집,연출,배우로 활약하였는데 《주말극장》 《가정무대》 등 프로에서 그 역할이 대단하였다.
정력이 왕성한 리영근선생은 70고개를 넘은 21세기초까지도 계속 새로운 작품에 출연하면서 우리 민족의 연극,소품무대를 활성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그런 성과로 리영근선생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는 연극인으로 자리매김하였고 2003년1월 연변텔레비죤방송국과 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사, 문화국 등 단위들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내가 즐기는 배우》추점평의활동에서 《최우수배우》로 당선되였다. 2007년에 있은 국가문화부 《중국연극100돐기념평의활동》과 길림성정부, 길림성문화청 《중국연극100돐기념평의활동》에서 선생은 《특수기여영예상》을 수상하였으며 중공 연변주위와 주정부에서 조직한 《중국연극100돐기념평의활동》에서는 《민족문화예술특수기여영예상》을 받아안는 영광을 지니였다.
그리고 중국조선족연극사업에 대한 리영근선생의 특수한 기여에 비추어 연변연극단에서는 1996년에 《리영근 무대예술생애50돐야회》를 마련하고 전주를 상대로 순회공연을 조직하였으며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2007년5월에 《문화광장》프로를 통해 리영근선생을 널리 소개하였다.
존경받는 부부연극인
리영근선생네 량주는 몇십년간 연극활동에 종사하면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행복한》 연극인부부이다.
1958년 연극 《뻐꾹새는 또 운다》에서 각기 지주의 아들인 장필호(리영근 분장)와 윤정옥의 배역을 맡고 1959년에는 연극 《장백의 아들》에서 변절자 리원길(리영근)과 봉녀의 배역을 맡은 리영근선생과 전정자녀사는 무대우에서는 서로 상반되는 인물형상을 창조하면서 갈등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할 때가 더욱 많다.그럼에도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도 손발을 척척 맞추고 연기를 실감있게 펼쳐갈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있다.오죽하면 어쩌다 연극구경을 갔던 리영근선생의 어머님이 무대우에서 남편의 따귀를 때리는 며느리의 모습에 통 리해가 가지 않아 여러번이나 사설을 늘여놓았을가?!
이들 량주가 함께 출연한 작품으로는 이밖에도 1964년에 무대에 올린 연극 《상촌의 소나기》(1964년, 리영근 권두성 역. 전정자 최과부역),TV소품 《우리집 아침》(1997년, 리영근 령감 역,전정자 부인 역),TV소품 《누나 선생》(1999년, -리영근 시골령감 역. 전정자 선생 역) 등 여러부가 있다.
다년간의 무대생활에서 정이 들어 1962년 4월 29일 저녁 련습을 하다가 대충 세수를 하고 간소한 결혼식을 치른 두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음고생도 그렇지만 많지 않은 로임으로 여섯식구의 생계를 이어가느라 허둥댈 때가 더욱 많았다.
큰딸이 동북사범대학 중문학부에서 공부를 하고 둘째딸이 연변대학에서 일어를 배우고 그 아래로 남자애 둘이 중학교에 다니던 가장 어려운 시기 전정자녀사는 어떡하든 가정생활에 보탬하려고 모지름을 썼다.꽈배기(타래떡)를 사다가 기차를 타고 가서 쌀을 바꾸어오기도 하고 남의 기계를 빌려서 만두껍질도 만들어보고 서시장에서 매대를 하나 얻어가지고 남의 물건을 팔아주기도 하면서 아글타글하는 마누라가 너무도 안스러워 한번은 리영근선생이 다른 사람을 따라 료녕성 해성에 물건구입을 갔다왔다고 하니 그 어려움을 구태여 설명해선 무엇하랴?
그러나 생활형편이야 어떠하든 무대우에서는 항상 밝은 모습으로 연기에 최선을 다하고 살아숨쉬는 인물형상으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안겨준 두분은 연기생활에서 얻는 성취감,만족감으로 생활에서의 빈구석을 메꾸며 인생을 보다 아름답게 가꾸어왔다.
자식 넷이 선후로 자립하고 가정살림이 펴인 오늘날 비록 연기생활을 접기는 하였지만 두분은 또 자식을 따라 장춘에 가서 만년을 편안히 보내면서 천륜지락을 만끽하고있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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