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리별”…수년만에 별들의 전쟁서 “두각”
요즘 산동 치박시에서 열리고 있는 AFC(아시아축구련맹) U-19 선수권대회를 많은 축구팬들이 지켜보았을것이다. 비록 중국팀이 조선팀에 밀려 명년 7월 꼴롬비아 U-20 월드컵 출전자격 획득에 실패했지만 소조경기서 보여준 김경도의 활약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줬다.
축구팀의 중심을 상징하는 두가지. 등번호 10번과 주장완장이다. 중국 U-19 팀에는 조선족선수 김경도가 이를 차지하고있다. 김경도의 주장발탁은 1965년 조선족선수들로 구성된 길림성대표팀이 전국리그를 제패한 이후 조선족 축구계의 최대 사건으로 일컬어진다. 지난 50년대부터 조선족가운데서 중국 대표선수가 꾸준히 나왔지만 주장은 김경도가 처음이다. 2008년 중국 U-17 대표가 된 김경도는 2009년 11월에 있은 2010 U-19 아시아선수권대회 예선경기에서 팀의 주장으로 발탁됐다. 김경도는 예선경기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팀을 소조 1위로 결승에 진출시켜 일약 국내 축구팬들과 축구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김경도의 주장발탁은 실력위주로 팀을 이끈 숙무진감독의 용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해 9월 국가청년팀이 한국서 전지훈련 할 당시 한국 충청남도 한 식당에서 일을 하고있던 김경도의 어머니 김춘옥씨가 목포까지 숙무진감독을 찾아와 감사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때 숙무진감독은 김춘옥씨의 손을 꼭 쥐고 김경도는 주장자격이 충분하다면서 아무 걱정없이 지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경도는 넉넉치 못한 가정형편때문에 어릴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았다. 아버지 김문학씨도 2003년부터 한국에서 일하고있다. 일터도 경기도 용인이라 부부가 함께 살지 못하고있다.
왕청적 부모를 두고 연길에서 독신으로 태여난 김경도선수는 1992년 1월 18일생이다. 국가청년팀의 주장으로 발탁되며 김경도의 성장과정은 연변과 국내 축구계의 주목을 받았다. 김경도선수는 현재 건공소학교 축구지도로 활약하는 박광수선생의 손끝에 이끌려 축구와 인연을 맺었다. 박광수씨에 따르면 경도는 소학교 1년때 학교축구팀에 가담했다. 박광수씨는 비록 경도가 그때도 키가 작았지만 축구를 할때면 자기보다 머리하나가 더 큰 애들과의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억했다. 특히 어머니 김춘옥과 아버지 김문학씨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고 한다. 어린 경도는 지도들의 헌신적인 가르침과 자신의 끝질긴 노력으로 점차 그 기량이 또래에 비해 유난히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박광수씨는 경도의 건공소학시절 축구실력평가를 “공통제 능력이 뛰여나고 의식이 좋고 경기장서 많이 뛰던 선수”라는 말로 개괄했다.
김경도선수는 건공소학교를 졸업한뒤 곧바로 주체육학교에 입학, 현임 연변팀 김광주 감독의 문하에서 7년 넘게 기량을 닦았다. 김광주감독은 김경도선수의 주체육학교 시절에 대해 “축구에 대한 욕심이 많고 개인기와 특점이 동년배 선수들을 훨씬 릉가했다”고 평가했다.
일찍 어린 나이에 생활난때문에 부모와 떨어져 생활해야만 했던 경도는 자신의 굳센 의지와 끈질긴 노력으로 이제 자신의 꿈을 서서히 실현할수 있는 무대 문턱까지 달려왔다. 김경도는 “고생하시는 부모님은 나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항상 말한다. 2009년 12월 연변팀의 한국 제주행시 한국매체들을 향해 “외국에서 다른 경험을 많이 하고싶다. 박지성을 제일 좋아한다. 의지가 강하고 아프면서도 포기 안하는 모습에 감동받았다”자신의 향후 목표를 밝혔다. 참으로 당차고 꿈많은 아이다.
사실 축구는 민족성을 배제할수 없다. 지난 90년대 중반 조선족의 중국축구 대표선수 계보가 끊겼다. 그동안 한족 위주로 선발돼 왔다. 200만명에 불과한 조선족 출신이 대표팀 주장까지 맡았다는건 그만큼 김경도의 실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라고 생각된다.
김경도의 미래는 활짝 열려있다. 그의 미래가 연변의 수많은 축구꿈나무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를 기대해보는 마음이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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