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흑룡강성조선족창작위원회 부회장 강효삼시인의 이야기
새끼손가락보다 더 짧은 시줄에
넋이 얽매여 평생을 살아온다
그 시 몇줄에 나의 옹근 꿈이 담겨있어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어찌해도 헤여나오지 못하고
시혼을 파닥이며 힘들게 매달려 살아와도
인생의 승부를 이 시줄에 걸었기에
그래도 나는 늘 내가 이겼다 하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이것은 원 흑룡강성조선족창작위원회 부회장인 강효삼시인의 “시론”이다. 1960년대초부터 한춘, 김동진 등 시인들과 더불어 북방조선족문단의 중견으로 활약해오면서 그 어떤 역경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끈질기게 시농사를 지어온 강효삼시인을 만나본다.
문학의 꿈을 키우던 시절
1943년, 흑룡강성 연수현의 심심산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여난 강효삼은 어려서 천연두에 걸려 곰보로 된데다가 키까지 작다보니 주위사람들의 기시를 많이 받았다. 그때문에 항상 주눅이 들어있던 그는 겉이 못난 대신 속이라도 다져서 남들에게 뒤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이렇게 념두에 두게 된것이 문학과 음악이였다.
할아버지가 사온 축음기를 통해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라서일가 시초에는 음악쪽으로 천평이 기울어져서 가수가 되여보겠다고 허둥대며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맹세를 다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자기처럼 못나고 키도 작고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는 시골뜨기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무대에 나서기 어렵다는것을 알게 되자 스스로 꿈을 접고말았다.
그가 가수의 꿈을 문학쪽으로 돌리고 그것도 시인을 지향하게 된것은 소학교시절 시랑송대회에 나가 조기천의 시 《조선은 싸운다》를 랑송한후부터였다. 방학때면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는 삼촌네 집에 가서 며칠씩 있으면서 문학서적을 읽은터라 조기천의 격조높은 전쟁시편을 무대에서 랑송하면서 시감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된것이였다.이렇게 시에 취미를 가지게 된 그는 소학교 5학년때 작문시간에 동시 《봄바람》을 써서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어깨가 으쓱 올라가게 된 그는 조선어문시간에 《어린 시인》이라는 과문을 배우고나서는 자기도 과문의 주인공처럼 시인의 꿈을 키워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상지중학교에 올라간후에는 조선어문과목을 열심히 배우는외에 하학후이면 서점에 들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연변이나 조선의 문학작품들을 탐독하면서 문학수양을 쌓아갔다.
키가 작아 종래로 남의 뒤에 서본적이 없는 “난쟁이” 강효삼이 문학을 한다니 쉬쉬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동학들은 지어 한창 재미나게 읽는 책을 빼앗고 “너까짓게 문학으로 성공을 하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하면서 빈정거리기도 했다. 고맙게도 학교의 조선어문선생님이 그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두둔해주었다. 덕분에 효삼이는 문학의 꿈을 지켜갈수 있었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마침내 학우들의 인정을 받게 되였다.
정치운동의 소용돌이속에서
문학을 지향하면서 독서를 많이 하고 시대를 남다른 안광으로 관찰하기 시작한 강효삼은 미성년시기부터 정치운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어 여러차나 곤경을 치렀다.
처음으로 피해를 본것은 고중1학년때인 1958년말이였다. 당시 시대적인 착오인 대약진에 대해 저촉정서를 가지고있었던 그는 17살 어린 나이에 “학생우파”로 획분되여 사생들앞에 끌려나가 비판투쟁을 받고 “대과2차”처분을 받았으며 한학기만에 학교에서 쫓겨나는 서러움을 당했다.
어쩔수 없이 고향에 돌아간 강효삼은 농사일을 하는 한편 짬이 나는대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문학적인 지향만은 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끈이 되여 1961년에는 마을의 소학교 교원으로 채용되고…
문학이 자기를 부활시켰다고 생각하니 고맙기 그지없었다. 이에 그는 맡겨진 교수임무를 원만히 완수하는 전제에서 문학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중학교 동창생인 김상봉과 손을 잡고 《북방송화강문학청년습작회》라는 문학동호회를 결성하고 부회장직을 담당했다. 그시기 이 문학동호회는 주위의 문학지망인들을 무어서 활동을 펼쳐나감과 동시에 《첫걸음》이라는 자작신문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런데 공안국으로부터 반혁명조직으로 의심받고 조사대상으로 지목될줄이야?! 천만다행으로 《회칙》에 “모택동문예사상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들고…” “로신을 따라배워…” 등 내용이 들어있어 억울한 루명은 쓰지 않게 되였지만 금방 걸음마를 탄 문학동호회는 강제해산당하고 강효삼 본인은 여느 청년들이 다 가입하는 공청단조직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어떤 문학지망인들은 지레 겁을 먹고 정치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하지만 강효삼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계속해서 문학의 길을 걸어나갔고 《흑룡강신문》이 창간되고 《송화강》잡지가 내부적으로 발행된다는 소식을 접한후에는 열심히 글을 써서 부지런히 투고를 했다. 1963년 2월, 《흑룡강신문》에 시 《봄이 나간 날》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한춘, 한병국, 박철준, 리명재, 김동진 등과 어깨나란히 《칠색무지개》의 성원으로 된 그는 원로시인인 리삼월선생과 기타 선배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문학창작의 첫 발자국을 힘차게 내디디였다.
그러나 강효삼의 문학꿈은 얼마 안가 다시 한번 무참하게 요절당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그 진행과정을 지켜보다가 너무도 한심해서 “문화의 혁명이 아니라 문화의 대파괴”라고 뒤에서 한마디 했는데 그것이 반란파들에게 전해져 “반혁명분자”로 락인찍히고 교직에서 축출당했던것이다.
외로운 고행
결혼 7개월만에 리혼을 하고 농촌에서 로동개조를 하는 신세가 되고보니 신문사에서도 작품을 발표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만 있으면 책을 보고 시를 쓰는것이 습관으로 굳어져버린 강효삼은 언제 해볕을 보게 될지 막연한 시며 노래말들을 쓰고 또 쓰면서 문학창작의 외로운 고행을 계속해나갔다. 시경에 빠져들어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만큼은 모든 고통과 억울함을 잠시라도 잊을수 있어서, 시를 쓴다는 자체가 가장 큰 위안이고 기쁨이여서 논두렁에 앉아 잠간 쉴참에도 책을 보면서 령감이 떠오르면 그자리에서 적고 또 적었다. 이렇게 4년간 창작한 시와 노래말이 자그만치 두책이나 되였는데 그중 많은 작품들이 그가 정책시달을 받은후 독자들과 대면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가운데서 대표적인것으로는 노래말 《톱질타령》을 꼽을수 있다. 로동개조를 하면서 강효삼은 한동안 림산작업소에 들어가 목재채벌로동에 참가하였었다. 그런데 난생 처음 하는 일이지만 망망림해에서 전기톱으로 나무를 베는 작업이 그렇게 신날수가 없었다. 특히 산골짜기에 들어가 톱날을 밀고당기느라면 앞산을 밀어가고 뒤산을 끌어오는것처럼 느껴지면서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갑자기 《톱질타령》이라는 제목으로 노래말을 만들고싶어진 그는 하루의 작업을 끝내고 귀틀집에 돌아오기 바쁘게 낮에 구상해두었던대로 필을 날렸다.
스리슬쩍 톱질이야
슬슬 기계톱이야
앞산을 밀어가고
뒤산을 끌어오니
백년 묵은 홍송청송
빙글빙글 넘어간다
몇년간 수첩에서 잠을 자던 이 노래말은 후에 해림현조선족문화관 관장으로 사업하던 김량준작곡가에 의해 노래로 창작되였고 문화대혁명이후 처음으로 진행된 흑룡강성음악창작평의(1981년)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아왔다.
인생의 새봄
강효삼시인은 1976년에 억울한 루명을 벗고 정식교원으로 복귀하면서 인생의 새봄을 맞이했다. 그토록 좋아하는 시나 노래말을 마음대로 쓸수 있고 공개적으로 발표할수 있는 기회가 돌아오자 그는 시간만 있으면 시를 쓰면서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했다.
저녁이면 식구들이 다 꿈나라로 들어간후 전등 대신 초불을 켜놓고 이불속에 엎드려 글을 썼고 아침이면 전날 저녁 이불속에서 구상한것들을 놓쳐버리지 않기 위해 일어나기 바쁘게 필을 들었다. 때론 출근시간 30분을 앞두고 글을 쓰다보니 그만 출근시간을 훌쩍 넘겨버려 지도일군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며칠 안가 또다시 “옛병”이 도지군 하면서…
이렇게 완성된 작품들은 《흑룡강신문》, 《연변일보》, 《장백산》, 《천지》(지금의 《연변문학》), 《송화강》 등 신문잡지를 통해 륙속 선을 보였는데 그중에서 꽤나 인기를 끈 작품으로는 시 《노래불러라 영이야》를 들수 있다.
막내딸 선영에게 속심말을 하는 형식으로 조직된 이 작품은 문화대혁명기간에 억울한 루명을 쓰고 로동개조를 한 아버지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자식들에 대해 안스러워하는 작자의 심경과 인생의 새봄을 맞이한 기쁨이 여실하게 반영되여있는것으로 하여 인기를 끌었다.
문화대혁명결속후 인차 발표된 이 작품은 상처문학으로 시단에서 각광을 받고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과 흑룡강신문사 《진달래문학상》을 탔으며 이를 계기로 강효삼은 흑룡강성작가협회와 연변작가협회에 가입하게 되였다.
민족사랑
산재지구에서 문학창작에 종사하고있는 문학인으로서의 강효삼선생은 민족문학에 대해 남다른 주장을 갖고있다. 소수민족으로서 자신의 말과 글을 자꾸 잃어가는 현황에서 글쓰기는 단순하게 작품을 쓰고 안쓰는 문제가 아니라 민족심을 가지느냐 가지지 않느냐 하는 문제라는것이다. 글을 쓰게 되면 자연히 말과 글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은 곧바로 민족사랑으로 이어진다. 특히 산재지구는 조선족인구가 날로 줄어드는데다가 이런저런 원인으로 한족학교에 다니는 조선족학생수가 늘어나면서 우리 말과 글을 모르는 조선족들이 상승선을 긋고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서 작가 한사람이라도 더 양성하고 글쓰기가 정 안되면 독자라도 되고 문학을 리해하는 사람이라도 되도록 이끌어준다면 그만큼 민족을 살리는데 기여를 하게 된다는것이다.
그래서 강효삼선생은 흑룡강성 상지현 하동향문화소에 전근한 1983년부터는 문학도양성을 주요한 사업으로 간주하고 여러가지 활동을 폭넓게 조직하였다. 경비제한으로 다른 활동을 취소해도 문학창작활동만은 에누리없이 견지했고 경비가 없거나 부족할 때면 아예 자기 집에 개를 잡아놓고 하동향은 물론 린근 향과 현의 문학도들까지 다 불러다가 모임을 가졌다.
미구에 《진달래문학살롱》을 발기한 선생은 자전거를 타고 향내 28개 마을을 참빗질하면서 글쓰기애호자들을 발굴, 문학을 해볼 생각은 있으나 자신이 없어 우유부단하는 사람이 있으면 몇번이고 찾아다니면서 기어이 활동에 끌어들이고야 시름을 놓았다. 비록 이런 활동에서 이름난 작가는 많이 나오지 못했지만 하동향은 기층에서 제일 처음으로 지역문학활동을 시작하고 견지한것으로 흑룡강성내에 소문이 나서 신문사, 방송국과 잡지사, 출판사의 편집기자들이 줄을 지어 다녀가고 여러차나 특집을 꾸렸다. 따라서 자그마한 민족향인 하동향의 문학활동이 전반 흑룡강성의 조선족지역문학창작을 추동하는 선두자의 역할을 놀았고 강효삼선생은 여러차나 상급 해당부문의 표창을 받고 전국조선어문사업회의에 출석하여 발언을 하는 영광을 누리였다.
가난한 세대주
실생활속의 강효삼선생은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항상 밝고 쾌활하게, 유모아적으로 살아온 락천적인 사람이다.
강효삼시인은 1970년대에 늦장가를 가서 자식3남매를 보았는데 농민호적인 안해가 직업이 없는데다가 아이들이 줄줄이 학교에 붙다보니 40여원밖에 안되는 로임으로 다섯식구가 살아가느라 고생이 막심했다. 돈이 없어 한근에 30전씩 하는 소고기도 사먹지 못했고 책상 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한 가정살림은 서발막대 휘둘러도 거칠것이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한푼이라도 쪼개써야 하는 선생은 현소재지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추운 겨울에도 자전거를 타고다녔고 석탄비용을 남기기 위해 가을이면 산에 가서 땔나무를 자기 손으로 해왔다. 그리고 어려운 식량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호도거리가 실시된후엔 50리밖에 사는 아버님한테서 논 한배미를 달라고 해서 휴식일이면 자전거를 타고다니며 농사를 했다.
가정생활이 아무리 곤난해도 자식들만은 꼭 대학까지 보내기로 마음먹은 선생네 부부는 애들의 학비를 대느라 집까지 팔았고 안해가 외지로 품팔이를 떠나다보니 다섯식솔이 다섯곳에 흩어져 살았다. 이때에 와서 앞당겨 퇴직하고 자유기고인으로 된 선생은 세집에서 “홀아비”생활을 하면서도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위해 흑룡강성의 신문사, 방송국, 출판사를 다 돌며 “품팔이”를 했다. 그 보람으로 자식 셋이 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중 둘은 석사연구생공부까지 했다.
문학사랑
선후로 흑룡강성조선족창작위원회 부회장, 상지시진달래문학회 회장 등 직무를 맡고 중견시인으로 활약해온 강효삼선생은 지금까지 시, 동시, 노래말, 수필, 잡문 등 500여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아동시집 《봄비》와 성인시집 《먼 후날》,《저 하늘너머》를 출간했으며 연변문학의 《윤동주문학상》, 한국 해외동포문학상을 비롯해서 30여차의 수상경력을 가지고있다.
시인 강효삼은 문학을 자신이 사회와 민족을 위해 봉사할수 있는 유일한 자본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선생은 시나 노래말외에 잡문도 써서 주위에서 발생되는 일들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고 산재지구 조선족의 현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토로한다. 이밖에도 선생은 누구든지 찾아와 청을 들면 편지든 생일, 환갑, 결혼 축사든 닥치는대로 써주고 지어는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의 신고문이며 민족언론지에 써보내는 상황보고까지 대필해준다.
문학때문에 불행도 체험하고 행복도 맛본 선생에게 있어서 문학은 친구나 애인 같은 존재였다. 여직껏 문학이란 친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선생은 때로는 자신을 기업인이라고도 생각한다. 사회의 간접자본을 생산하고 정신재부를 매일같이 창조하는 정신기업집단속에서 고향, 민족의 얼이라는 정신적에네르기를 생산하여 사회에 내놓는 자기가 사장 중개인 회사원이며 독자는 손님이라는것이다.
한평생을 문학이란 기업을 경영하며 문학의 길을 걸어온 선생은 처음부터 자신을 리해하고 동정하고 지지해준 부모, 이웃, 친지, 스승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끔씩은 걸어온 문학의 길을 정리해보면서 문학작품을 통해서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리려 하고있다.
몇해전에 신장기능부진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지금에 와서 문학은 이제 삶의 목적이자 과정이 되였다. 하기에 선생은 목숨이 붙어있는한 창작에 열심하며 보람차게 살아갈 결심을 굳히고있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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