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자기 자신의 족속인 '조선족'을 알고자 20여년간 중국 대륙의 방방곡곡을 뛰어다니며 그 동안 찾아서 보고들은 이야기들로 '대륙의 해를 쫓는 박달족의 이야기', '연변 100년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용두레 우물에 묻힌 고구려 성곽', '조선족, 중국을 뒤흔든 사람들' 등 '조선족 바로 알기' 테마의 도서를 잇달아 펴내고 있는 현역기자 베이징 김호림 작가, 그 행보가 오늘도 본지의 신년 기획연재로 이어집니다.
"산동의 5백년이 넘는 한 한족마을은 취재하며 이런 생각이 피끗 머리를 스쳤습니다. 왜 한족마을들은 오랜 세월동안 보존과 전승이 가능했을가? 왜 우리는 이렇게 떠돌이 인생일까? 그리고 점차 사라져가는 조선족마을들을 보며 그 옛날 옛적의 우리마을들도 이렇게 사라지고 흔적만 남고, 또한 흔적조차 사라졌구나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울컥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 그 흔적들속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또한 관내 새롭게 생긴 '우리동네'들의 지금 모습들을 향토지처럼 기록 하는것도 아주 의미있는 일이겠다는 생각…. " 작자와 편자 사이의 이런 대화가 이번 기획연재로 이어지는 계기라 하겠습니다.
지난해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연 27편 연재를 이어 새해 베이징 김호림 작가는 '옛 마을 새 마을, 전설은 이어진다'는 기획연재로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피우던 날부터 오늘날까지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쌀의 뉘처럼, 모래속의 보석처럼 대륙에서 띄엄띄엄 살아가던 우리들의 유전자를 찾아보는 이야기를 격주로 전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애독을 기대합니다.
--편집자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박씨는 1800년 전에 벌써 대륙의 오지에 왕으로 출현하고 있었다. 건안(建安) 20년(215), 파이(巴夷)의 왕 박호(朴胡)가 파이(족)를 데리고 귀화했다고 '삼국지·위지(三国志·魏志)'가 기록하고 있는 것. 모든 박씨는 신라의 첫 임금 박혁거세를 유일한 시조로 받들며 김씨, 이씨와 더불어 반도 3대 성씨의 하나이다. 그런데 신라에서 출현한 이 박씨가 문득 사천(四川) 남서쪽 지역의 웬 마을 종족에게 우두머리로 등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신라인들은 이 무렵 벌써 대륙에 대거 상륙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들은 연해 일대에 신라촌과 신라방(新羅坊) 등 신라인의 마을을 세웠다. 대륙의 남부에는 신라현(新羅縣)이라는 이국적인 행정지명도 나타나고 있었다. 삼국시기, 신라는 물론 고구려와 백제에도 상업 내왕과 유학 그리고 전란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대륙에 이주하고 있었다.
반도의 상징적인 성씨인 박씨는 훗날에도 계속 대륙에 등장한다. 고려 때의 환관 박불화(朴不花)가 '원사(元史)'에 의해 원(元)나라 조정이 있는 북경에 나타나고 또 조선의 여성포로 박단용(朴丹容)이 이조실록(李朝實錄)에 의해 명(明)나라 말의 요동(遼東)에 그의 행적을 남긴다.
대륙에 살던 박씨는 진작부터 족명(族名)을 달리 불리고 있었다. 이조실록에도 "요동의 한인(漢民) 박우(朴右)…"라는 옛 기록이 나오고 있다.
실제 이런 박씨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현지의 다른 민족과 동화 되었던 것이다. 멀리는 그만두고서라도 명나라 말, 청(淸)나라 초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하북성(河北省)에 안착했다고 전하는 조선인 후예의 박씨도 그러하다. 20세기 80년대 하북성에서 민족 성분을 확인할 때 일부 조선인 후예는 족명을 조선족으로 개명했지만, 대부분의 족명은 한족으로 되었고 심지어 만족으로 그냥 남아 있는 것이다. 무슨 민족으로 불리든지 그들은 동성끼리 통혼하지 않는 등 습속을 제외하고 모두 한족과 다름이 없다. 우리말이나 우리글을 전혀 모르며 모두 한어와 한자를 통용한다. 성씨가 박씨이고 또 마을 이름이 박씨 성을 따서 그 씨족의 뿌리를 알리고 있다. 그러나 하북성의 박씨를 기어이 조선족이라고 지칭한다면 별종의 조선족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이런 조선족은 당산(唐山)과 청룡(靑龍), 관성(寬城) 등 여러 지역에 집거(集居) 혹은 잡거(雜居)하는 7개의 촌으로 집중, 분포한다고 하북성의 지방지(地方志)가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고 박씨는 성씨나 마을 이름에만 그들의 유전자를 남긴 게 아니다. 하북성의 박씨촌은 또 족보에도 그들의 유전자를 또렷이 남기고 있다. 청룡 부근의 박장자(朴杖子)에는 아직도 이름 돌림자가 내려오는데, 기자가 현지를 답사하던 2007년 그 무렵 족보에 14대손을 잇고 있었다. 돌림자는 가문을 중요시하고 혈통을 지키던 선조들이 같은 씨족임을 알리기 위해 이름에 쓰던 것이다. 이 돌림자는 3백여 년 전, 요녕성(遼寧省) 지역에 이주했던 박씨의 돌림자와 거의 일맥상통한다고 연변의 한 사학자가 기자의 인터뷰에 밝힌 적 있다.
기왕에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옛날 요녕성 지역에는 박씨는 물론 김씨, 최씨, 백씨 등도 있었다고 민국(民國, 1912~1949) 초기의 '수암현지(岫岩縣志)'가 밝힌다. 수암은 반도와 근접하고 있는 요녕성 남부의 지역이다.
미상불 수암이 아닌 다른 지역에도 박씨 아닌 다른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청나라 때 천진(天津)의 소금장사 안기(安岐)도 조선인의 후예라고 전한다. 안기는 한때 청나라 고종 건륭(乾隆, 1736~1795) 황제가 구입했던 고화(古畵)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의 주인으로 있는 등 집안의 막강한 재력을 주물러 그의 서화 흠상취미를 마음껏 누리던 유명한 고서 수집가였다.
아쉽게도 실명의 이 안씨 역시 여느 무명인처럼 뿌리가 어딘지 근원을 알 수 없다. 종족 군체를 이룬 하북성의 박씨도 어디선가부터 문득 뿌리가 끊어지고 있다. 족보에 기록된 제1대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일부는 전란에 의해 위해 대륙에 왔으며 또 일부는 만주 8기를 따라 장성을 넘었다고 한다. 3백 년 전의 박씨가 그러하거늘 하물며 일찍 1천 년 전 하북 지역을 비롯하여 대륙의 방방곡곡에 이주했던 신라인은 더 말할 데 있으랴. 문헌상으로 성씨와 이름을 일일이 고증할 수 있는 대륙의 신라인은 아주 드물다.
어쩌면 역사의 윤회에서 반복되는 업의 굴레를 쓰고 있을까. 청나라 말, 식량난을 피해 많은 조선인이 쪽박을 차고 강을 건넜다. 일제 강점기, 탄압을 피해 동북 지역을 찾은 정치 이민자와 강제개발 이민자도 상당수 생겼다. 와중에 또 한패의 조선인이 산해관을 넘어 마을을 만들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20세기 40년대 중반까지 중국의 조선인 인구는 216만 3,115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이 시기 조선인이 165만 8천명이었으며 이중 약 50만 명이 귀국했다는 다른 집계도 있다.
1952년, 이주한 조선인들의 집거지인 길림성 동부 지역에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설립, 뒤미처 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명하면서 중국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조선족'이라는 족명으로 공화국의 일원으로 된다.
그때 그 무렵 건설과 개간, 지원 등을 위한 조선족 인구의 이동은 대륙의 여러 지역에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문화예술. 과학, 군사, 체육, 보도 등 부문에 거국적으로 많은 인력이 투입, 이에 따라 동북의 유수의 조선족 인력이 산해관 남쪽에 진출했다. 이때 조선족은 전국 각 지역에 그 우수성을 '진달래꽃'처럼 방방곡곡에 날렸지만, 아직 조선족 인구의 신구(新舊) 거주지에 판도를 바꿀 정도로 급격한 요동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동북 지역을 벗어나 산해관 남쪽에 문득 나타난 '조선족촌'은 기이한 현상으로 회자되었다. 그때 조선족이 산해관 남쪽에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한 것은 북대하(北戴河)의 이 조선족촌이 처음이었고 유일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부터 동북 여러 지역 조선족의 새로운 인구유동이 대거 시작되었다. 이 인구 유동은 농경사회에서 도시화로 이전하는 데서 생긴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궁극적으로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인구는 전국의 평균 수준의 30%보다 훨씬 높은 54.6%로 100만 명에 이른다고 2010년의 제6차 인구전면조사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반면 조선족의 농촌 인구는 향과 진을 포함, 무려 35% 남짓이 줄어들었다. 참고로 이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조선족 인구는 183만 929명(호적인구)에 달한다. 한편 급감하는 출생율은 조선족 거주지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에너지'가 되었다. 2010년, 조선족 어린이의 인구비중은 한족의 절반에 불과한 8.4%였으며 그해 신생아의 인구가 고작 9,411명이었다.
이런 인구의 유동과 급감으로 인한 조선족사회의 '진통'은 금방 나타나고 있었다. 고향 마을을 떠나 타지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은 더는 개체가 아닌 군체(群体)로 되고 있으며 지어 군락(群落)을 집성(集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민족이 잡거하는 도시와 농촌에 북대하의 조선족촌처럼 새로운 조선족 '마을'이 새롭게 형성된 게 아니다. 대신 기존의 마을 공동체가 연이어 무너지고 사라지면서 조선족마을 같은 공동체 생활 때문에 가능했던 정체성과 민족문화의 보존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사람이 살던 옛 마을이 유실되면서 토장의 훈향이 풍기던 마당과 할아버지가 대통을 털던 마루턱, 애기가 쫄래쫄래 기어 다니던 토방의 옛 추억으로 멀어가고 있다. 언제인가는 우리가 살던 오늘의 그 마을도 옛날 옛적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전설 같은 마을의 옛 이야기를 찾아 우리의 모습을 읽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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