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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가무단 남중음가수 김홍도의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월12일 08시25분    조회: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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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길이 멀고 험난해도

세상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는 누구나 각각이다. 혹자는 돈방석을 깔고앉아 안락하게 살아가길 원하고 혹자는 자신이 하고싶은 일에 환장(?)해서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꾸준히 앞만 보고 내달린다. 이 글에 소개하고자 하는 연변가무단의 김홍도가수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소망했던 예술지향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것을 바쳐가며 고생을 사서 하는 “미친” 사나이, 하지만 그 사나이 가는 길에는 흩날리는 흙먼지속에서도 씩씩한 모습이 뚜렷한 영상으로 떠오른다.

1964년 10월 14일, 길림성 훈춘현 경신공사 사도포대대 가난한 농민가정의 4남매중 맏이로 태여난 김홍도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흥취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소학교에는 선전대같은것이 없었던 까닭에 그는 늘 하학후면 대대선전대에 달려가 어른들의 바이올린을 가만히 켜보는가 하면 피리를 훔쳐서 가만가만 불어보기도 했다.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가만가만 갖고노는 바이올린이나 피리를 통해서 스스로 도레미를 익혔고 얼마후에는 웬간한 노래도 연주할줄 알게 되였다. 거기에다 목소리 또한 남달리 좋아서 학교 음악교원으로부터 늘 “앞으로 가수가 될수 있을거”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에게는 장차 예술인이 되려는 꿈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 꿈에 부풀어 그의 마음은 하늘의 구름송이처럼 둥둥 떠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작간이랄가, 애어린 꿈이 무르익기도전에 김홍도네 집안에 재난이 들이닥쳤다. 바로 김홍도가 13살나던 해에 한가정의 기둥인 그의 아버지가 사망된것이였다. 하다보니 그의 어머니가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자식 4남매를 키워야 하는 무거운 짐을 가냘픈 어깨에 짊어지게 되였다. 당시는 집안에 일군이 많아야 공수도 많이 벌고 량식도 많이 탈수 있었지만 김홍도네 가정은 일군이라곤 어머니 혼자뿐이여서 아무리 애면글면 벌어봤자 결국 한가정 여섯식솔이 먹을 량식을 도저히 해결할수 없어 늘 생산대의 빚을 지고 살았다. 손발이 갈라터지며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일찍 셈이 든 김홍도는 방학이나 휴식일, 공부여가에도 어머니를 도와 집안의 이런저런 일들을 찾아하군 했다. 특히 경신에는 석탄이 없었던 까닭에 김홍도는 겨울이면 집안의 땔나무를 도맡아 했다. 하지만 그때 나이가 너무 어려서였을가, 산에 가서 추위에 벌겋게 언 손을 호호 불며 나무를 한아름씩 되게 40단씩이나 해놓고 그것을 수레에 싣는데 짐을 짤줄 몰라 엉기성기 싣다보니 돌밭길을 지날 때면 나무단들이 이리저리 빠지는 바람에 다시 싣고 집에 도착할 때면 깜깜한 한밤중이 되여서 저도 몰래 서러움이 솟구치기도 했다. 또 울바자앞 어둠속에 나서서 어린 아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가 “네가 고생이구나”하며 눈물을 흘릴 때면 어린 홍도의 마음속에도 쓰라린 이슬이 고이군 했다.

그렇게 렬악한 환경에서도 훈춘시제5중학교를 거쳐 훈춘시제2고중을 무난하게 졸업한 김홍도는 더이상 가정형편때문에 공부를 할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사회에 나와 농사일을 하려니 봄파종부터 시작해서 가을걷이까지 하루도 휴식일이 없는데다 좀 한가할것 같은 겨울철에도 생산대의 두엄을 끄고 실어나르는 등 편한 날이 없었다. 한창 꿈에 부풀어있을 나이에 그렇게 평생 농부로 살아갈것을 생각하니 자연 앞길이 캄캄할수밖에 없었다. 하여 애닲은 마음을 달랠겸 또 어려서부터 키우던 예술지향의 꿈을 언젠가는 이루고야 말려는 생각에서 부지런히 노래련습을 했다. 특히 저녁에 조용할 때면 그가 부르는 노래소리가 온 동네에 울리군 했는데 이튿날이면 어른들이 그를 보고 목소리가 그렇게 좋으니 한번 문공단시험을 보라고 권고하군 했다. 그러던 1980년 여름에 훈춘현문공단에서 김홍도네 마을로 공연하러 오게 되였다. 그때도 옆집 어른이 한번 꼭 문공단시험을 보라고 권고하는지라 김홍도는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듯이 농민의 초라한 모습 그대로 무작정 문공단 공연조를 찾아가 “시험보러 왔으니 내 노래를 한번만 들어봐달라”고 청탁했다. 그날 그가 부른 노래는 《장백의 미인송》이였다. 결국 그의 노래를 듣고나서 문공단 사람들은 “배운것은 없지만 목소리는 좋다”는 평가만 남기고 돌아갔다. 당시 김홍도의 립장에서는 다소 실망이 가는 일이였지만 “목소리가 좋다”는 평가에는 신심이 생겨 예술인이 되려는 꿈을 더욱 굳히게 되였다.

바로 훈춘현문공단에서 김홍도네 마을에 와 공연하고 돌아가서 얼마 지나지 않은 1980년 7월에 연변예술학교에서 성악교원들이 한달간의 성악단기훈련반을 꾸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경신공사 문화소 소장의 추천을 받은 김홍도는 집안의 어려운 경제형편을 모르는바가 아니였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다시는 기회가 없을것 같아 체면을 무릅쓰고 어머니를 졸랐다. 학비와 려비로 50원만 구해달라고. 하지만 집에 소금 살 돈도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인들 무슨 용빼는 수가 있겠는가? “돈이 없다”고 말해놓고 실망에 잠긴 아들을 안스럽게 바라보던 어머니는 한마을에 살고있는 친척어른을 찾아가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했다. 결국 친척어른에게서 “한번 보내보라. 노력하는 애들에게는 후회없게 하라”는 조언을 듣고나서 어머니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집에서 얼마를 꾸고 저집에서 얼마를 꾸며 겨우 50원을 마련해다 홍도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 눈물겨운 돈을 받아쥐고 쌀주머니를 메고 함께 추천받은 친구와 동행으로 연길에 도착한 김홍도에게는 또 하나의 어려움이 앞을 막았다. 공부할 동안 몸붙이고있을 집이 없었던것이다. 우선 동행한 친구와 함께 건공소학교부근에 있는 그 친구의 친척집을 찾아갔는데 20여평방밖에 안되는 작은 온돌집에 여섯식솔이 옹기종기 살고있는 상황이라 홍도까지 몸을 들이밀 처지는 못되였다. 홍도의 안타까운 사정을 헤아린 그 집주인 한씨가 홍도를 데리고 나서서 홍도가 갖고간 쌀을 들여놓고 한달간 홍도가 있을수 있는 집을 구해보았지만 모두가 신통치 않았다. 결국 한씨는 “집이 비좁더라도 한달간 참고 우리 집에 있으면서 공부하라”고 권고해서 홍도는 그 고마운 한씨네 집에 주숙하며 한달간의 성악공부를 무난하게 마칠수 있게 되였다.

그뒤 공부가 끝나 집에 돌가갔는데 어느날 훈춘현문화국에서 “예술학교에 공부하러 갔다온 학생들이 모두 문화국에 와서 회보하라”는 통지가 왔다. 그때 훈춘현에서 예술학교 성악단기훈련반공부를 한 학생은 남자 2명, 녀자 3명 도합 5명이였다. 바로 문화국회보차로 가서 노래를 부르고 돌아온 일주일후 김홍도가 한창 산에서 소방목을 하면서 피리를 불고있는데 멀리 마을쪽으로부터 녀동생이 정신없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개굴창에 빠지며 헐레벌떡 달려온 녀동생은 “문화소 소장이 와서 전하는 말이 오빠가 가수로 합격됐으니 래일 당장 이불짐을 가지고 현문공단에 오라더라”고 소리치는것이였다. 오오, 환희로 들끓는 이 감격. 그때 그순간 김홍도의 눈에는 하늘도 산도 시내물도 모두 정답기만 하였다.

꿈에도 그리던 예술무대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사실 그는 처음부터 공연무대에 나서지 못했다. 예술단지도부에서 처음에는 그더러 공연조를 따라다니며 남들이 하는 공연을 보면서 배우라고만 했다. 그러던 1981년도에 주문화국의 주최로 전 주 문예콩클이 있게 되였는데 김홍도가 훈춘대표로 나서서 《장백의 물안개》를 부르게 되였다. 당시 난생 처음 무대에 나선 김홍도는 어찌나 긴장했던지 노래를 다 부르고 퇴장할 때 왼손과 왼발, 오른손과 오른발이 같이 움직이는 웃음거리를 만들고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배를 끌어안고 웃어대는데도 자신의 실수를 미처 의식하지 못한 김홍도는 혹여 자신의 바지 앞섶이 열려서 그러는가고 내려다보았으나 바지입은데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그러는 그를 보고 함께 갔던 훈춘현문화관의 성악지도 리정숙선생이 상황을 알려주어 그도 게면쩍은 웃음을 웃고말았다. 사실 리정숙선생이야말로 김홍도를 한보한보 가르치며 맨처음 독창무대에 내세운 은사였다. 그날 전 주 문예콩클에서도 리정숙선생의 지도를 받고 출전한 김홍도는 퇴장때의 실수를 뒤로 하고 단연 독창 1등을 따내였다.

그후부터 김홍도는 훈춘현문공단의 떳떳한 독창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되였다. 바로 그가 예술무대에서 자신을 나타낼쯤인 1985년도에 연변예술학교에서 그와 당시 룡정에 있던 리철혁 그리고 김지협 3명을 점찍어 공부하러 오라는 통지를 보내왔다. 워낙 별로 배운것이 없어 자신의 기량에 한계를 느끼던 김홍도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수 없었다. 김홍도는 예술학교에서 정규적으로 성악공부를 할 때 자신을 직접 가르친 정영숙선생(이미 퇴직)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있다. 가난한 그의 집형편을 헤아린 징영숙선생은 가끔 닭알이랑 삶아서 가만히 그에게 갖다주는가 하면 좋은 음식이 있으면 그만 가만히 데려다가 먹이군 했던것이다.

바로 그런 따뜻한 선생님의 가르침속에서 성공적으로 예술학교 공부를 마친 김홍도는 1989년도에 마침내 연변가무단에 성악배우로 입사했다. 연변가무단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중국 각 지방공연, TV방송에 독창, 중창, 합창으로 수백회의 출연을 기록한 김홍도는 그동안 많은 영예도 획득했다. 1998년 10월에 열린 《할빈의 여름》 음악회기간에 진행된 제24회전국성악콩클에서 《장백산 어머니사랑》을 불러 우수상을 수상한 김홍도는 그후 1999년에 조선 평양에서 열린 제17차 “평양 4월의 봄 예술축전”에서 독창 1등상을 수상하여 상금으로 받은 500딸라를 평양음악무용대학에 기부하고 페막공연에서 《내조국 내마음》을 불러 높은 평가를 받는 등 주렁진 성과를 올렸다.

당시 평양에서 유명한 음악가들로부터 “좀만 더 배우면 훌륭한 성악가가 될수 있다”는 말에 힘을 얻은 김홍도는 워낙 배움에 목말랐던터라 더 배우고싶은 욕심에서 2002년도에 40세가 다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연줄을 달아 마침내 한국 한양대학에 가서 성악과공부를 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오래만에 다시 배움의 전당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한국에서 문화가 다르고 독일어나 이딸리아어를 모르는 등 각종 원인으로 인해 몹시 힘들었지만 모든 곤난을 극복하며 성공적으로 4년간의 학사과정을 마쳤다. 그러고도 지식이 부족함을 느낀 그는 다시 석사공부를 시작, 2008년 2월에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슈만의 네개 노래 OP.142에 관한 석사학위론문》을 발표했다.

한국에서의 류학생활에 대해 김홍도는 “시간당 10만원(한화)씩 하는 교수비도 안받고 열심히 가르쳐주신 박치원교수님, 임숙영교수님 그리고 생활의 구석구석을 보살펴주신 박수길교수님과 홍용표 등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 전하고싶다”고 밝혔다.
김홍도가 예술에 환장(?)해서 지금까지 오직 예술이라는 외곬으로만 향해 달려오는 동안 그의 가장 큰 뒤심은 바로 100년지기 그의 안해 라춘분이였다. 지인의 소개로 당시 음료공장 화험원으로 사업하고있던 라춘분을 만나 1989년 양력설에 결혼식을 올린 김홍도는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다놓고 안스러운대로 세집에서 신혼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렇게 2년이 지난후 생활이 좀 괜찮은 처가집에서 온돌집이라도 한채 사주어 지긋지긋한 세집생활은 청산하게 되였지만 뜻밖에도 홀로 많은 고생을 해온 김홍도의 어머니가 53세의 젊은 나이에 불치병에 걸릴줄이야. 결국 처가집에서 사준 집까지 팔아 몽땅 밀어넣었지만 안해 라춘분은 군소리 한마디 없이 시어머니를 살뜰히 간호하면서 1년후인 1992년도에 시어머니가 모든 치료를 다 받아보고 유감없이 세상을 하직하게 하였다.

비록 예술은 모르지만 남편의 사업을 적극 지지하고있는 라춘분은 남편이 예술이라는 외곬으로만 내달리는 바람에 궁핍한 생활을 혼자서 지탱해가다가 결국 남편의 사업도 도울겸 가난도 벗어메칠겸 마침내 1999년도에 한국행을 하게 되였다. 그렇게 오늘까지 10년철이 되여오지만 라춘분이 한국에서 아글타글 번 돈이 남아있질 못했다. 김홍도가 한국에 가서 공부하는 기간 1년학잡비가 한화로 1000만원씩 들었는데 라춘분은 짜증 한마디 없이 힘들게 식당일이랑 하여 모은 돈을 선뜻이 내놓군 했다. 또한 남자들의 지갑에 돈이 없으면 안된다며 늘 남편의 지갑에 용돈도 푼푼히 넣어주군 했다. 그러는 안해를 두고 김홍도는 “지금까지 내 공부에만 아빠트 두채는 말아먹었다”며 “날이 갈수록 안해한테 고마움이 점점 깊어간다. 지금까지 내게 바친 정성, 정말 이 고마움을 말로 형용할수 없다”고 고백했다.

김홍도와 라춘분의 사랑의 결정체인 딸 김은희는 현재 18살로 연길시7중에서 공부하고있다. 김홍도는 “딸애가 예술인이 됐음 좋겠다는 욕심이 있는데 웬지 딸애가 예술에 흥취가 없어 아쉽다”며 “지금까지 이 애비가 남의 도움만 받으며 살아온만큼 딸애가 앞으로 남에게 손내밀 정도로 힘들게 살지 않고 될수록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사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예술미치광이” 김홍도, 그는 지금 또 하나의 도전을 위해 나섰다. 바로 11월 21일부터 중국음악가협회의 주최로 펼쳐지는 “제7회금종상성악콩클”에 유일한 길림성대표로 참가하게 된것이다. 이번 콩클에서 그가 부를 노래는 중국가요 《조국은 영원히 내마음속에》를 비롯해 창작곡 《미인송》  그리고 외국가요 2수와 이태리아리야 3수로 도합 7수나 된다. 그중 이태리아리야는 엄청난 기교가 있어야 하는 노래로서 김홍도가 반드시 성공적으로 불러 좋은 성적을 따낼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이번 콩클 참가차로 연길을 떠나기전에 김홍도는 “우선 이번 콩클에 참가하면서 피아노반주도 찾고 지도를 받자면 엄청난 경비가 수요되는데 미안한대로 또 안해한테 손을 내밀게 됐다”며 “10년간의 한국생활에서 고생만 하고있는 안해에게 더없이 미안하다. 반드시 좋은 성적을 따내 안해에게 보답하겠다”고 미안한 심경을 밝혔다. 또 “지금까지 내가 예술사업에 매진할수 있도록 떠밀어준 연변가무단의 박서성, 박춘선, 맹철학 등 전임, 현임 단장들에게 더없이 고맙다. 반드시 령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좋은 성적을 안고 돌아오겠다”고 표시했다.

이제 우리 모두 열심히 응원하며 김홍도가수의 좋은 성적을 기대해보자.


전일봉기자

연변라지오TV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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