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에 뿌리 내린 홍순범문인
이 나라 대도시 상해에는 자기 삶에 충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30대 후반의 조선족 홍순범문인이 있지만 상해에서 홍순범문인을 한번 취재한다는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여러번 약속끝에 기자는 2009년 11월 27일과 28일 비로소 홍순범문인을 만날수가 있었다.
기자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홍순범문인은 순진함과 성실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열에 넘치는 젊은이였다. 취재가운데서 기자는 홍순범문인은 1970년도 생이고, 흑룡강 가목사 출신, 고향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대학공부는 연변대 조문학부 통신공부로 접어들었다는것을 알았다. 때는 개혁개방의 물결이 세차게 일면서 젊은이들 너도나도 연해지구로 달리던 시기라 홍순범도 1997년 5월에 종내는 청도행에 올랐고, 여러 한국회사들을 두루 거치다가 청도의 한 데이콤회사에 들어서게 되였다.
홍순범문인이 데이콤회사에서 성실하게 뛰였더니 한국사장은 3년후 그를 상해지사에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 시기가 2000년 5월, 상해에 처음 들어설 때 홍순범문인한테는 인민페라야 1000원밖에 없었는데 홀로 부지런히 뛰며 최선을 다했더니 영업액이 쭈욱쭉 올라가며 2004년에는 한해 영업액이 300만을 돌파한다. 믿음이 믿음을 낳으니 청도의 한국사장은 상해의 홍씨한테 운전기사에 아줌마, 사무실까지 마련해 주고 맡기여 버린다. 후에는 인터넷폰이 시장을 휩쓸면서 상해지사가 문을 닫아야 했다.
홍순범문인은 이에 맥을 버리지 않고 자기로 회사를 운영하며 로밍액스에 나섰다. 영업도 잘되고 상해에서 결혼도 하니 지금 홍씨는 8살에 나는 아들애와 8개월 딸애까지 네식구가 아기자기하게 살아간다. 상해 10년 생활에 자기집에 자가용까지 마련하니 사는데는 그닥 어려움이 없다고한다.
생활의 안정기에 들어서니 홍씨는 기업인으로부터 문인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런 그가 시와 수필을 쓰며 문인으로 활동하던 때가 1990년부터인데 연해지구 진출이후 거의 글을 쓰지 못하다가 2008년부터 다시 활발한 창작기에 들어서니 지금껏 홍순범문인이 우리 글 신문과 잡지들에 발표한 시가 200여수, 수필이 50여편에 이른단다.
올해 3월 초 기자는 항주에서 조룡기, 현충혁 두 문인을 만났고 연변작가협회 남방창작위원회를 내올데 대한 얘기가 처음 나왔는데 조룡기문인은 상해에 시를 잘쓰는 홍순범친구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만난것이 6월 13일, 절강월수외국어대에서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설립대회를 하던 날이다.
홍순범문인은 현재 상해에서 로밍액스에 종사하며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 회원으로 뛰고있다. 30대 후반에 들어선 홍순범문인은 우리 문단의 유망한 30대 작가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2009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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