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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리광수 끓는 피로 엮어온 반평생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6월16일 10시34분    조회:7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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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는 그 이름이 생겨날 때엔
사랑이란 그 뜻도 담고 나왔다
이 세상에 선량한 부모님들아
불쌍한 애들에게 사랑을 주자
……

언제나 들어도 익숙한 노래이고 심금을 울려주는 노래다. 이 노래와 더불어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는 화면ㅡ연변TV련속극 《사랑의 품》, 이미 연변시청자들의 안방을 찾아 눈물샘을 자극한지도 십수년이 지난 오늘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는 까닭은 무엇일가?  그것은 바로 나어린 백설이를 통해 그때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사회적문제로 대두되고있는 리혼가정자녀의 아픔을 현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도덕과 타락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있는 령혼들을 준절히 깨우쳐주기때문이다. 하다면 이 련속극을 써낸 리광수선생은 어떤 사람인가? 극작가로서의 리광수선생과 생활속의 리광수선생은 어떤 다른 면이 있는가? 아래에 리광수선생의 이왕지사 끓는 피로 엮어온 전반생과 더불어 공화국과 동갑으로 만 60세의 년세에도 맘속에 헝겊뽈 차고있는 선생의 일상을 조명해본다.
                                                                     
눈물을 뿌리며 접은 배우꿈

1949년 3월 17일,  안도현 영경향 유수촌의 한 농가에서 4형제가운데 맏이로 태여난 리광수선생은 어릴 때부터 가난한 농촌을 떠나 당시 연길에 살고있던 외가집에서 자랐다.  외손자가 너무도 귀여워 억지로 빼앗다싶이 곁에 데려다놓은 외조부모님들의 사랑에 받들려 그는 동년시절을 유족하게 보냈다. 하지만 소학교 졸업 1년을 앞두고 외가의 사정으로 안도의 부모집에 돌아가야 했던 그는 그후 아버지가 늘 객지에 나가 일을 보고 어머니가 식당일에 바빠 집을 돌볼 겨를이 없는 상황에서 올망졸망한 세 동생들에게 때시걱을 끓여주는 등 이모저모 보살펴주어야 했다. 특히 당시는 수도물이 없을 때라 13살 어린 나이에 멜대를 메고 왕복 5리남짓한 길을 걸어 산밑에 있는 샘물을 길어들이는 일이 그에게는 고역이였다.  얼음판에서 휘청거리다가 넘어져서 물을 다 쏟쳐버리고 다시 가서 길어오느라면 두손이 얼어서 벌겋게 부어나기도 했는데 여린 몸에 여간 힘드는게 아니였다.

그런 와중에 당시 그의 꿈은 연극배우로 되는것이였다. 그만큼 그때 그는 모방성이 강했다. 영화나 연극을 보고는 동학들앞에서 배우들의 흉내를 그럴듯하게 잘 내여 웃기군 하였다. 물론 어린 흥미에 정면역보다는 반면역의 흉내를 많이 내군 하였다. 매번 연극단에서 공연을 올 때면 한번도 빼놓지 않고 다 봤는데 돈이 없어서 영화는 번마다 다 볼수가 없었다. 영화는 보고싶지 돈은 없지 어떻게 할것인가? 생각던 끝에 그는 돈을 내지 않고 영화를 볼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때 그는 안도현 명월진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명월진영화관은 실내에 변소가 없어서 밖에다 바자를 높이 두르고 바자안에 변소를 지었었다. 이런 환경은 리광수같은 비법입장자들에게 돈이 없이 입장할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다. 즉 바자를 뛰여넘어 영화관에 잠입하는것이였다. 영화를 시작하는 벨소리가 울리면 변소출입을 하는 사람들이 인차 없어지군 했다. 그때 그는 날래게 바자를 뛰여넘어 영화관안의 어둠속에 몸을 숨기군 했다.
그러면 그날은 공짜로 영화를 볼수 있는것이였다. 하지만 좋은 꿈은 길지 못했다. 영화관 관리원에게 목덜미를 잡히고말았던것이다. 영화관 관리원이 변소에서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문뒤에 숨었다가 리광수랑 뛰여들어가는대로 목덜미를 잡아 내쫓는것이였다. 그래도 그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배우로 되겠다는 사람이 영화를 보지 않고 어떻게 배우로 된단 말인가?  영화관주위를 맴돌며 다른 수를 찾던 그는 가짜표를 위조하여 정정당당하게 앞문으로 영화관에 입장하는데 성공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는 밖에서 기다리다가 영화가 끝나서 관중들이 밀려나올 때면 그 사람들을 비집고 영화관으로 돌입하여 걸상밑을 살피며 관중들이 버리고 간 표를 몽땅 주어왔다. 그때의 영화표는 매일 똑같은 표였는데 그 우에 찍힌 날자의 수자가 다를따름이였다. 그래서 그는 고무지우개를 사다가 0부터 9까지의 수자도장을 만들어놓았다가 날자에 따라 도장을 찍고 당당하게 그 표를 내고 영화관 앞문으로 들어갔다. 그 덕분에 얼마나 많은 영화를 봤는지 모른다. 영화를 본 이튿날에는 꼭꼭 학교에 가 동학들앞에서 한바탕 “연기”를 하군 했다.

초중을 졸업할 때 그는 배우가 되려는 욕망을이기지 못해 연극단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연길에 계시는 외할머니를 졸라댔다. 그의 생떼질에 못이겨 외할머니는 앞집에 있는 연극단에 다니는 사람에게 그를 데려다 소개해주었다. 결과는 물론 비참했다. 눈물을 뿌리며 배우가 되려는 꿈을 깨여버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젊음을 농촌에서 불태우고

다행히 그때 그의 아픔을 달래준것은 글짓기였다. 당시 그가 학교에 다닐 때 소학교에는 습작과가 없고 초중부터 습작과가 있었다. 그는 작문시간이 좋았다. 그만큼 작문에 흥취가 있었던것이다. 그때 매번 작문시간이 끝난 다음에 선생님이 모범작문 한두편씩 전반 동학들앞에서 읽어주군 했는데 그의 작문은 거의 번마다 빠질 때가 없었다. 작문졸업시험을 칠 때 그는 소사양원을 주인공으로 《사양원의 하루》라는 작문을 썼는데 “살뜰한 사양원”이라는 점을 더욱 잘 살리기 위해 의인법을 써서 사양원과 소가 대화를 하게 했을뿐만아니라 사양원이 밭갈이나갈 소에게 찰떡을 쳐 먹이는 이야기를 허구해넣었다.  그 작문은 전교에서 파문을 일으켰고 그는 일약 “꼬마작가”가 되였다.  학교 조선어문조에서는 파격적으로 그의 작문을 120점을 주기로 결정지었다. 그때는 최고점수가 100점일 때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1968년에 그는 안도현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지식청년으로 안도현 석문공사 남류대대로 하향하였다가 다시 란니대대로 옮겼다. 농촌에 있는 근 7년간 그는 줄곧 대대의 문예선전대 대장직을 맡았다.  그가 인솔한 란니대대선전대는 왕청현 왕청대대선전대, 훈춘현 량수공사 하서대대선전대와 함께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결정하여 수립한 세개의 중점선전대가운데 하나였다. 그랬던 연고로 안도현과 자치주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경상적으로 란니대대선전대에 내려와 점을 잡고 며칠씩 있으면서 종목을 만들어주고 배워주고 공연까지 지도해주었다. 좋은 선생님들을 청하기나 찾아가기도 힘든데 직접 집까지 찾아와서 배워주니 이처럼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때 리광수는 찾아온 선생님들한테서 많은것을 배웠다. 당시 란니대대선전대에 다녀간 선생님들로는 무용에 김광수,  김학실,  홍수천,  방채옥,  김송죽, 마문호 선생님과 같은 유명한 분들이 있었고 음악에 김원창, 김하섭, 김하옥, 안홍민, 안계린, 김남호 선생님과 같은 현과 주의 이름있는 선생님들이 있었으며 연극지도에는 최수만선생님이 있었다.  리광수가 예술학교에 붙었던들 이처럼 많은 선생님들을 한자리에 모실수 있었겠는가?  그는 하늘이 준 좋은 기회를 놓칠수 없었다. 하여 음악이면 음악, 무용이면 무용, 연극이면 연극 닥치는대로 다 배웠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켜듯 체면도 없이 따라다니며 배웠다.

그때 란니대대선전대의 공연임무는 대단히 많았다. 한번 통계해본데 따르면 1년에 공연한 차수가 무려 230차나 되였다. 지금 보면 말그대로 대단한 수자다. 어느 공연단체에서 지금 이렇게 많이 공연할수 있는가? 그때 란니대대선전대는 밭머리면 밭머리,  부엌이면 부엌,  회의실이면 회의실…아무튼 일을 하다가 일하던 그 본새로도 공연을 하군 했다. 하지만 그처럼 많이 하는 공연을 그냥 하던 종목만 할수 없는게 아닌가?  그래서 1년에 몇번씩 새 종목을 바꾸려니 창작일군이 형편없이 모자랐다. 핍박에 못이겨 량산에 올랐다고 할가?  아무튼 리광수는 어벌크게 그때부터 창작을 하기 시작했다. 가사면 가사, 재담이면 재담, 연극이면 연극…선전대에 무엇이 수요되면 무엇을 썼다.  심지어 가곡과 무용곡까지도 빼놓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과외창작의 첫시작이요 그후 창작의 밑거름이 될줄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때 그가 쓴 가사 《새농촌의 새일대》는 당시 소학교 교원으로 있던 윤춘남씨가 곡을 붙이고 안계린선생님이 편곡을 하여 공연한후 《공농병문예》 제3기에 실어주었다.  그것이 그가 쓴 글이 활자로 찍혀 간행물에 나간 첫 작품이였다. 그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후 그가 쓴 작품들이 《혁명가곡》,  《공농병문예》 등 간행물에 륙속 발표되였다.

그러던 1974년에 리광수의 작가인생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일이 생겼다. 그때 그의 나이 이미 만으로 25세여서 대학에 추천받을수 있는 마지막 나이였다.  그는 백사불구하고 대학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공사혁명위원회에서는 그를 후계자학습반에 가라는것이였다.  후계자학습반이란 전문 정치간부를 양성하는 학교였는데 후에 향과 진의 책임자로 될수 있었다.  그때 그의 정치토대는 아주 좋았다. 집체호 호장, 선전대 대장, 대대 공청단지부서기, 공사공청단위원회 부서기, 길림성공청단위원회 위원…아무튼 어깨에 단 견장이 대단히 많았다. 후계자 양성으로는 뛰여난 인선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때 이미 앞날을 결정했기에 한사코 대학에 가겠다고 우겨댔다. 그리고 대학지원서를 쓸 때도 몽땅 연변대학 조문학부로 썼다. 추호의 여지도 없었다. 오직 작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 가는것이기때문이였다. 공사혁명위원회에서도 나중에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는 늦게나마 대학에 갈수 있었다. 이는 그의 인생에 분수령이였고 전환점이였다.

극작가로 자리를 굳히기까지

대학에서 리광수의 학습목표는 습작에 관한 지식을 많이 장악하는것이였다. 그래서 습작에 관한 교수는 열심히 들었으나 습작과 상관없는 과목은 아예 들으러 가지도 않았다.  그 시간이면 숙소에서 보고싶은 책들을 보군 했다.  그래서 “편과현상이 대단히 엄중한 학생”이라는 딱지까지 붙어다녔다. 그때는 시험이라는것이 없었기에 남이야 뭐라든 그는 귀를 틀어막고 자기가 할 공부만 했다. 로농병대학을 나온 대부분 학생들이 학교에선 전혀 배운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그 기간에 많은것을 배웠다.

대학을 졸업할 때 학교에서는 그가 교원으로 남아줄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그 분배에 복종할수 없었다.  그의 목표는 교수가 아니라 작가였기때문이다.  결과 그는 연길에 남지 못하고 치벽한 송강골안 안도현문화관으로 배치받아갔다.

당시 문화관사업은 농촌하향보도가 위주였다. 1년치고 반년이상은 이불짐을 싸지고 농촌에 내려가 남의 집 웃방에서 자고 돌개밥을 먹으면서 문예선전대를 일궈세워줘야 했다.  3년동안 리광수는 석문공사 북산대대, 량병공사 량병대대, 석문공사 대성대대 등 세개 대대에 내려가 점을 잡고 선전대를 꾸려주었다.  선전대를 위하여 작품을 써주어야 했기때문에 모든 창작은 무대를 떠날수 없었다.  또 공연효과를 위해서는 구연작품이 빠질수 없었다.  당시 관중들은 구연작품을 대단히 즐겨보았다. 그래서 만담,  재담,  삼로인 등 구연작품을 많이 썼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것이 만담 《개》였다. 만담 《개》라고 하면 리광수보다 강동춘배우를 먼저 떠올리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개》는 명실공히 강동춘배우의 출세작으로 되였기때문이다.  그때 강동춘배우는 집체호에 있었댔는데 그날 공연만 끝나면 안도현운수공사에 출근하기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개》를 표연한후 일약 구연명배우로 되여 연길시구연단의 구연배우로 뽑혀간것이다. 그때 리광수도 《개》를 가지고 길림성문예회연대회에 참가하여 창작 1등상을 수여받았다. 이처럼 뛰여난 사업실적으로 지명도가 상승한 그는 1980년에 연변군중예술관 《해란강》잡지의 편집원으로 전근되였고 그후 여가시간이 많아지자 단편소설 《푸른 신호등》,  《생명의 가치》 등을 썼는데 그중 《생명의 가치》는 제1차 연변문예 문학상을 받았다. 만약 그때 그가 계속 군중예술관에 남아있었더라면 지금 그는 극작가가 아니라 소설가가 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군중예술관에 얼마 있지 못하고 1982년에 연변문예창작평론실로 자리를 옮겨 전직창작원으로 되였다. 또 하나의 전환점이 생긴것이다.

연변문예창작평론실은 연변문화국산하의 사업단위로서 전문 전직공연단체를 위해 작품을 창작하는 전직창작단체였다. 1983년에 리광수는 첫 장막극처녀작 《좌현장시찰기》가 실패한후 1984년에 인차 두번째 장막극 《도시+농민=?》를 창작하였는데 공연을 시작하자 전례없던 호황기를 맞이했다. 극장앞은 매일매일 초만원이였고 앉은자리에서 10차, 20차를 공연해도 도저히 관중들의 수요를 만족시킬수 없었다.  부득불 연극단에서는 또 한개 팀을 조직해 련습한후 두개 팀이 동시에 공연을 해서야 겨우 관중들의 요구에 만족줄수 있었는데 공연차수가 200차를 훨씬 넘겼다. 그해 《도시+농민=?》는 제1차 연변예술절에서 1등상을 수여받았고 길림성1등상을 수여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전국소수민족제재 제1차 극본평의에서 은질상을 수여받았다.  승승장구로 1985년부터 그는 해마다 한두편씩 장막극을 펴냈는데 관중효과가 매우 좋았다.

그러다가 1994년에 창작한 장막극 《사랑의 품》은 극작가로서 그의 위치를 반석처럼 확고하게 해주었다. 그때 줄곧 희극만 해왔는데 관중들은 맹목적인 웃음에 권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볼 때는 웃지만 보고나서는 재미없이 봤다고 실망해했다.  그래서 그는 정극을 시도해보았고 그래서 쓴 작품이 《사랑의 품》이였다. 사실 《사랑의 품》은 신문에서 보도를 보고 힌트를 받아 쓴것이였다.  신문보도에 나온 이야기를 보면 할빈에서 있은 일인데 한 조선족어머니가 자기 아들과 한학급에서 공부하고있는 한족학생이 고아로 된것을 자기집에 데려다가 아들과 같이 공부시키는것이였다.  그런데 그 한족학생이 몹쓸 병에 걸려 생명이 위급하게 되였다. 어머니는 한족학생을 위하여 원래의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와서 막일을 하여 돈을 벌어 한족학생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어머니의 사랑에 의해 한족학생의 병은 완쾌되고 그 한족학생은 어머니덕분에 대학에 가게 되였다.  이 간단한 이야기를 소재로 써낸 《사랑의 품》이 당시 연변의 많은 관중들을 울렸음은 더 말치 않아도 누구나 다 알것이다. 《사랑의 품》은 1995년3월에 있은 문화부 제5차 문화상평의 문화신극목상에 입선되였으며 그해 12월 제4회 전국소수민족제재 희극극본 공작새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또 그후에 창작한 연변TV련속극 《사랑의 샘》  역시 1998년 10월에 있은 제7차 전국소수민족제재 TV예술 “준마상” TV련속극 1등의 영예를 따냈다.  뿐만아니라 지금까지 창작생애에서 100여편의 구연작품, 60편가량의 장막극과 TV극,  20여편의 중단편소설을 창작했고 그중 자신도 모를 정도로 수십편의 작품이 수상하는 영예을 안은 그는 또 1997년 4월 길림성선전문화계통 10대문예사업일군칭호, 1997년 12월 성정부에서 발급한 제4차 돌출공헌중청년전업기술인재, 1999년 9월 길림성로동모범으로 당선되는 등 수많은 영예를 받아안았다.

생활속의 리광수선생

창작실천을 두고 리광수선생의 관점은 “작가란 죽는것을 제외한 모든 생활을 다 체험해보라”는것이다. “지랄외치는 다 해보라”는 말이 있는데 리광수선생은 일정한 지랄도 해보라고 말한다.  하여 그는 가끔 술을 과음하고 집에 돌아와 “지랄”을 피울 때가 있다. 이튿날에는 안해와 애들에게 몰리움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 “지랄”을 음미하며 흐뭇해 웃군 했다. 술이 아니면 어떻게 “지랄체험”을 할수 있겠는가?  그는 지금 남자가 하는 일은 거의 다 하고있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마작도 놀고 낚시질도 다니고 노래방도 가보고 안마도 받아보고…아무튼 생활배치가 매우 복잡하다. 그래도 그는 자기의 생활범위가 너무 협소하다고 느낀다. 생활은 우주처럼 광대무변한데 자기의 생활범위가 늘 우물속처럼 비좁게만 느껴지는것이다.

근 30년간 그는 잠자기전에 반드시 밤술을 마시는 습관을 고집해왔다. 잠자기전에 술을 마시면 두가지 좋은점이 있는데 하나는 술이 필 때 누우면 인차 깊은잠에 빠져 좋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창작에서의 령감잡기에 좋다. 솔직하게 그는 근 30년간 밤술의 덕을 많이 봤다. 그의 많은 작품의 구상은 거의 밤술에서 나온것이다. 석냥쯤 마시고나면 머리가 약간씩 흥분되기 시작한다. 그럴 때 둬냥쯤 천천히 더 마시면서 령감을 잡는 작업을 하는데 하나를 잡으면 하나씩 종이에 써놓는다. 그리고 이튿날 종이에 적은것을 정리하는데 대부분이 어처구니없는것들이다. 그러나 북데기속의 알이라고 할가? 그중에 혹시 한두개씩 쓸만한것이 나오는데 그런 한두개는 정말 일반적인 사유로는 상상할수 없는 기발한 착상이다. 이런것은 맑은 정신으로는 구상할수 없는 귀중한 창작불씨가 되는것이다.

그가 밤술을 마신다고 안해가 두덜거릴 때는 령감을 근거로 반박한다. “낸들 쓰거운 술을 먹기 좋아서 먹는가? 령감이라도 잡아볼가 해서 먹는게지.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가지고 그저…” 그래서 근 30년간 밤술을 마시다가 작년부터 혈압이 높아지는 바람에 혈서를 쓰고 그 아까운 밤술을 끊었다.

리광수선생의 안해 최기숙녀사는 올해 60세로 리광수선생보다 1년 년하다. 두 사람은 어린시절 한학년차이로 한학교에서 공부했고 학업을 마친 뒤에는 함께 안도현 석문공사 란니대대로 하향, 선전대에서 각각 대장, 부대장직을 맡고 활약하다보니 만나는 일이 잦고 늘 얼굴을 맞대고있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터 련애하자는 말 한마디도 없이 련애관계로 발전했다. 그렇게 한전호속에서 함께 사업하며 4년간의 련애끝에 1977년 국경절에 결혼식을 올린 그들에게 선후로 아들 둘이 태여났는데 맏이 리만천은 올해 32살로 결혼한후 항주에서 식당을 경영하고있으며 둘째 리호천은 22살로 길림사범대학 3학년에서 공부중인데 앞으로 일본류학을 목표로 하고있다.

여느집 부부들처럼 리광수선생부부 역시 생활하는가운데서 가끔 다툴 때도 있지만 그 다툼이 길어서 5분을 초과해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리광수선생은 가정에서 민주적이였다. 남자로서 집에서 김치도 담글뿐만아니라 료리솜씨도 뛰여났는데 그는 스스로 자신의 료리솜씨가 중급이상은 될것이라고 자랑한다. 또 자식들에게도 종래로 이걸 해라 저걸 해라 강요한적이 없이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자유롭게 키워왔다. 그런 남편에 대해 안해 최기숙녀사 역시 남편의 사업을 적극 지지해나서고있다.  연변TV련속극 《사랑의 품》을 촬영할 때 리광수선생의 집을 사용한적이 있었는데 그때 최기숙녀사가 수십명 촬영팀의 밥이랑 료리랑 해서 공급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다. 또한 장막극 《사랑의 품》을 공연할 때는 련속 10차나 가서 관람하다보니 해당사업일군들이 “또 왔는가”고 입을 딱 벌릴 정도였다. 지난날 농촌보도를 다니는 와중에 집에 손님처럼 가끔씩 다녀가는 남편의 사업을 받들며 시부모를 모시고 어린 자식들을 돌보느라 시집살이에 고생해온 최기숙녀사, 지금도 술을 많이 마시는 남편이 문밖을 나설 때마다 몸건강을 위해 술을 적게 마시라고 꼭꼭 당부하는 안해가 늘 고맙다고 털어놓는 리광수선생은 얼굴에 안해에 대해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현재 연변중국조선족생태문화발전회 부회장직을 맡고 우리 민족의 민속, 의식주행을 정리해 후대들에게 남겨주고저 퇴직후의 삶을 불태우고있는 리광수선생은 백발의 맘속에 헝겊뽈 차듯이 창작의욕 또한 아직도 왕성하다. 이미 지난해 4월에 일본군이 룡정을 침략해서 투항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55만자 TV련속극 《아리랑》을 출판한데 이어 현재 또 부성애를 주제로 한 TV련속극 《사랑》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0돐에 내놓고저 창작에 매진하고있다.

사실 현재 리광수선생이 창작하고있는 TV련속극 《사랑》은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사랑이 생명보다 더 귀중함을 강조하며 부성애를 그리는 작품이다. 그의 아버지는 생전에 고모집에 갔다가 석탄가스에 중독되였는데 병원구급을 거쳐 생명은 부지했으나 아무말이나 마구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식물인이 되여버렸다. 퇴원후 아버지를 집에 모셔오니 식욕만은 왕성해서 식사를 많이 하는데 비추어 대소변을 아무데나 많이 보다보니 하루에도 이불이며 옷을 적시는 차수가 얼마인지 몰랐다.  그렇게 반년가량 지나서 차츰 정신이 좀 들자 이번에는 자꾸 내의바람에 밖으로 달아나는 바람에 찾아다니느라 애를 뗀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나중에 출입문을 걸어잠그면 창문을 깨고 나가기도 했는데 다행히 번마다 아는 사람들을 만나 데려다주었기에 별다른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후 기적같이 완쾌되여 이제 시름놓았다싶었는데 난데없던 중풍이 올줄이야. 여러 병원에 다니며 많은 의사들을 보였지만 여느 중풍환자들이 다 그러하듯이 반신을 잘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고말았다. 불편한 몸으로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아버지는 “내 몸이 앞으로 나아질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 대답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은후 절망에 빠져버렸다. 살아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자식들의 가난한 살림을 거덜낼바엔 차라리 죽어버리는게 나을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것이 자살이였다.

이 과정을 회고하며 리광수선생은 “아버지 생전에는 귀찮은 생각이 없은것도 아니였지만 정작 사망된후에는 자식을 위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였다”면서 “그때 사랑이 생명보다 귀중함을 알게 되였다”고 고백했다. 또 “그런 아버지를 모델로 《사랑》이라는 TV극을 창작하게 되였지만 현재 경제가 따라가지 못하는 리유로 TV극 제작이 애로를 겪고있는만큼 시청자들과 대면하게 될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나 공화국 창건 60돐을 기념해 작품을 내놓고싶어 창작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제 리광수선생의 작품 《사랑》이 공화국 창건 60돐기념으로 TV극으로 제작돼 《사랑의 품》이나 《사랑의 샘》처럼 다시 한번 연변시청자들의 사랑의 마음을 적셔주기를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전일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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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과 함께 하는 인생지휘 겸 작곡가 리하수선생에 대한 이야기《엄마 곱니 아빠 곱니/누가 누가 더 곱니/엄마 곱니 아빠 곱니/누가 누가 더 곱니/엄마 없던 날 하루종일 비빔밥만 먹었구요/아빠 없던 날 밤새도록 도깨비꿈만 꾸었대요…》독자들은 1990년대중반부터 소년아동들은 물론 성인들가운데서도 광범위하게...
  • 2009-04-20
  • “북경아가씨”의  작곡가 정원수씨일전 기자는 심양에서 조선족가수 김월녀를 한국가수계에 성공적으로 데뷔시킨 한국작곡가 정원수씨(1960)를 만났다. 한 무명 조선족가수의 음반취입을 위해 심양을 방문한 그는 “생각외로 조선족가수들의 음악기초와 자질이 좋았다. 더 많은 조선족가수들을 한국에...
  • 2009-04-18
  •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는 中조선족 하얼빈시 조선민족사업촉진회 서명훈 명예회장(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의 조선민족사업촉진회 서명훈(78) 명예회장은 조선족 사회에서 '안중근 연구 전문가'로 불린다. 서 회장은 1989년 고국을 방문해 당시 독립기념관 안춘생 관장(안중근...
  • 2009-04-18
  • 《사업과 가정 두마리 토끼 다 잡아야죠》사람들에게 친근함을 안겨주는 아나운서 김춘희가 6월 2일 3.4킬로그람되는 딸을 보아 행복한 엄마로 되였다. 제왕절개수술로 출산후 고통이 몰려올 때마다 아기를 들여다보면 그 아픔이 가신듯 사라진다는 김춘희는 엄마로 된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어오른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 2009-04-17
  • 창작과 리론연구에서의 성과그리고 지도력—연변대학예술학원 부원장 리승룡씨 현대식고층건물들이 숲을 이룬 도심속에서 고색이 창연한 연변대학예술학원 미술청사는 옛모습 그대로 오늘도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있다. 우리 민족의 미술력사를 차곡차곡 쌓아오며 미술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빛을 발하는 미술학부청사...
  • 2009-04-16
  • 분장예술을 꽃피워가는 사람분장예술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생소하게 생각할것이고어떤 사람은 알쏭달쏭하게 여길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미용원에서 하는 화장이나 무대화장을 떠올릴수도 있겠지만 분장은 미용원에서 하는 일반 화장보다 한차원이 더 높은 예술이다. 분장예술은 배우들을 극중인물의 성격과 모습에 맞게...
  • 2009-04-16
  • 약물부당사용 위해성 크다—연변대학부속병원 약학전문가 김영순건강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면서 어떻게 안전하고도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약을 사용할것인가는 전 사회적으로 관심하는 열점문제이다. 세계위생조직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사망된 환자중 약 1/3이 약물부당사용으로 숨졌다. 우리 나라에도 약물...
  • 2009-04-16
  • 연기생활은 내 생명의 전부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2008년 음력설야회에서 청춘파인기배우 채용과 더불어 소품 《장모님의 소원》에 출연하여 시청자들의 각광을 받고 《채용의 가시어머니》로 소문놓은 김해란 ?지금까지의 30여년 연기생애에 100여부의 장막연극,단막극, 소품에 출연하면서 성격이 판이한 여러가지 인물형상...
  • 2009-04-15
  • ~노래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를 깔며~ 지금 들려오는 이 노래는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노래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입니다. 20세기 70년대 말에 창작된 이 노래는 약 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고 있고 전국 10대 금곡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이 노래의 작사...
  • 2009-04-14
  •    《얼굴》 없는 성우의 외길인생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예술단 연출 주춘복에 대한 이야기주춘복은 라지오방송이나 텔레비죤역제프로에 출연하면서 목소리로 청취자들과 가까와진 우수한 성우중의 한사람이다.꼬박 30년간 성우의 외길인생을 걸어온 그는 자칫하면 세월의 안방에 묻혀 영영 《얼굴없는 사람》...
  • 2009-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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