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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활-조선족 연극계의 거장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11월19일 09시40분    조회:7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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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활선생은 중국조선족연극계의 제1대 원로예술가로서 60여년을 하루와 같이 중국조선족연극예술의 발전에 모든것을 바쳐왔다.

장장 60여년의 연극생애에서 배우,연출가로 활약하면서 무수한 예술형상을 창조한 선생은 2007년 4월 《중국연극 100년》축제에서 공화국의 연극발전에 중대한 기여를 한 리묵연 등 30여명 원로연극예술인들과 더불어 《나라에 돌출한 기여를 한 연극예술가》라는 칭호를 수여받고 호금도총서기의 접견을 받기까지 했다.                 

              천부적인 표현예술가

1925년 3월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조양천의 허씨네 마을에서 태여난 허동활선생은 13살때 조선류랑극단이 공연하는 연극을 로천극장옆의 초가집지붕에 엎드려서 관람하면서부터 연극인생을 동경하기 시작했다.그뒤 일본에 가서 고학하게 된 선생은 많은 연극과 영화를 보면서 연극의 꿈을 키워나갔고 귀국한후 농민야간학교 교원으로 되여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농민들을 상대로 글을 가르치던중 1946년 음력설을 맞으며 연극 《해방된 기쁨》을 창작하고 직접 연출과 주역을 맡았다.이것이 인연이 되여 선생은 1947년에 조양천문예선전대에 들어갔으며 선후로 연극 《부활》,《참군》  등에서 주역을 맡고 연변각지 순회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1948년 연변문공단에 입단한후 단역으로만 출연하던 선생이 주역을 맡게 된것은 번역극 《백절불굴》이 처음이였다고 한다.당시 주역을 맡은 배우가 병으로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였는데 그 배우를 대신해 림시로 주역을 맡을수 있는 사람을 고르던중 선생이 선택되였던것이다.아무런 준비도 없이 주역을 맡게 된 선생은 그날밤 대본을 들고 거리로 나가 이튿날 두부장사아줌마의 사구려소리가 들릴 때까지 가로등밑에서 대본을 외웠고 다들 점심식사하러 나간 사이에도 홀로 무대에 남아 감정처리며 위치 등을 반복적으로 련습하였다.이렇게 고작 하루동안 련습하고 무대에 오른 선생은 대사 한마디 틀리지 않게 제대로 연기를 하여 선배들의 긍정을 받았고 그후부터는 줄곧 연극을 이끌어가는 주역의 중임을 떠메게 되였다.
1952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연변문공단 공청단서기로 활약하게 된 선생은 연길현문공단과의 련합공연으로 무대에 올린 조선고전명극 《춘향전》에서 리도령역을 맡고 50여차 공연에 참가하였다. 1956년 금방 설립된 연변연극단은 전국 제1차예술축제에서 고전명극 《춘향전》을 선보였는데 선생은 월매역의 정인덕녀사,호방역의 리영근선생과 어깨나란히 표현상을 수상하였다.

그번 축제에서의 돌출한 표현으로 허동활선생은 1956년 6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중앙연극학원 표현반에서 연수를 받을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이 기간 선생은 쏘련의 저명한 전문가들의 강의를 귀담아들으면서 표현 및 연극리론을 부지런히 배움과 동시에 주립파의 《폭풍취우》,쉑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에트》에서 배역을 담당하여 주은래총리를 비롯한 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연극배우로서의 질적인 비약을 실현한 선생은 연수가 끝나 극단에 돌아온후 《심청전》,《청춘의 노래》,《장백의 아들》 등 연극에서 주역을 맡고 부동한 성격의 인물형상을 성공적으로 창조하였다.  

이 시기에 선생이 창조한 인물형상가운데서 가장 소문을 놓은것은 《심청전》에서의 심봉사역이였다.당시 이 배역을 맡은 선생은 주인공 심봉사의 내적인 성격을 진실하게 부각하기 위해 우선 소경들의 심리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소경들만의 감수를 체험해보기로 작심하였다.공원가두에 살고있는 소경부부를 여러번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경들이 길을 걸을 때는 세번째 눈인 지팽이에 의거하고 낮과 밤은 피부로 느끼는 온도로 가려낸다는것을 알아낸 선생은 련습기간 눈을 천으로 싸매고 지팽이를 짚고  출퇴근하면서 맹인생활을 직접 체험하였다.

이렇게 애쓴 보람으로 공연시에는 눈을 뜨지 않고도 자유자재로 표현할수 있었는데 그 연기가 어찌나 신통한지 보는 사람마다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이 작품은 1957년 3월부터 80년대까지 무려 500여차 공연되면서 심청역은 곽정희녀사로부터 렴청자녀사에 이르기까지 6명의 녀배우가 교체되였지만 심봉사역만은 줄곧 허동활선생이 맡았다.따라서 맹인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맹인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심층연구를 통해 창조한 심봉사의 형상은 선생의 연기생활에서도 불후의 인물형상으로 인정받고있다.

                   뛰여난 연출가

《장백의 아들》에서의 박철 등 부동한 성격의 인물형상을 창조하면서 출중한 연극배우로서의 이미지를 확립한 선생은 또 1958년부터 많은 작품에서 연출을 맡고 연출가로서의 뛰여난 재능을 자랑하였다.

반우파투쟁시기 극단의 연출들이 죄다 우파모자를 쓰고 연극계에서 밀려나게 되자 중견배우로 활약하던 허동활선생에게 자연히 연출임무가 떨어졌다.이렇게 핍박에 의해 연출의 길을 걷게 된 선생은 지금까지 번역장막극 《뻐꾹새는 또 운다》로부터 시작하여 《잘가거라 꽃사슴아》,《눈속에 핀 꽃》 등 26부의 장막극,근 20편의 단막극에서 연출을 담당하였다.

수십년간의 연출사업에서 선생은 극본의 의도에 따라 배우의 연기력을 이끌어주고 연극에 관여되는 제반 예술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데 정력을 몰부으면서 누워있는 연극인 극본을 무대에 일으켜세우고 살아숨쉴수 있도록 재창조하기에 최선을 다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이 가장 중시를 돌린것은 생활체험이였다.1963년 벼육종가 류창은을 모델로 한 장막연극 《광활한 천지》가 창작된후 연출을 맡은 선생은 련습할 때 보다 생활적인 화폭을 무대에 재현하기 위해 련습장을 아예 벼육종가이며 전국로력모범인 최죽송이 거주하는 연길시 장백공사 신풍촌으로 옮겨갔다.그리고 류창은역을 맡은 한성후선생은 최죽송육종가네 집에,반면인물역을 맡은 리영근선생은 애꾸러기네 집에,말괄량이역을 맡은 구순자녀사는 말새단지네 집에 배치하는 등 방법으로 배우들이 자기가 맡은 배역과 비슷한 경력을 가진 농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무대실천에서 보다 진실한 연기를 펼칠수 있도록 조건을 창조해주었다.1964년 봄에 첫 공연의 막을 올린 《광활한 천지》는 관람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고 당시의 성문화국 국장으로부터 그 다음해에 있게 될 동북3성연극콩클에 참가하기로 약속까지 받았다.비록 10년동란이 터지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때의 성취감을 선생과 배우들은 지금도 기억하고있다.

장기간의 연출실천에서 선생은 또 배우의 대사창조로부터 의상,분장,음향,조명,소도구배치에 이르기까지 제반 요소들의 완미한 조화로 보다 아름다운 연극형상을 선보이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하기에 선생이 연출을 맡은 많은 작품들은 멋진 장면예술처리로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고 보다 큰 사회적효과를 거둘수 있었다.
배우의 자질이 높아야만 보다 훌륭한 예술형상을 부각할수 있다는데 주의를 돌린 선생은 또 한부의 연극에서 꼭 1명의 우수한 배우를 양성해낸다는 목표를 가지고  목적성있게 신인배우들을 키워냈다.선생의 노력에 의하여 연변연극단에서는 적지 않는 인기배우들이 새록새록 출현되였는데 《광활한 천지》에서 류창은역을 맡았던 한성후,《네온등밑에 선 초병》에서 동아남역을 맡았던 리동범,《눈속에 핀 꽃》에서 우파분자의 아들역을 맡았던 박강철,《심청전》에서 심청역을 맡았던 렴청자,《우리 학교 철남이》에서 철남역을 맡았던 고송희,《침묵속에서》에서 주역을 맡았던 한석봉 등은 모두 허동활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연변연극단의 중견배우로 자라났다.

                 일인다역의 연극인

허동활선생은 1946년에 서툴게나마 《해방된 기쁨》이라는 처녀작으로 극본창작의 첫발자국을 떼고1950년에 당시의 주당위 선전부장 최채동지의 인솔하에 화룡현의 농촌에 내려가 3개월간 생활체험을 하는 기간 농민과외작가와 합작하여 단막극 《종소리》를 창작하였다.꼬박 16년이 지난 1966년에 와서 선생은 연변연극단 업무부단장의 신분으로 장막극 《초유록》의 집체창작에 참가하면서 진정으로 예술작품창작의 단맛을 체험하게 되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가운데서 수정주의분자,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반동권위,외국특무로 몰리우며 투쟁을 받다가 처자까지 거느리고 훈춘현 량수공사 하서대대에 내려가 빈하중농들의 재교육을 받게 되고보니 금방 펼치기 시작한 창작의 나래를  접을수밖에 없었다.  

한시기 예술이란 두글자만 들어도 도리머리를 흔들 정도로 예술과는 담을 쌓고 살던  선생은 농민들의 간청에 못이겨 하서대대문예선전대의 공연종목을 지도하면서 예술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1972년 연극단에 돌아온후 선생은 한원국작가와 함께 장막극 《장백의 봄우뢰》를 창작하면서 또다시 창작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1982년에는 원로작가 황봉룡선생과 손을 잡고  장막극 《잘가거라 꽃사슴아》를 창작하고 연출을 맡았다.

1978년에 또다시 연변연극단의 부단장,예술위원회 주임,연출 등 직무에 복직하고1981년에는 연변연극단의 단장중임을 떠메고 행정사업까지 맡아보게 된 선생은 1985년 리직휴양하기전까지 우리 민족의 연극예술을 위하여 휴식을 모르고 뛰였다.이 기간 연변연극단은 동북3성의 조선족집거지역을 순회하면서 《장백의 아들》,《심청전》 등을 다시 무대에 올림과  동시에 《눈속에 핀 꽃》 등 자체창작작품과 《경사가 났네》 등 번역작품들을 공연하여 광범한 조선족관람객들의 문화생활에 이채를 돋구어주었다.

연변연극단의 제1책임자로서의 선생은 배우들이 예술실천가운데서 자질향상을 가져오도록 인도해줌과 아울러 외계의 전문가들을 모셔다 강의를 하게 하고 배우들을 외지로 보내여 연수받게 하는 등 방법으로 연극단성원들의 지식구조를 갱신하였으며 리동철,전득주,방미선 등 전도가 있는 젊은이들을 전문대학에 보내여 학습하도록 하였다.학습을 거쳐 여러 면에서 제고를 가져온 이들은 연극단에 돌아온후 골간으로 활약하였으며 오늘날 전득주는 연변연극가협회 상무부주석으로,방미선은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극학부 학부장으로 사업하면서 우리 민족의 연극예술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내고있다.

허동활선생이 단장으로 사업한 5년 남짓한 동안 연변연극단은 길림성문화계통선진집체 등 영예를 8차나 따내였고 선생본인은 길림성연극가협회 부주석,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회 위원으로 추대되고 길림성제4차당대표대회,제5차전국문학예술사업일군대표대회 대표로 선출되였다.

               젊음에 사는 예술인

허동활선생은 리직휴양한후에도 연극예술사업에서 완전히 물러나지 않고 길림성연극가협회 명예주석,연변예술학교 연극반 초빙교원,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단 배우훈련반 초빙교원,연변연극가협회 주석단 고문 등 직무를 맡고 우리 민족의 연극예술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85년에 텔레비죤극 《낳은 정 키운 정》의 연출을 맡아하면서 영상예술과 인연을 맺은 선생은 《민들레꽃》,《그녀의 길》,《버들넋》 등 작품에서 연출가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남김없이 발휘하면서 극본을 정품화함으로써 우리 민족 텔레비죤예술의 정초자로 인정받았다.이를테면 렬사가문에 시집온 두세대 과부며느리를 노래하는 《민들레꽃》에서 원 대본에는 남주인공이 윁남전쟁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나는것으로 되여있었지만 허동활선생은 연출을 보면서 남주인공이 두눈이 실명되여 돌아오도록 고쳐놓아 상봉장면에서 할머니,어머니,안해의 감정을 승화시겼다.따라서 이 작품은 보다 훌륭한 사회적효과를 거둘수 있게 되였다.

작품창작면에서 선생은 1992년에는 황봉룡선생과 합작하여 《장백의 아리랑》을 창작하였고1997년에는 단독으로 10회방송극 《윤동주》를 창작하여 연변인민방송국으로부터 문학상을 수여받았으며 1998년에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리승남연출과 합작하여 텔레비죤극 《노을 비낀 고개길》을 창작하여 평양국제영화제 조직상과 전국텔레비죤콩클에서 준마상을 수여받았다.

선생은 또 《갈꽃》 등 텔레비죤극과 연변가무단의 대형가극 《아리랑》에서 예술고문,민속고문을 감당한외 《희곡언어의 작용과 특징》,《배우의 화술기교》,《90년대 연변연극계의 3대현상》 등 론문과 예술평론 이밖에 회억록도 여러편 발표하여 차세대 연극인들에게 귀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미더운 세대주

가정생활에서 허동활선생은 안해를 극진히 사랑하는 후더운 남편,자식들을 어엿한 예술인으로 키워낸 훌륭한 아버지였다.

허동활선생은 연변문공단시절에 같은 연극배우로 사업하면서 정이 들어 사랑을 속삭이고 1952년에 백년가약을 맺은 부인 리명희녀사와 함께 많은 예술형상을 창조하여 연극계의 잉꼬부부로 소문을 놓았다.1948년에 배우생활을 시작하여 연극 《장백의 아들》에서 고영애역을 맡은 부인은 1991년 타계하기전까지 40여년의 연극생애에서 수십부의 연극에 출연하면서 개성이 있는 무대인물형상을 창조함으로써 여러차나 우수연기상을 획득하였다. 부인은 또 1982년 자치주창립 30돐헌례작품이였던 텔레비죤예술영화 《어머니 시름놓으세요》에서 주역을 맡았고 리직휴양한후에는 로인예술단에 참가하여 연변각지를 순회하며 관람객들에게 웃음을 선물하기도 했다. 

몇십년간 희로애락을 함께 하면서 부인을 자신의 분신으로,하늘이 하사한 최고의 선물로 생각하고 오직 그녀 한녀자만을 사랑해온 선생은 리명희녀사가 하늘나라로 떠나간지 오래된 지금도 혼자 지내면서 사랑을 고이 간직해가고있다. 

아버지,어머니가 련습하는 연극대사를 자장가로,아침잠을 깨는 기상소리로 알고 자라난 세 자식은 부모님들이 자주 하향공연을 나가면서 사랑을 듬뿍 받지는 못했지만 저마다 어엿한 예술인으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무용에 흥취가 있은 큰딸 허숙은 1972년에 연변가무단의 무용배우시험에 합격,1970년대중반에 최옥주선생이 안무한 무용 《양돈장의 처녀》로 전국독무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하고 중국청년예술단의 일원으로 출국공연에 참가하면서 꿈을 이룩하였다.국가1급안무가로 성장한 그는  《장백정》을 비롯한 대형무극의 안무에 동참하고 북경올림픽에서 선을 보인 무용 《고향의 봄》을 창작하였으며 본직사업에서 성과를 올리는 한편 연변무용가협회 부주석 등 직무를 맡고 민족무용을 꽃피워가는 길에서 많은 일들을 추진시키고있다.

둘째딸 허란은 어렵게 바이올린을 배워서 연변예술학교입학시험에서 바이올린연주로 1등을 따냈으나 가정성분때문에 소원성취하지 못했다.후에 료녕성 금주군구문공단에 문예병으로 들어갔다가 연변인민방송국 방송예술단에서 악사로 있은 그는 상해음악학원에 가서 2년간 연수하고나서 절강성교향악단에 취직하였는데 지금은  부수석바이올린수로 되여 독일,프랑스,스위스 등 나라에 가서도 연주에 참가하면서 중국조선족의 자랑을 떨치고있다.

그리고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극학부를 졸업한 막내 허문호는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단에서 성우로 사업하다 지금은 음향효과사로 일하고있다.

80고개를 넘은 현재 아늑한 시골양로원에 내려가 근심걱정을 모르고 편안하게 생활하는 선생에게 있어서 가장 큰 취미는 지나온 연극인생을 뒤돌아보며 추억에 사는것이라고 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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