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 옌볜조선족자치주가 있는 지린(吉林)성을 비롯해 헤이룽장(黑龍江), 랴오닝(遼寧)성 등 중국 동북 3성의 조선족 마을이 공동화 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183만 명의 조선족 가운데 한국, 일본, 중국 내륙 도시 등지로 빠져나간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합니다. 농촌마다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고 조선족학교가 속속 통폐합되면서 조선족 사회가 붕괴하고 우리말 교육의 명맥이 끊어지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재외동포재단의 지원을 받아 중국 동북 3성을 밀착 취재함으로써 위기 상황에 놓인 조선족 사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변화의 흐름을 조망하는 한편 발전 가능성을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선양·옌지=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한·중 수교와 도시화·세계화로 흐름 속에 중국 조선족 사회는 격변의 중심에 놓여 있다.
전통적 거주지에서 절반 이상의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지역 공동체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소수민족보다 발 빠르게 경제적 부를 축적해 새로운 도약기를 맞고 있다는 상반된 분석도 나오고 있다.
헤이룽장성에는 1995년 491개의 조선족 마을이 있었지만 2007년 233개에 불과해 절반 이상 줄었다. 랴오닝성도 비슷한 시기에 조선족 향(鄕)·진(鎭)이 12개에서 2개로 감소했다. 중국 행정구역 단위는 성(省)·주(洲)·현(縣)·향·진의 차례이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사는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의 경우에도 조선족촌이 25개나 줄었다. 현재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게 공통된 인식이다.
◇ 선진 농촌 '만융촌'의 빛과 그늘
만융촌(滿融村)은 225만 평의 땅에 1천700여 가구 6천500여 명이 사는 조선족 제일의 번성한 마을이다.
1934년 중국 랴오닝성 선양(瀋陽)시 남부 교외에 터를 잡은 이 마을은 한·중 수교로 대부분의 농촌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늘어나 가장 선진적인 모델로 평가받아 왔다.
시 외곽의 도농(都農) 접점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과 교통이 편리한 이점을 살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800가구에 불과하던 마을 규모를 갑절 이상 늘렸다. 조선족 농촌의 공동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하는 상황에서도 만융촌은 다른 지역 조선족의 유입이 이어져 주목을 받았다.
하나둘 마을 공동체가 없어지는 공동화의 물결이 만융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달 중순 이곳을 찾았다.
'만융조선족촌'이란 입구 간판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아스팔트 포장의 중앙 2차선 대로가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와 상가를 비롯해 병원, 은행, 식당, 마트, 파출소 등이 늘어서 그야말로 작은 도시를 방불케 했다.
옥문산(62) 촌장은 "80년의 역사를 지닌 만융촌은 2009년 중국 정부로부터 '전국문명촌'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농·공·상이 공존하고 있다"며 "곡물 경작지 외에도 '선양만융경제구'를 설립해 현재 80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고 소개했다.
드넓은 곡창지대와 공업단지가 함께 있는 이 마을은 자동차로 둘러보는 데도 30분 이상이 걸질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 95% 이상의 촌민이 아파트에 입주하고 있다는 설명에 '과연 조선족 제일촌'이란 말이 저절로 나왔다.
"지역에서 어떤 평가를 받아왔느냐"는 질문에 옥 촌장은 "농촌 발전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알려져 외국에서도 견학을 오곤 했다"면서 "10여 년 전만 해도 만융촌에 살면 '장애인 남자도 사지가 멀쩡한 여성과 결혼할 수 있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자랑했다.
'(재화가) 가득하고 창성하다'는 뜻의 '만융'은 일대에서는 부의 상징으로 '브랜드화'됐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실제로 마을 주변의 한족 아파트는 모두 '만융'이라는 이름을 앞에다 붙여 '만융○○아파트'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요즘도 여전히 인구가 유입되고 성장하고 있느냐"고 묻자 촌장은 어두운 낯빛을 지으며 한숨부터 쉬었다.
"2005년부터 한국과 중국 내륙 도시로 젊은 층이 빠져나가기 시작해 절반 정도 남았습니다. 새로 유입된 한족 인구까지 포함하면 조선족 인구는 더 줄어들었다고 봐야죠."
실제로 마을 중심부를 걷다 보니 만나는 주민은 대부분이 노인이거나 아이들로 젊은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옥 촌장은 "최대 700명에 달하던 조선족소학교의 학생이 이제는 100여 명으로 줄어 최근에는 한족 학생도 받고 있다"고 귀띔했다.
농사를 지을 인력이 마을을 떠나고 그 자리를 한족이 빠르게 메우고 있어 "한족과의 융화가 마을 운영의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고 덧붙였다.
만융촌은 위기 극복을 위해 외부 투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7월 29일부터 2일까지 열린 '한국 주간' 행사에 만융촌도 참여해 투자설명회, 한국 풍물 장터, 한식 시식회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70대 이상의 노인 400여 명을 위한 경로당 건설도 추진 중이다.
오는 9월 3일에는 충남 공주시 생활체육회가 방문해 생활체육 교류 행사의 하나로 '게이트볼대회'도 열 예정이다.
옥 촌장은 "타지로 돈 벌러 간 사람들의 송금까지 더해서 만융촌은 여전히 주변 마을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젊은 세대가 빠져나가 10년, 20년 뒤가 걱정"이라며 "투자 유치와 신규 사업 개발 등 변화를 통해 새로운 발전 모델을 제시한다면 제2의 도약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 통폐합되는 조선족학교 속출…민족 교육 명맥 단절 우려
농촌의 공동화 현상으로 가장 타격을 입는 것은 조선족학교다. 학생 수가 감소하거나 신입생이 끊기면서 문을 닫거나 이웃으로 통합되는 학교가 속출했다.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 옌지(延吉)시에서 만난 언론인 김명성(50) 조선족중학생보 대표는 "40만 명에 달하던 동북 3성의 중·고등학생이 중국 내륙 도시와 한국으로 떠나 2만 3천여 명만 남았고, 전체 조선족학교의 60%가 폐교되거나 한족 학교에 통합돼 민족 교육이 위기"라고 심각함을 전했다.
주로 농촌 단위에 있던 조선족소학교는 더 심각하다. 촌 단위 학교는 거의 없어지거나 하나로 통합된 상황. 그나마 한족 인구가 유입된 지역에서는 한족 학생을 받아 명맥을 유지하는 실정이다.
김 대표는 "1천 명이 넘던 학생이 50∼100명으로 줄어들자 고육지책으로 한족 학생을 받아들기 시작했고, 그 숫자가 더욱 늘어나 이제는 중국어로 수업하고 한국어(조선어)는 교육 과목으로만 남은 학교도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린성 강밀봉진 조선족소학교에서 23년째 재직 중인 김춘금 교사는 "강밀봉진의 5개 촌에 있던 소학교가 하나로 통합됐고 그나마도 숫자가 줄어 지금은 학생이 12명에 불과하다"면서 "교육의 질은 더 좋아졌지만 학교를 지키려면 신입생이 계속 들어와야 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재한동포교사협회의 문민 회장은 "학생들이 빠져나가면서 1천500여 개에 달하던 조선족중학교가 이제는 10분의 1도 안 되는 137개만 남은 상황"이라며 "중국 내륙 도시로 이주한 자녀는 한족학교에 다니다 보니 우리말과 문화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최근 한국으로 들어오는 조선족 청년들이 우리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 보니 한족 취급을 받는 일도 생깁니다. 한족학교에 다니다 온 학생들은 한국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낙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 동북 3성 조선족 마을 현황' 연구서를 지난해 펴낸 곽승지 연변과학기술대 교수는 "1990년 중후반부터 산업화와 도시화로 농촌 마을 인구가 급격히 감소해 학교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학교 감소가 한국 이주를 더 촉발했다"면서 "그나마 남아 있는 학교도 한족학교화하는 상황에서 민족 교육을 유지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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