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반부터 왕청현 왕청진 왕청대대에서 창작과 예술지도에 종사하며 농촌문예사업에서 한몫을 톡톡히 감당하던 작곡가 전승길선생이 지난 2월 1일 66세(음력 1월 7일) 생신날에 음악생애 50돐 기념 및 첫 음악작품선(CD)발행식을 펼치였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음악계인사들은 전승길선생이 50년 음악생애에서 거둔 성과에 대해 충분히 긍정함과 동시에 농민출신의 조선족작곡가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음악에 “미쳐있던” 나날
1943년 정월 초이레날 왕청현 십리평향의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한 전승길은 1948년에 부모님을 따라 도문시에 이사해온후 1949년 7살 어린 나이에 도문시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소학생이 된지 얼마 안되던 어느날 음악시간에 학급담임선생님이 흑판에 오선보를 그리고 그우에 음계를 표시하였을 때 처음으로 음악이란 사물을 접촉하게 된 그는 콩나물대가리처럼 생긴 오선보가 그렇게 신기할수 없었다. 이때로부터 음악에 각별한 흥취를 가지게 된 그는 2학년때 벌써 자기절로 오선보를 볼줄 알게 되였고 새로운 노래들이 나오면 제법 절로 부를수 있게 되였다.
부모님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친척집에 얹혀살게 된 그는 초중에 진학한후 학교 취주악단에 들어가 트럼본을 다루는 행운을 얻었다. 이렇게 음악과 인연을 맺은 그는 1958년 길림성소수민족학생문예콩클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예술의 무대에 오르는 기쁨을 누리면서 장차 음악가로 되여보려는 꿈을 싹틔우게 되였다. 하지만 궁핍한 가정생활때문에 공부를 계속 해나갈수 없게 될줄이야?! 막부득이한 형편에서 그는 초중3학년 공부를 포기하고 고향인 왕청현 십리평향으로 돌아가고말았다.
당분간 꿈을 키워나갈수는 없게 되였지만 어떻게 하든 그 꿈을 꼭 이루어보고싶었던 그는 음악이 있는 곳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면서 음악지식을 부지런히 쌓아갔다. 농사일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음악에만 정신이 팔려 돌아다니는 아들을 두고 아버지는 “조상에 없는 풍각쟁이가 생겼다”며 못마땅해하였고 출가한 누님도 “사람구실을 못한다”고 만나기만 하면 꾸중부터 들이댔다.
그러나 그는 음악에 대한 추구만은 버릴수가 없었다.음악만 생각하고 돌아다니던 어느날 향정부에서 낡은 손풍금을 발견한 그는 보배라도 얻은듯 집에 가지고 와서 반복적으로 련습하면서 자기절로 대조, 소조의 기본화성을 익혀갔다. 이렇게 17살의 어린 나이에 향의 문예골간으로 활동하면서 천부적인 음악재능을 선보이게 된 그는 동요 《좋은 범 나쁜 범》,《도랑물소리》를 작곡하면서 창작의 첫발자국을 내디디기 시작하였다.
음악을 위해 천방지축 뛰여다니는 아들이 너무도 한심해서 부모님들은 색시감을 물색해주며 당금 결혼하라고 닥달했다. 가정이 생기면 책임감에서라도 마음을 잡을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20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세대주로 되였지만 그는 가정울타리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것을 음악을 위한 사업에 복종시키는것을 천직으로 간주하였다.
음악창작에 “빠져있던” 시절
1965년, 왕청현 왕청진 왕청대대에서 문예선전대를 크게 발전시키면서 현내에서 문예골간을 물색하던차 트럼본이며 손풍금 등 악기를 마음대로 다룰수 있고 음악창작까지 할수 있는 전승길선생에게 눈독을 들였다. 이것은 한창 음악에 “미쳐있던” 전승길선생으로 말하면 잠재한 음악재질을 남김없이 과시하고 창작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절호의 기회를 놓칠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안해와 3살난 딸을 거느리고 왕청대대로 이사해왔다.
당시 왕청대대 문예선전대는 나젊은 과외예술애호가들이 농촌문예활동에서 장끼를 자랑할수 있는 드넓은 활무대였다. 이리하여 전승길선생은 물을 만난 고기처럼 낮에는 생산대의 집체생산로동에 참가하고 밤에는 대대구락부에 가서 창작과 예술지도에 묻혀있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 그 보람으로 왕청대대문예선전대는 1966년부터 거의 20년간 성, 주, 현의 문예콩클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내며 전국에 소문을 놓게 되였다.
전례없는 대동란시기에 아버지가 터무니없는 력사문제에 걸려들면서 선생에게도 영향이 컸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계속 음악창작사업에 정진하면서 우수한 작품들을 륙속 내놓았다. 이 시기 선생이 창작한 가요가운데서 비교적 환영을 받은 작품으로는 《풍년씨앗 뿌리세》(1966년), 《양돈처녀》(1971년), 《중화의 대가정》(1973년), 《경애하는 주총리》(1976년), 《우리네 생산대장》(1979년), 《여기가 내가 사는 마을이라오》 (1980년) 등을 꼽을수 있는데 그중에서 《양돈처녀》를 주제곡으로 한 독무 《양돈처녀》는 당시 여러 예술단체의 공연종목으로 되였고 전국콩클에 참가하여 묵직한 상을 받아안기도 했다. 그리고 선생은 또 새납독주곡 《풍년의 새노래》, 바이올린합주곡 《청년돌격대》, 목금독주곡 《딱따구리원무곡》 등과 많은 무용곡을 창작함과 동시에 동방가무단을 위해 무용곡 《장백산에 깃든 이른봄》과 《탈곡장의 기쁨》을, 민족학원을 위해 《농약치는 처녀》를, 료녕성 반금지구를 위해 대형가극 《창업자》 등을 작곡하여주었다.
이밖에 농민신분으로 왕청현내의 광산, 기업, 상업, 학교, 해방군 등 단위에 가서 음악창작과 지도를 하던 선생은 그후 원로예술가인 최수봉선생의 눈에 들어 연변구연단의 설립을 위한 사업에 동참하였다. 그동안 성과 주의 많은 단위들에서 전승길선생을 욕심냈지만 한사코 놓아주지 않던 왕청현에서도 음악을 위한 사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선생에게 탄복한 나머지 뒤늦게나마 특수인재초빙지표를 주었다. 이렇게 되여 선생은 40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에 연변구연단에 적을 붙이고 로임을 타면서 음악창작에 전념할수 있는 특혜를 받게 되였다.
그러나 연길에서 “홀아비”생활을 하면서 시골에 계시는 년로한 부모님들을 돌봐드리고 왕청에 두고온 안해와 아들딸 3명까지 먹여살리자니 너무도 힘들었다. 생각다 못해 선생은 어렵게 차례진 연길생활을 포기하고 왕청현문화관으로 전근하여 문예조 조장으로 활약하면서 빛과 열을 군중문화보급사업에 다 바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후 왕청현문공단(단장), 왕청현문화국 창작조, 연변석유정제공장 공회 선전부 등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선생은 같지 않은 사업분야에서 시종 음악창작과 예술지도에 온갖 심혈을 다 몰부었다. 그리고 정년퇴직한후에도 계속하여 도문시음악협회 부주석이라는 직무에 충실하는 한편 《만풍년의 기쁨 꽃으로 피여나네》, 《정 하나 못잊어》, 《연변아가씨》, 《연변이란 그 이름》, 《산좋고 물좋은 내 고향》, 《웃으며 삽시다》, 《그리운 하늘》, 《고향생각》 등 가요를 작곡하면서 왕성한 창작력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생활, 우정, 열정
연변음악협회 주석이며 연변가무단 명예단장인 박서성씨는 전승길선생의 50년 음악창작생애를 “생활, 우정, 열정”이라는 여섯글자로 귀납한다.
전승길선생이 그동안 생활미가 철철 흐르는 작품들을 내놓을수 있게 된것은 본인의 굴곡적인 생활략력과 갈라놓을수 없다고 한다. 다년간의 농촌생활실천에서 직접 체험하고 보고들으면서 루적한 풍부한 생활경험 그 자체가 음악농사의 밑거름이 되여 독특한 민족특색을 갖춘 작품들을 무더기로 쏟아내게 되였으니 그럴법도 하다.
전승길선생에게서 제일 보귀한 개성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는것이라고 한다. 인품이 좋은 선생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가는 곳마다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여오고있는데 80세 고령의 로인네들로부터 20대의 젊은이들에 이르기까지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고있는 사람들이 푸술하다고 한다.
음악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저 찾아오는 초학자들에 대해서도 선생은 능력껏 지도해주면서 그들이 음악면에서 최대한 진보를 가져오도록 하고저 왼심을 써왔는데 그가운데는 선생의 지도를 받고 성공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를테면 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원장으로 사업하는 강광훈씨는 전승길선생과 친구로 지내고있는 형님의 소개로 선생을 알게 되였는데 1971년에 일주일에 한번씩 금창에서 소철을 타고 60킬로메터 상거한 왕청진으로 다니면서 손풍금연주를 배워서 소원대로 연변예술학교 음악전업에 입학하였다. 하기에 강광훈씨는 손풍금으로 성공을 거두고 전반 예술학원을 이끌어가는 코기러기로 된 지금도 38년전 왕청대대문예선전대의 사업때문에 팽이처럼 돌아치면서도 시간을 짜내 열심히 손풍금지도를 해준 전승길선생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있다.
음악에 대한 끈질긴 추구와 뜨거운 열정은 뭇사람들의 탄복을 자아내는 가장 돌출한 특징이라고 할수 있다. 당년에 음악창작을 한답시고 집에 비가 새도 관계하지 않고 10살 어린 나이에 물을 긷는 딸애도 못본체하면서 구락부에만 들어박혀있었다는 선생은 60고개 중반을 넘어선 지금도 젊은 시절의 열정 그대로 음악창작활동에서 앞장을 다투고있으며 도문시음악가협회 부주석으로 뛰던 그제날과 다름없이 주머니를 헤쳐 협회의 사업을 지지, 성원하고있다.
지나간 50년 세월을 뒤돌아보며 전승길선생은 가장 고마운 사람은 그동안 가정의 크고작은 일들을 혼자서 떠메고 숱한 고생을 하면서도 남편 뒤바라지에 정성을 다한 마누라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안겨주지 못한 지난날이 후회스러워 도문에서 음식업체를 경영하는 딸과 며느리를 도와주느라 나름대로 노력을 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것이라고 속심을 내비치기도 한다.
최근에 전승길선생은 지금까지 창작한 200여수의 가요가운데서 《붉은 태양》, 《기러기》, 《연길비행장》, 《인생의 길동무》, 《첫수확》 등 15수를 골라 음악작품집(CD) 제1집을 출판하였고 상반년내로 제2집을 출판할수 있는 준비도 바야흐로 마무리하고있다. 선생이 음악에 대한 열정을 영원토록 간직하고 연변음악협회 전임주석 박장수선생의 건의대로 《전승길작품음악회》도 구상해보는 한편 기둥뿌리를 뽑는다는 늘그막사랑으로 마누라에게 기쁨과 행복만을 선물할것을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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