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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독창가수가 만들어가는 장미빛인생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2월9일 09시59분    조회:6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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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상운

연변가무단 가수 겸 타악기연주원 김상운의 이야기


      둥근 달님이 떠오르면 어머님 얼굴 보고싶소
      밝은 별빛이 반짝이면 어머님 말씀 듣고싶소
      세월이 흘러흘러서 이 몸은 자랐어도
      어머님 무릎아래서 자장가 듣고싶소


      1988년에 석화시인의 작사로 만들어진 노래 《어머님생각》은 고인이 된 어머니를 그리는 작사자의 절절한 그리움이 가수 김상운의 애수에 젖은 목소리와 어우러지며 연변의 방방곡곡에 울려퍼졌다. 이 노래는 부모님에 대한 이 세상 모든 자식들의 그리움을 담아 수십년간 변함없이 대중가요로 사랑을 받아왔으며 가수 김상운은 대중가수의 반렬에 성큼 다가설수 있었다. 푸근한 형상과 애절한 목소리로 연변의 가요계를 장식해가고있는 김상운, 기자와 마주앉은 김상운은 무대우에서의 과묵한 모습과는 달리 소탈하고 유모아적인 모습으로 시종 웃음을 끌어낼줄 아는 남자다운 남자였다.
     
       동년에 비껴든 칠색무지개
     
1966년 9월, 연변가무단 단장이였던 아버지 김성민과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어머니 김정옥사이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감상운은 우파분자로 몰려 화룡현 룡문대대로 쫓겨간 아버지를 따라 뜻하지 않게 시골생활을 하게 되였다. 동네친구들과 함께 개울가에서 개구리를 잡고 강변에서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시골생활에 젖어사는 어린 상운이는 밭에 거름을 내던 아버지가 왜 종종 넋나간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긴 탄식을 쏟아내는지, 연변가무단의 창시인으로 《연변자치주주가》까지 만들어낸 아버지가 왜 악기 대신 손에 곡괭이를 잡아야 했고 우사칸에 몰래 숨어 꽁꽁 마른 두병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는지, 밤마다 마을사람들한테 에워싸여 기타치며 노래부르던 아버지의 눈가에 왜 항상 촉촉한 이슬이 맺혀있었는지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1971년, 상운이가 5살나던 해에 드디여 아버지가 우파모자를 벗어던지고 다시 연길로 돌아왔지만 집이 없이 예술학교울안에 있는 닭굴을 개조해 입주하게 되였다. 그렇게 오두막같은 집에서 생활한 6년사이에 상운이의 동심에는 7색무지개가 곱게 피여올랐다. 익숙해진 시골풍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예술인들의 풍부한 삶은 어린 상운이의 동심에 촉촉한 단비를 뿌려주었고 가는 곳마다 보이는 각양각색의 악기와 지칠줄 모르는 형님누나들의 노래소리는 상운이에게 삶의 전주곡을 울려주었다. 어린 상운은 무작정 악기가 좋았고 조건없이 노래가 즐거웠다. 배워주는 사람이 없어도 형님누나들의 발성하는 모습을 문짬으로 엿들으면서 상운이는 혼자만의 예술세계에 도취되였다. 연길시 중앙소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 문예선전대의 꼬마독창가수로 뽑혀 무대우에서 자신의 장끼를 남김없이 발휘하고 관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 그 짜릿함에 취해 어린 소년의 가수꿈도 서서히 여물어갔다.  

      소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날, 중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자신의 꿈과 목표를 실현하려면 중국어를 정복해야 한다던 형의 말이 상운이를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조선족학생이 한족학교에 진학한다는것은 당시에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갓 영글기 시작한 꿈이 언어장벽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질수 있다는 우려가 상운이를 자극했다. 중학교학생모집이 시작되자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목청을 가다듬은 상운이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다름아닌 연길시 1중 교장사무실이였다. 새학기 신입생들을 맡게 될 담임들과 회의중이던 교장선생은 상운이가 서툰 중국어로 자신이 찾아온 의사를 밝히자 껄껄 웃으며 노래 한곡 불러보라고 했다. 상운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가 직접 창작한 노래 《화주석 천안문에 오르셨네》를 불렀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노래하는 상운이를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1학년 담임선생들이 시합이라도 하듯 일제히 상운이에게 다가가서 서로 자기 학급에 편입시키겠다며 실랑이를 벌리는 통에 상운이는 옷단추가 2개나 떨어져나갔다. 한바탕 “육탄전”끝에 결국 하씨성을 가진 선생이 “힘”으로 다른 교원들을 제압하고 상운이를 빼앗아가게 되였다.

      꿈의 비상
     
한족학교에 첫발을 내딛던 날, 상운이는 장미빛으로 찬란한 자신의 미래가 방불히 눈앞에 보이는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암초가 상운의 꿈을 송두리채 뽑아버렸다. 활발하게 조직되던 학교의 문예선전대가 상운이의 입학과 동시에 페지되였던것이다. 중국어와 중국가요를 정복하고싶었던 상운이의 꿈은 입학과 동시에 산산이 부서졌고 상운이는 점차 자아를 잃어갔다. 그런 상운이에게 다시 새로운 힘을 부여해준 존재가 있었다. 바로 악기였다. 친구집에서 낡은 기타를 발견하던 순간, 상운이의 뇌리속에는 기타치며 노래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히 떠올랐다. 상운이의 가슴 한구석에 뜨거운 소용돌이가 일기 시작했다. 오래동안 헤여졌던 친구와 재회한듯 상운이는 오래도록 품에 안은 기타를 놓지 못했다. 악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였지만 필경 그에게는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몇번 기타줄을 튕겨보던 상운이의 손끝에 익숙한 음색이 전해지기 시작한것이다. 호기심으로 튕겨보던 기타줄에 감각으로 익힌 음색을 찾아 헤매이는 사이에 익숙한 멜로디가 띠염띠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상운이는 가슴뿌듯한 희열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고 춤추는 음부들속에서 한개 또 한개의 익숙한 음부들을 찾아헤맸다. 상운이의 기타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보였다. 단순한 멜로디를 넘어 잔잔하면서도 강한 화음까지 안받침되면서 그의 기타연주에 혼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런 아들이 내심 대견했던 아버지는 어느날, 아들앞에 몰래 준비했던 선물을 내밀었다. 새 기타와 기타악보책이였다. 생애 처음 자신만의 악기가 생기던 순간의 감격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운이의 가슴속에 연연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날이후로 상운이는 악보책이 보풀이 일 정도로 련습하고 또 했다. 상운이는 아예 칼로 책상우에 여섯가닥의 기타줄을 새긴 뒤 수업중에도 손으로 책상우에 그어진 기타줄을 쉴새없이 튕겼다. 그의 뇌리속에는 온통 춤추는 음부들뿐이였다. 또 한번의 승부욕이 생겼고 또 한번의 기적이 이루어졌다. 중학교졸업을 앞두고 노래에 대한 공허함을 악기연주로 달래던 상운이에게 아버지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벨칸토창법을 한번 배워보거라. 벨칸도창법을 정복하면 통속가요나 민요도 더 잘 부를수 있을거다.”
      기타치며 통속가요를 부르는것이 꿈이였던 상운이였지만 벨칸도가 진정한 기술을 련마할수 있는 음악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또다시 승부욕이 생겼다. 며칠후 상운이는 부모님의 소개로 당시 연변가무단 성악부 부장이였던 류수용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벨칸토창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통속가요와는 사뭇 다른 벨칸토창법이라 발성부터 애로가 많았지만 끈질긴 근성으로 벨칸토에 집착하던 상운이는 1983년에 순조롭게 연변대학 성악학부에 진학했다.

      대학교 교정은 상운이의 꿈을 한껏 부풀려주는 활무대가 되여주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기타를 메고 잔디밭에 앉아 건드러진 통속가요를 부르는것이 상운이에게는 더없는 행복이고 즐거움이였다. 그의 노래소리는 수많은 친구들을 불러모았고 상운이는 친구들에게 에워싸인채 손가락이 마비될 정도로 기타줄을 튕기고 또 튕겼다.  전혀 다른 두가지 창법을 병행하다간 죽도 밥도 안되는수가 있다며 통속가요를 포기하라는 정영숙선생의 엄포에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타악기와 함께 한 26년
     
대학교 2학년 후학기의 어느날, 학교의 전교장선생이 상운을 찾았다. 
      “오래동안 음악적감각이 남다르고 품성이 좋은 학생을 물색했소. 학생의 재능이라면 나의 오랜 숙원인 타악기연주를 활성화시킬수 있을것 같소. 한번 도전해보지 않겠소?”

      타악기는 당시 그다지 널리 보급된 종목이 아니였고 장래성 또한 장담하기 어려운것이였다. 고민하는 상운이에게 당시 전국정협 상무위원이였던 외삼촌 김태갑선생이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
      “타악기는 알면 알수록 오묘한 매력이 끝이 없는 악기이고 관중들의 흥을 최대한 끌어올릴수 있는 종목이다. 한번 도전해보거라.”

      그렇게 맺어진 타악기와의 만남은 상운이의 생에 또다른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당시 70고령이였던 박정렬로인으로부터 장고의 타법을 익혀가면서 상운이는 다른 악기에서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절주감과 리듬감에 사로잡혀 하루종일 둥기당당 장고와 드럼과 씨름했다. 신인답지 않게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닫는 상운이에게 박정렬선생은 자신의 연주기교를 아낌없이 전수해주었고 가끔 상운이의 북장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1987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상운이는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배치받아 본격적으로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1991년에 친구와 함께 우연히 한국의 사물놀이공연을 관람하던 날, 그날의 감동은 상운이에게 또 한번 성공의 디딤돌로 되였다. 북, 징, 꽹과리, 장고가 서로 다른 음색으로 하나가 되면서 신명나는 리듬을 토해내는 현장을 지켜보는 상운은 박차오르는 감동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날의 감동에서 쉽게 헤여나올수 없었던 상운은 상급의 비준을 거쳐 진경주, 김철, 천우 등 친구들과 손을 맞잡고 “사물놀이”팀을 무었다. 마땅한 련습곡도, 마땅한 련습장소도 없었지만 네 친구는 모이기만 하면 장소를 불문하고 악기를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쟝르로 처음 무대에 올라서던 날, 네 친구는 설레이는 감동을 북채에 실어 신명나게 악기를 두드려댔고 그들의 감동은 고스란히 관중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왔다. 1992년에 향항에서 열린 “제4차 아시아예술절”축제에 초청받은 사물놀이팀은 향항에서 내노라하는 종목들만 오를수 있는 최상급 공연장에서 이색적인 광경을 연출해냈다. 우아한 예술이 펼쳐지는 내내 숨막히는 정적이 흐르던 공연장에 시작을 알리는 북의 긴 공명소리와 함께 흥이 넘치는 사물놀이공연이 시작되자 관람객들의 표정이 일순간 환희에 넘치는듯싶더니 구석구석에서 휘파람소리와 환호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사물놀이표현이 끝난후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박수갈채에 김상운은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코끝이 찡해났다. 1997년에 연변가무단에 전근된후에도 상운이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사물놀이의 대중화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렇게 궐기된 사물놀이는 연변에서 끝없는 “사물놀이”열풍을 일으키며 축제거나 대형행사에 빠지지 않는 인기종목으로 되였다.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1988년, 저명한 작사가 석화선생이 고인이 된 어머니를 그리는 절절한 마음을 가사에 담아 《어머님생각》이라는 신곡을 만들었다. 석화선생이 가사를 상운이앞에 내밀었을 때 상운이는 가슴밑바닥에서 아련히 젖어오는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에 가슴이 찡해지면서 알수 없는 애수가 차올랐다. 당시 연변에는 록음시설이 구전하지 못했기에 상운이와 석화선생은 부푼 가슴을 안고 북경행렬차에 몸을 실었다. 노래록음하러 몰려든 수많은 가수들의 틈에 끼여 북경에 도착한 수일후 새벽 2시에야 겨우 록음기회를 얻었고 새벽잠과의 사투끝에 짧디짧은 30분만에 성공적으로 노래의 록음을 마쳤다. 그렇게 탄생된 노래 《어머님생각》은 우수짙은 김상운의 애절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대중들에게 전달되면서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고 김상운은 대번에 대중가수의 반렬에 성큼 들어섰다. 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머님생각》은 김상운의 대표곡으로 대중들의 애대를 받고있다.

      1996년 여름의 어느날, 악기연주와 가수활동을 병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당시 노래를 록음하러 우연히 들리게 된 록음실에서 상운은 당시 이름난 작곡가였던 황기욱선생을 만났다. 리임원선생이 작사하고 황기욱선생이 작곡한 남녀2인창 《숙명》을 부를 남자가수물색에 골머리를 앓던 황기욱선생은 김상운에게 악보를 내밀며 한번 불러보라고 청들었다. 몇번 멜로디를 흥얼거리던 상운이가 한해연가수와 함께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황기욱선생이 상운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감격에 겨워 말했다.

      “끝내 찾았구만, 이 노래는 자네가 적임자일세. 당장 이 노래를 록음하기요.”
      그렇게 상운은 뜻하지 않게 한해연가수와 함께 즉석에서 남녀2인창 《숙명》의 록음까지 마쳤고 노래는 한해연가수와 김상운의 독특한 음색이 묘하게 한데 어우러지면서 대중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아안았다.


      “팔불출”남편의 진솔한 안해사랑
     
“안해와의 만남은 숙명이였습니다.”
      짧디짧은 그의 한마디 말속에는 감출수 없는 행복한 남자의 내음이 고스란히 풍겼다. 1991년, 소학시절 담임선생님의 소개로 당시 연길시 맥주공장에서 출납일을 하던 지금의 안해 김춘란을 만난 뒤로 상운이는 아련하면서도 당찬 안해의 “팔색조”매력에 흠뻑 취해버렸다. 약 2년의 련애끝에 1993년에 결혼하고 부부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결혼 이듬해에 아들 김태성이 출생하면서 행복이 배로 커졌다. 막내며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안해는 결혼 이튿날에 순회공연을 떠나며 미안함을 토로하는 남편을 웃는 얼굴로 바래준 뒤 서둘러 70고령의 시부모를 신혼집에 모셔왔다. 시부모가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장장 10여년동안 시부모공대에 소홀할세라 정성을 다한 안해가 그렇게 고마울리가 없었단다. 가수랍시고 전국각지를 전전하며 집을 려관방취급하던 남편이였지만 안해는 한번도 그런 남편에게 싫은 소리를 한적이 없단다. 남새를 살 때는 1전한푼도 따져가는 “짠순이”아줌마이지만 남편의 뒤바라지를 위해서는 목돈도 아끼지 않는 안해를 두고 친척친구들은 진정한 “내조의 녀왕”이라 부른단다.

      그런 안해가 개체업을 해보고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똑부러지는 안해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던 상운이는 두팔걷고 안해의 창업을 도와나섰다. 그 덕분에 1996년에 연길시지하상가에서 작은 옷매대를 시작한 안해는 뛰여난 장사기교로 몇년만에 성보호텔 3층에 “이태리아”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확장하면서 명실공히 녀장부로 되였다. 상운은 그런 안해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매일 아이들을 바래다주고 마중하는건 물론 휴식일없이 바삐 돌아치는 안해를 위해 상운이는 거쿨진 남자손으로 집안살림을 도맡아나섰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동석했다가도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아이들을 데리러가는 상운이는 이미 친구들사이에서 “팔불출”로 유명세를 탄지 오래다.

      의리파 사내에서 만점짜리 아빠로
     
현재 연변예술학원 음악학부에 재학중인 큰아들 김태성(18살)과 연길시 6.1유치원에 다니고있는 작은 아들 김주성(5살)에게 상운이는 한마디로 만점짜리 아빠이다. 아이들과 마음을 소통하는 방법을 몰라 별반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보지 못하는 남편에게 어느날 안해가 학원증을 내밀었다. 《아버지학교》라는 단계성강습반학원증이였는데 한국전문가들이 직접 교수하면서 자녀교양에서 아빠의 역할과 존재감을 찾아준다는 안해의 말에 상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빠의 역할과 존재감…?”
      남자가 창피하게 무슨 학습반이냐고 푸념을 하면서도 상운의 발길은 어느새 “아버지학교”로 향하고있었다. 반신반의하면서 찾아간 “아버지학교”는 상운이에게 아빠로서의 자아를 찾아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였고 상운은 “허울뿐이던 아빠”에서 만점짜리 아빠로 탈바꿈하게 되였다. 지금은 친구들과의 술자리 대신 두 아들과의 대화에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인다는 상운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빠라고 자부했다. 노래와 악기가 전부였던 상운이의 삶은 가족이라는 존재가 부가되면서 진한 장미빛인생으로 물들어갔다.

살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였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상운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명한명 가족이 늘어가던 순간이라고 대답했다. 안해와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소중한 가족, 그 가족이라는 울타리안에서 활력소같은 존재로 떠오른 두 아들이 있어 가수 김상운은 요즘 하루하루가 살맛난단다.

연변라지오TV신문  박홍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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