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새벽 서울 가리봉동 남구로역 앞 인력시장에서 일감을 찾던 중국동포(왼쪽)가 한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도림로 건너편 휴대전화 매장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도로는 인력시장의 중국동포와 한국인 노동자를 나누는 경계선이 됐다.
[르포] ‘또 하나의 국경’… 남구로역 앞길엔 ‘두만강’이 흐른다
두만강(豆滿江). 백두산을 출발해 동해로 흐르며 한반도와 중국의 경계를 이룬다. 조선족 중국동포들은 할아버지가 이 강을 건너 중국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두만강을 할아버지가 살았던 한국 땅과 내가 살고 있는 중국 땅의 상징적 경계로 여긴다. 어렵게 한국 비자를 받아 서울로 일하러 갈 때 “두만강을 다시 건넌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동포가 주로 정착하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이곳에도 ‘두만강’이라 불리는 경계선이 있다. 19일 새벽 4시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앞은 일자리를 찾으려는 이들로 북적였다. 매일 이 시간에 인력시장이 열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남구로역 앞 왕복 4차로인 ‘도림로’를 사이에 두고 두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도림로 동쪽 하나은행 구로동지점 앞은 중국동포가, 서쪽 휴대전화 매장 앞은 한국인 일용직 노동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양쪽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하나은행 앞은 눈치싸움이 치열했다. 쌀쌀해진 새벽 날씨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어디선가 일꾼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들리면 재깍 반응했다.
새벽 3시30분부터 하나은행 앞에서 일거리를 찾던 원모(53)씨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동료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동료들이 다가가자 중국어로 자신이 얻은 정보를 전했다. 다른 팀에서 3명 정도 추가 일꾼을 찾는데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는 거였다. 순간 중국어와 한국어가 뒤섞이며 이들은 분주하게, 그러나 남이 눈치 채지 못하게 짐을 챙겼다.
반면 휴대전화 매장 앞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큰 업체는 주로 이쪽에서 한국인 노동자를 찾는다. 개인 사업장이나 영세한 업체가 찾아가는 하나은행 쪽보다 일당도 많다. 일자리를 찾은 사람, 허탕 친 사람이 다 떠나도 한국인 노동자는 몇몇이 꼭 남아 있다. 아침에 현장에서 급하게 한국인 인력을 찾는 전화가 걸려오곤 해서다. 한 인력사무소장은 “큰 기업일수록 중국동포보다 한국인을 원한다”며 “중국동포에게는 이 쪽이 부러움의 대상이자 원망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새벽 4시30분이면 인력시장 노동자들을 위해 구로구에서 운영하는 ‘밥차’가 도착하는데, 휴대전화 매장 앞에 선다. 그 시간에 아침을 챙겼을 리 없는 노동자들이 밥을 먹으러 몰려들지만 중국동포는 거의 없었다. 길 건너편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도림로를 건너지 못했다. 그렇게 밥을 먹으러 갔다간 일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중국동포 이모(61)씨는 “밥차 시간이 딱 우리가 일자리 찾아 현장으로 떠날 때”라며 “저 친구들(한국인 노동자)은 밥 먹고 있으면 대기업 같은 데서 데려가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놓치면 하루를 허탕친다”고 했다. 이씨는 “이쪽 사람(중국동포)이 저기(휴대전화 매장 앞)로 가면 중국동포 사이에서도 눈치를 준다. 그만큼 이 도로에 파인 골이 깊다. 우리는 (도림로를) 두만강이라 부른다”고 덧붙였다.
중국동포를 바라보는 한국인 노동자의 시선도 결코 곱지 않았다. 일자리 부족을 중국동포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모(57)씨는 “일용직 일이 많지 않다. 불법체류자들이 자기들끼리 차 몰고 다니면서 일을 다 채간다”고 했다. 김모(43)씨도 “중국동포는 한국에서 돈 벌어 돌아가면 아주 잘 산다더라”며 “난 한 달 내내 일해도 생활비 병원비 내면 남는 게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동포도 이런 시선을 잘 알고 있다. 중국동포 권모(61)씨는 휴대전화 매장 쪽을 바라보며 “저들과 우리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란 인식이 강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경계를 넘어서고 싶어 한다.
황모(61)씨는 2008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서울에 온 중국동포가 아니라 한국인이 되려고 국적을 취득했다”고 했지만 여전히 하나은행 앞에서 일감을 찾고 있었다. 휴대전화 매장 쪽에는 그에게 일을 주려는 사람이 없어서다. 이날 결국 일감을 얻지 못한 황씨는 마지막 승합차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래도 난 저들 세계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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