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철선생은 연변주검찰원 기술처 제1임 처장으로 퇴직한분이다. 퇴직 3년 앞두고 고골두무균성괴사병으로 대퇴골수술을 받았다. 수술후 4년간이란 후속치료로 퇴직할 때에 이르러서는 장시기의 약물복용 미열로 신장기능쇠약과 뇨독증까지 덮쳐 또 3년간을 뇨독청치료를 받으면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엎친데 겹친다고 때를 같이해 안해의 퇴행성관절염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2003년 부부는 심사숙고끝에 연길집을 팔고 두분의 병치료에 리롭게끔 해남도 삼아시로 이사를 갔던것이다. 건강도 어느정도 회복되여가던 2010년 연변주인민검찰원의 배려로 검찰원가족아빠트 한채를 다시 사서 들게 되면서 《여생의 숙제》를 완수하는 려정을 시작한것이다.
박선생은 자신의 회한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친인들을 처참하게 잃은 아픔과 외로움을 평생 안고 사신 어머니가 자식들한테 외할머니와 외가집의 혁명이야기들을 틈틈이 들려주시던 기억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나는 대학에서 부대로 가서 군생활을 하다가 지방부대로 옮겨왔으며 제대해서는 검찰원 기술검찰관이란 특수사업을 하다보니 어머니와 긴 이야기를 나눌 편안한 시간을 가져보지 못했다.
일이 바쁘다는 핑게로 명절 같은 때나 한번씩 찾아뵙는게 고작이였고 운신이 불편한 어머니가 아들집이라고 다녀가신적은 단 한번뿐인걸로 기억된다. 그때 어머니는 내 사업에 방애가 될가봐 하루만 묵으면서도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고 《이제 시간날 때 자네가 외할머니 초상화를 하나 그려다오…》하고 부탁했다.
하긴 꼭 외할머니의 초상화를 그려내겠다고 어머니한테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 약속을 지켜드리기전에 어머니께서 1995년, 내가 퇴직하기 5년전에 타계하실줄이야. 나는 그제야 내가 얼마나 큰 불효를 저질렀는가를 깨닫고 가슴을 친다.
외할머니와 외가편의 영광스러운 혁명이야기들을 어머니한테서 쉽게 언제든지 들을수 있을것이라고 시름놓고 살아온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는 통한을 나는 떨쳐버릴수 없다.
최계옥렬사의 딸이 남긴 음성록음테프와 사진 ./박영철
《아, 그 테프-》
년로해지면서 어머니는 연길에 떨어져 사는 나한테 늘 하실 말씀을 다 못한 아쉬움 같은것을 안고계시는 눈치였다. 그때에는 지금처럼 가정전화도 없기에 수시로 대화할수도 없었다. 신변에서 어머니의 외로움을 달래드리지 못하는 걱정에서였는지 나는 훈춘에 사는 동생한테 어머니의 회상이야기들을 록음해 두라고 부탁한적이 있었다. 바로 그 테프였다. 어머니가 동생더러 《이건 아무때건 꼭 둘째형한테 주라》 했다던 그 테프, 어머니가 돌아가신후 어머니의 소지품속에서 나온 그 테프였다.
어머니와 대화하며 록음을 했던 동생이 그때 《별 특별한 말씀은 없었소. 그냥 외할머니, 외가집의 이야기…》라고 말한 기억은 생생하지만 이제 와서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손수건을 풀면서 나는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가 15년이니 록음한 시간은 20년 푼히 된다. 나는 어머니가 외할머니, 그리고 외가집의 항일혁명이야기들을 평생 편히 풀어놓지도 못한채로였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았다.
테프가 하도 오래되여서인지 어머니 말씀이 가담가담 끊기군 했고 많은 대목은 흐릿했지만 외할머니의 사적, 어머니의 아픔과 그 절절한 그리움이 그대로 나한테 전해왔다.
《머리태를 말꼬리에 매고 그 골안길을 끌어내렸다니 …흑흑…》
늘 그러듯이 외할머니 순난때의 정경을 말할 때면 어머니는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 이젠 내가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해갈게요…》 하고 나는 록음기에 대고 저세상에 계시는 어머니한테 또 한번 마음속으로 약속했다.
그런데 테프와 함께 싸여있는 두 초상사진은 무엇일가?
젊은 남자의 얼굴은 외할머니나 어머니가 오매불망 걱정하고 기다리던 외할머니의 외동아들이자 나의 외삼촌인 최동호의 사진이였고 얼굴반쪽만 남은 손톱눈만한 중년녀성의 사진은 다름아닌 외할머니의 초상이였음을 판단할수 있었다.
문화대혁명때는 혁명가 어머니, 혁명가 형제를 둔 우리 어머니한테도 마음을 조이고 살아야 했던 불운의 시기였다. 외할머니의 렬사증을 발급받았지만 외할머니와 함께 혁명하다 쏘련으로 파견된 외삼촌이 행방불명으로 되였고 작은이모 최현춘이 조선으로 갔으니 우리 어머니는 자유로울수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우리 집에서 외할머니나 외삼촌과 작은이모의 사진은 문화대혁명후에야 비로소 다시 볼수 있었다. 하루는 우리 형제가 다 모여앉은 자리에서 어머니는 《없앴다》던 외삼촌 사진과 어머니네 3자매가 찍은 사진이며를 우리한테 보여주시면서 《외할머니의 사진도 한장 있었는데…》하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우리는 그 말을 그저 흘려보냈었다. 오늘에 와서 우리 형제는 그 손톱눈만한 사진이 바로 어머니가 문화대혁명시기 외가편 《위험소재품을 없애》려다 다시 감춰둔 외할머니의 사진이 아닐가 하고 추정해본다.
어머니는 평생 말수가 적었다. 미술을 좀 알고 검찰원 기술처에서 일한다는 나한테 얼굴 반쪽만 보고 원상 복구해 그릴수 있느냐고 물은적 있는 어머니가, 그 타다남은 반쪽 사진을 보고 외할머니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으로 록음테프와 함께 손수건에 꽁꽁 싸두었던것이 분명했다.
그 손수건에는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산》- 어머니의 아픔과 그리움이 싸여있었고 간절한 기탁이 간직되여 있었다.
근거지를 지키고 동지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당신의 한몸을 불태운 외할머니, 그 재더미속을 파헤쳐 타다 남은 외할머니의 유해를 움켜쥔 어머니…
그 참상이 점점 또렷이 머리속으로부터 눈앞에 떠오르면서 나를 괴롭힌다. 그러면서 나는 무시로 밀물처럼 밀려오는 아픔과 두려움에 모대긴다. 어머니가 매양 이야기 뒤끝에 하시던 《그저 그렇게 그 땅에 묻혔구나, 나라도 가봐야 하는데…》 하던 말씀이 귀전을 때린다.
이제 우리세대까지 저세상으로 가고나면 외할머니나 외가편의 혁명이야기들은 세월속에 영영 묻혀지겠구나 하는 두려움과 긴박감에 나는 소스라쳐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아니 우리는 귀중하고 자랑스러운 력사를 그저 덤덤히 무심히 세월의 배에 흘려보냈던것이다! 또 지금도 계속 흘려보내고 있지 않는가!
어머니가 돌아가신후부터, 특히 퇴직후 나는 숙제를 채 못한 사죄 , 아니 숙제를 반드시 해내야 하는 각오로 연변도서관, 연변대학도서관, 연변박물관을 찾아가 조선족혁명사료들을 꾸준히 훑어나갔다.
또 연변대학 사학자 박창욱, 고영일, 권립, 흑룡강성당사연구소 전임 소장 김우중 등 조선족력사 전문가들을 방문하여 조선족항일혁명사료에 대해 자문, 학습하였으며 유관 사료 근 30권을 탐독했다. 그러면서 남겨놓은 노트만도 7,8책 된다.
70고개를 넘으면서라도 조선족항일사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할수 있어서 나는 그나마 다행스러워했다. 비록 사료들에서 외할머니 명함 석자도, 그리고 외가편 다른 어느 항일혁명자들의 이름석자도 찾아볼수는 없었지만 나는 외할머니를 비롯한 외가편 렬사들의 혁명발자취를 력력히 훑어나갈수 있었다. 외할머니와 외가편의 항일이야기는 거창한 조선족혁명력사의 하나의 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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