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1급안무가 지정선의 이야기
1970년대에 안도현문공단, 연길시문공단에서 기둥무용수로 활약하는 한편 무용창작의 나래를 펼치던 지정선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이 설립된후 많은 무용작품을 창작하고 출중한 무용수 여러명을 키워내면서 유능한 안무가의 재능을 과시하던 그녀는 정년퇴직한 지금도 재초빙을 받고 일선에서 뛰면서 우리 민족의 무용예술을 위한 사업에 빛과 열을 다 바치고있다.
꿈많던 소녀시절
1953년, 안도현의 한 간부가정에서 6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지정선은 이따금 부모님과 언니오빠들을 따라다니며 공연구경을 다녀서인지 네댓살때부터 춤추기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벽에 걸어놓은 홰보뒤에 숨어있다가 다른 사람이 홰보를 열어주면서 《도라지》를 불러야 당실당실 춤을 추는것이 특기였다.
소학교에 들어간후 달리기를 잘해서 운동대회때마다 1등을 따내고 손풍금을 배워서 검열식반주를 도거리하는 지정선에게서 제일 부러운것은 그래도 요란하게 화장을 하고 공연을 다니는 배우들이였다. 당시 명월진에는 20여명으로 조직된 경극대가 있었는데 어쩌다 하학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줄을 지어 극장으로 가는 경극배우들을 만나면 정선이는 가까이 다가가 한사람씩 찬찬히 뜯어보군 했다. 그것도 한번으로는 성차지 않아 마지막 사람이 지나가면 앞쪽으로 뛰여가 첫사람부터 다시 보기를 여러번 반복하면서 극장까지 따라갔다가 배우들이 다 들어가고 문이 “쾅”하고 닫긴후에야 아쉬운 심정으로 돌아섰다.
중학교에 입학한후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터지면서 공부를 하지 않게 되자 그는 “혁명적련계(串 )”를 맺으러 떠나는 고중생언니들을 따라 북경으로 갔다. 그때 여러 민족 학생들이 외국인들과 한자리에 모여 오락야회를 펼치게 되였는데 조선족을 대표하여 문예종목을 내놓게 된 언니들이 꼬맹이 지정선에게 출연을 부탁했다. 이렇게 지정선은 인도녀성한테서 인도춤을 배우게 되였고 그번 야회에서 《대해항행은 키잡이의 힘》을 인도춤으로 표현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소문이 한입두입 건너 당시 안도현2중 선전대 대장이였던 리광수의 귀에 들어갔고 당장 지정선을 선전대에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결국 중학교 1학년생인 지정선은 상급생들에게 인도춤을 배워주게 되였고 안도현2중선전대는 인도춤으로 각광을 받게 되였다.
무용인생의 첫발자국
1969년, 온가정이 아버지를 따라 안도현 량병공사에 하방을 내려간후 반년만에 중국공청단에 가입하며 일마다에서 앞장을 다투던 지정선에게 무용재질을 과시할 기회가 차례진것은 그 다음해인 1970년도였다.
그해 량병공사선전대에 들어간 지정선은 현문예회보공연에서 당시 많이 류행되던 무극 《홍색랑자군》편단을 무대에 올릴 구상을 제기하여 긍정을 받았다. 배워주는 사람도 없고 그 누구의 도움을 받을수도 없는 형편에서 지정선은 이전에 영화를 본 기억을 더듬으면서 무용을 창작하고 자기가 직접 주역인 오청화의 배역을 맡은외 칼이며 옷, 모자 등 도구들을 마련하느라 분주히 돌아쳤다. 결과 량병공사선전대는 그번 문예회보공연에서 1등의 영예를 받아안고 지정선은 다른 한 녀배우와 더불어 안도현문공단에 뽑혀가게 되였다.
그즈음 안도현문공단에는 연변가무단에서 안무가로 사업하던 홍수천선생님이 있었다. 독무 《일편단심(心 苗 )》을 련습시키면서 지정선의 숨은 재질을 보아낸 홍수천선생은 하나를 배워주면 열을 생각해서 작품을 승화시켜주는 우수한 배우라고 평가하면서 금후 창작에 종사하도록 조건을 창조해주는것이 좋겠다고 제기하였다. 덕분에 지정선은 길림성예술학교에 가서 1년간 연수를 받으면서 소수민족민간무용을 체계적으로 배울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운좋게도 그번 연수에서 일주일간 발레요령을 배우고 발레신까지 타가지고 안도에 돌아온 그녀는 모두가 영화구경을 가거나 사유로 외출한 뒤면 혼자서 련습실을 독차지하고 발레기본공련마의 고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무작정 발끝으로 서서 춤을 추자니 발레신을 신어도 너무 아파서 견디기 힘들었다. 할수없이 지정선은 선생님이 시켜주던대로 발끝을 한참씩 스팀에다 부딪쳐서 마비된후에야 춤을 추군 했는데 감각이 없어져서 아프지는 않았지만 피를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피가 눈에 뜨이면 마음이 약해진다고 전등도 켜지 않고 달빛을 빌어 련습에 골몰했을가?
이악스레 발레기본공을 련마한 지정선은 그후 《홍색랑자군》, 《백모녀》, 《기몽송》, 《초원의 아들딸》 편단을 비롯한 발레종목 8개를 무대에 올렸는데 2인무 《백모녀》에 출연할 때는 다리를 들어올렸다가 360도로 회전하는 고난도동작을 련속 32차씩 완성하면서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냈고 전 주문예회보공연에서 상을 타는 영광을 누리였다.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며
장춘에서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후 지정선씨는 계속해서 기둥무용수로 활약하는 한편 작품창작에 왼심을 썼다. 고맙게도 그때 안도현문공단에서 안무에 소질이 있는 배우들을 상대로 창작회를 조직하고 사람마다 작품 하나씩 구상해보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숙제를 완성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던 지정선씨는 우연하게 화보가위에서 커다란 붉은기 한폭이 우에 있고 그아래에 작은 기발들이 수도 없이 많이 펄럭이고있는 사진을 발견하고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무용 《붉은기아래에서 성장(我在 旗下成 )》을 창작할 구상을 무르익혔다. 홍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며 창작된 이 무용은1975년에 경극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를 이식한 작품인 《상보의 전선탄원》과 더불어 길림성문예회보공연에 참가하여 호평을 받았다.
처녀작이 성공을 안아오면서 무용작품창작에 신심을 가지게 된 지정선씨는 부지런한 농부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내놓으며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해나갔다.
그후 연길시뻐스공장에 근무하는 김광진군과 백년가약을 맺고 연길시문공단에 전근해온 지정선씨는 연길시문공단이 해체되면서 한동안 연길시편직물공장에 내려가 로동자로 일하는 서러움을 지니기도 했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할가 그때 마침 전 주 종업원문예회보공연이 펼쳐지게 되여 지정선씨는 무용 《직포공의 자랑》을 창작하였고 그 작품이 최고상을 따내면서 전도유망한 안무가로 정평이 나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연길시내의 여러 과 가두, 해방군부대와 중소학교들로부터 무용을 창작해달라는 청탁이 눈송이처럼 날아들었다. 그즈음 새로 설립된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들어간 지정선씨는 출근해서 본직임무를 완성할랴 이 단위, 저 단위로 불리워다니면서 무용을 만들어줄랴 눈코뜰새없이 바삐 돌아쳤는데 최고로 하루에 6개 단위를 전전하며 무용보도를 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시기 따로 창작에 머리를 쓸 여가가 없은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가면서 작품을 구상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신호등이 바뀐줄도 모르고 십자거리를 무단통행하다가 벌금을 물기도 하고 언젠가 한번은 갑작스레 앞쪽에서 시커먼 물체가 다가오는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자전거에서 뛰여내리며 그 물체를 그러안았는데 정신을 가다듬고보니 글쎄 맞은켠에서 밀차를 끌고오는 당나귀였다…
이렇게 숱한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내면서 창작한 작품들은 각 부문의 문예회보공연에서 우수종목으로 평의되였는데 그중 무용 《일터의 기쁨》은 전국건설부문문예회보공연에서 1등상을 탔다.
가장 자호감을 느끼는 일
그동안 《쪽배》, 《설녀》, 《축복》, 《사계절의 노래》 등과 음악무용극 《샘》의 무용을 비롯하여 거의 100부에 달하는 무용작품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리면서 지정선씨는 유능한 안무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였고 많은 무용수들 또한 그녀의 작품에 출연하여 상을 타면서 홀로서기를 실현하였다. 그중에서 제일 돌출한 무용수로는 현재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서 코기러기로 사업하고있는 동옥선(현재 연길시조선족예술단 단장)을 들수 있다.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출근한 첫날, 줄을 지어 반겨주는 무용수들을 일별하다 유난히 체격이 쭉 빠진 동옥선에게 눈길이 미치는 순간 “너 진짜 미인송같구나”라고 감탄을 하면서 언제든지 그만을 위한 무용을 만들어주어야겠다고 속구구를 한 지정선씨는 몇년후 《설녀》라는 독무를 만들어 동옥선에게 출연을 맡겼다.
50,60대 녀성이 세속에서 해탈되는 과정을 그린 이 무용을 당시 겨우 19살밖에 안되는 처녀가 소화해낸다는것은 어느 정도 버거운 짐이였다. 그래서 련습때면 지정선은 감정투입에 류의하도록 계발을 주는데 더구나 신경을 썼다. 천만다행인것은 나어린 동옥선이 어려운 동작들을 용케도 받아물며 전반 작품을 원만하게 소화해내는것이였다. 두 사람의 공동의 노력으로 완성된 이 작품은 1990년 12월 국가문화부에서 조직한 전국소수민족무용콩클에서 창작3등상을 탔다.
지정선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를 손꼽을라치면 조카인 오향옥을 빼놓을수 없다. 당년에 이모인 지정선네 집에 와서 연길시5중에 다니면서 출연기교와 안무를 익힌 오향옥은 안도현문공단에서 무용수, 안무가로 사업, 대형무극 《장백산천지의 전설》을 성공적으로 창작해냈는데 그 작품이 1992년 국가문화부에서 조직한 제1차전국무용극콩클에서 2등상을 따내면서 안무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게 되였다. 텔레비죤련속극 《사랑의 품》, 《샘》, 《하얀꽃》(연극 포함) 등에 출연하면서 연기력을 자랑한 그녀는 현재 북경에서 《미인송문화전매유한회사》를 차리고 조선족명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며 CD제작에 투신하고있다.
네식구가 가꾸어가는 세계
새로운 무용작품들을 끊임없이 창작하면서 작품의도에 꼭 맞는 복장이며 도구들을 제한된 시간내에 마련하는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난제를 자기의 두손으로 해결하고싶어진 지정선씨는 4년전에 가정성원들로 이루어진 《금은무대복장설계실》을 내왔다. 따라서 네곳에 흩어져 생활하던 식구들은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특장을 발휘하면서 가정의 따사로움을 만끽할수 있게 되였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있는것은 복장설계사인 딸 김지(26살)이다. 김지는 당년에 지정선씨가 연변예술학교의 박용원선생님한테서 무용을 배울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아쉬워 인산을 결심했다가 담임선생님인 장영숙선생님의 꾸지람을 듣고 학습을 포기하면서 낳은 애이다. 어릴 때 인형을 사주면 옷을 홀랑 벗겨버리고 자기 절로 옷을 만들어입혀놓군 하던 김지는 연변예술학교 연극전업을 졸업한후 북경과학경영관리학원 복장설계전업에 입학해서 전문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그후 1년간 북경에서 일하면서 실천속에서 배운 지식을 공고히 한 그는 현재 엄마가 창작한 무용에 수요되는 복장들을 보다 훌륭하게 설계해내고 또 가공관리까지 깔금하게 해내고있는데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의 《사계절의 노래》무대복장이 몽땅 김지의 걸작이라고 한다. 이밖에 김지는 연변가무단의 《천년아리랑》, 《장백산아리랑》 등 대형작품과 연변TV음력설야회의 부분적복장도 만들어내고 가야금수들을 위한 특수한 민족복장도 설계해냈다.
당년에 아빠엄마가 집에 없을 때면 녀동생을 챙기는 일을 전담하면서 부모님들의 근심걱정을 덜어주군 하던 아들 김용(32살)은 대련민족학원을 졸업한후 상해 등 대도시의 복장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원단관리를 배웠다. 그동안 원단을 손으로 만져만 보아도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고 질은 어떠한가를 판단할수 있을 정도로 재간을 키워낸 김용은 현재 원단구입을 책임지고 한몫을 감당하고있다.
일찍 연변뻐스공장에서 직장당지부서기로 사업한적 있는 남편은 기계공정사출신, 어린 아들에게 장난감자동차를 조립해줄 정도로 무엇이나 척척 만들어내는 재간둥이여서 지정선은 새로운 도구가 수요될 때면 남편의 손을 빌릴 때가 많았다. 그런 솜씨이면 그 어떤 도구든 시도가 가능하겠다고 생각한 지정선은 1990년대에 하해하여 공장도 꾸리고 장사도 하면서 밖으로 나다니는 남편에게 도구제작을 맡아달라고 청들었다. 이렇게 간단한 도구들을 만들기 시작한 남편은 인젠 제법 머리를 써가면서 연구에 살손을 붙이고있는데 일전에는 밑굽에 얇다란 철판을 댄 가벼운 물동이와 자석이 딸려있는 똬리를 제작해내여 무용수들이 출연도중 물동이를 떨어뜨리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건을 창조해준 동시에 무거운 물동이를 이고 춤을 춰야 하는 어려움에서 해탈되게끔 해주었다.
예술이란?
“예술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지정선씨는 “예술이란 벼짚속에서 살며시 내다보는 메주이다”라고 스스럼없이 대답을 준다. 그녀는 벼짚속에서 자신을 썩이면서 기여만 하는 메주를 보면 우리 민족 어머니들의 형상이 떠오른다고 하면서 민족전통에 뿌리를 박고 현대미감을 도입하여 현시대 관중들의 환영을 받는 작품을 만들어야 우리의 무용이 진정으로 립지를 굳혀가고 세계에로 진출할수 있다고 터놓았다. 그녀가 보다 멋진 작품을 새록새록 내놓으면서 우리 민족의 무용예술에 더큰 기여를 하기를 기원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