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뭐 북방의 철새처럼 만리장성을 건너 오셨나?"
북대하(北戴河)의 근처에 나타나는 조선족마을에 호기심이 부쩍 동한다. 정말이지 북대하가 중국 최대의 휴양지라고 해서 언제인가 동북의 조선족들이 대량 이주하여 이 마을을 이뤘을까.
북대하는 하북성 북단의 해변 마을로, 청나라 때 강물이 대(戴)씨 집의 산을 흘러 지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약 5년 전, 관방 신문 《인민일보》는 북대하의 조선족마을을 화북 지역 언어문화의 '외로운 섬'이라고 하는 내용의 기사로 올린 적 있다. 조선족들이 집거한 이 마을은 장장 70년 동안 주변 한족 동네의 포위에 쌓여 있다는 것.
잠깐, 그때는 북대하가 아니라 서쪽 무녕현(撫寧縣)의 서하남(西河南) 조선족촌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북대하에는 불과 20리 정도 상거한 마을이니 진작 무녕현의 성씨를 바꿔버릴 법 한다. 실제로 북대하 기차역에서 택시에 오른 후 얘기를 몇 마디 나누기 전 조선족촌 어귀에 당도하고 있었다.
택시가 차를 멈춘 것은 북적이는 인파로 길을 메운 서하남의 마을 장터 때문이었다. 재래 장이었는데 아침에 해가 뜨면 웅기중기 모였다가 점심에 해가 중천에 오르면 구름처럼 흩어진다고 한다.
서하남의 재래 장터, 이 근처에 조선족촌이 있다.
문득 장터의 어디선가 귀 익은 말소리가 들렸다. "자야, 마이 기다린나?" 경상도 말투의 아줌마 두셋이 좌판에 둘러서 있었다. 뒷이야기이지만, 조선족마을에는 평안도와 함경도 태생의 사람들도 있으나 경상도 출신의 사람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촌민 정성수씨가 말했다. 장성수씨는 촌민위원회 부근의 농가를 찾아 만난 마을의 오랜 토박이다. 정성수씨는 1959년에 대륙 북쪽의 흑룡강성 치치하얼(齊齊哈爾) 부근에서 이곳에 이주를 했다고 한다.
"그때 외삼촌이 여기에서 살고 있었는데요,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얘기했지요."
농가에서 만난 마을 토박이 정성수씨.
이 고장은 날씨가 따뜻하고 우량이 충족한데다가 무상기가 240일이나 되어 그야말로 흑룡강성 오지의 마을이 비할 수 없는 곡창이었다. 게다가 북대하는 청나라 때부터 해변을 끼고 있는 휴양명소로 주변 환경이 일품이었다.
정성수씨의 외삼촌은 일찍 1952년 이 마을에 행장을 풀었다고 한다. 그때 요녕성의 개원(開源), 창북(昌北) 등 지역에서 이씨 등 성씨의 조선족 14개 가구 55명이 이곳에 이주했다. 마을 어귀에 세운 비석에 따르면 서하남의 조선족촌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사실 조선족 농부들이 최초로 목적한 선착지는 북대하가 아니었다. 그들은 원래 북대하를 지나 남쪽의 천진(天津) 녕하현(寧河縣)의 노태(盧台)농장을 목적지로 삼았다고 정성수씨가 말한다. 일찍 1936년, 일본군은 녕하 지역에 '군곡(軍谷)회사'를 설치하고 땅을 강매(强買)하였으며 일본과 조선에서 이민을 데려다가 노태농장을 세웠다. 이때 농장에 1천여 가구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정성수씨가 옛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실제로 녕하현 사람들은 농장에 조선인이 군집하고 있다고 해서 농장을 일명 '고려의 울타리(高麗圈)'라고 불렀다고 한다. 노태의 논은 해마다 눈덩이처럼 늘어났으며 계운하(薊運河) 양안의 논 면적만 해도 26만무 되었고 곡물 소득은 무려 300만㎏에 달했다고 1990년대의 《녕하현지(寧河縣志)》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0여년 후 장성 저쪽에서 개척민들이 다시 찾아오던 1952년 노태농장에는 벌써 조선인이라곤 살지 않고 있었다. 정성수씨는 1945년 광복(8.15) 후 조선인들이 잇따라 농장을 모두 떠났다고 말한다.
《녕하현지》에 따르면 그 후 전란으로 하여 논이 황폐화되고 수리시설이 파괴되었다. 공화국 정부에서 농부를 모집, 농장을 재건한 것은 195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옛 마을의 옛 이야기는 더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부근 당산(唐山) 대지진으로 노태의 옛 시설이 철저히 파괴되었고, 옛날 노태농장에서 살던 노인들이 거의 다 사망했기 때문이다.
"옛 사람과 옛 땅을 찾아서 노태농장에 왔다가 부득이 여기(북대하)에 들린 거지요."
그때 조선족 농부들이 북대하 지역을 찾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찍 1939년 박씨 성의 형제가 친구의 소개로 서하남 일대에 발을 붙인 적 있었다. 이 두 형제가 벼농사에 성공하자 그해 겨울과 이듬해 봄 동북에서 박씨, 김씨, 최씨, 우씨, 황씨 등 30여 가구의 친척과 친구가 이 지역에 이주, 거주했다. 나중에 그들이 가꾼 논은 무려 1,843무 되었다고 《무녕현지(撫寧縣志)》가 기록한다. 그들 역시 노태농장의 조선인처럼 광복 후 가산을 처분하고 전부 조선반도에 돌아갔다.
그때까지 서하남의 현지인들은 아직 벼농사에 숙련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지의 땅이 밭농사에 적합한 게 아니었다. 속칭 염지(鹽地)라고 일컫는 바다 연해의 알칼리성 토지였다. 조선족 농부가 현지의 땅을 쉽게 매입, 개간할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조선인이 이주한 후 논은 다시 황폐화되었으며 1949년 당산 지역의 농장에 징수되었다.
정성수씨의 가족이 서하남에 올 무렵인 1959년 초 조선족 37가구 183명이 서하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시초의 1952년 봄부터 조선족촌의 인구 숫자가 촌사(村史)에 들쑥날쑥 등장하는데, 이것은 원체 조선족 인구의 유동성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지 한다. 1953년 2월경, 요녕성과 길림성, 내몽고 등 지역의 조선족 36가구 138명이 집단적으로 서하남에 이주했다. 그러나 현지에서 논의 수원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한순간 궁지에 빠졌다고 한다. 이로 하여 그해 여름 34가구가 원적지로 돌아갔고 2가구가 연말에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조선족 농부들은 곬을 만들고 염지에 물을 넣어 소금기를 씻어냈으며 밭에 두렁을 만들어 두 뙈기 세 뙈기의 논을 풀었다. 뒤미처 동북 3성과 내몽고 지역에서 조선족 농부가 소식을 듣고 비옥한 농토를 찾아 북대하에 찾아왔다.
"처음에는 두세 가구씩 흩어져서 부근 동네에 한족들과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정성수씨는 조선족 농부들이 그들끼리 촌락을 이룬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1954년, 북대하의 조선족 농부들은 초급사를 설립, '녕선사(寧鮮社)'로 명명하며 1959년 '수전(水田) 전문대대'로 개명한다. 1984년, 대대의 편제를 취소하고 정식으로 서하남 조선족촌으로 정명(正名) 한다. 마을 비석에 새김을 한 촌사(村史)의 약지(略誌)이다.
《인민일보》에 기사를 게재할 무렵 조선족촌은 156가구의 513명에 달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조선족 본 민족 내부의 풍속 습관을 지키고 있어서 조선족 언어문화를 완정하게 유지하고 이로써 조선족 민족성분의 단일하고 절대적인 관계를 보증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조선족마을은 서하남의 장터에 이웃, 마을 어귀의 벽과 거리에 씌어있는 조선족 글의 환영 문구 등으로 이색적인 정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하북성 지역에는 북대하 서하남의 조선족촌을 비롯하여 조선족 집거촌이 공식적으로 무려 8개 되지만, 이처럼 조선족 언어문자와 풍습이 남아있는 마을은 이 서하남의 조선족촌이 유일하다.
산해관(山海關) 남쪽 오지의 이 외로운 섬에도 도시화의 바람과 한국 출국 붐은 예외가 아니었다. 현재 140가구의 450여명 인구가 살고 있으며, 5,60명의 노인이 마을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호적상으로는 타민족을 한 가구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서 그나마 조선족마을이라는 명맥을 계속 잇고 있는 것이다.
"마을의 논은 1,200무 정도 되는데요, 이웃이 한족이 땅을 다룬지 오랩니다."
정성수씨는 거의 노인들만 마을에 남아있는 상황이이서 논을 부칠 수 없다고 이유를 말했다. 지난해(2016) 조선족 한 가구가 논 100무를 경영하면서 조선족촌의 또 하나의 '외로운 섬'으로 되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소학교의 일각, 마침 토요일이여서 운동장이 휑뎅그레하다.
'조선족학교'라고 하는 마을 근처의 '북대하신구 조선족소학교'의 조선족학교 역시 '외로운 섬'이었고, 학교의 조선족은 더구나 '외로운 섬'의 고독한 '등대'였다.
지난 세기 40년대, 서하남 최초의 조선인들은 학교를 세우지 않았고, 자식들을 부근 창려(昌黎)의 현성 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조선족학교는 1957년 현지의 무녕현 서하남소학교에 부설한 조선족반으로 시작되었다. 교장 김진일씨의 말에 따르면 조선족소학교는 마을에 조선족이 아주 흥성하던 1963년에 정식으로 설립했다. 김진일씨는 이 조선족소학교의 제4대 교장이었다. 그 역시 정성수씨처럼 경상도 출신이며 또 조선족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예전에 우리 학교의 교원과 학생은 전부 조선족이었지요."
1988년 말, 조선족소학교에는 6개 학급의 6개 수업반이 있었으며 재학생이 60명 되었다.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족소학교의 통용 교과서를 사용했다. 연변의 여느 조선족학교처럼 서하남조선족소학교도 지난 세기 7,80년대 전성기를 이뤘고 90년대부터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김진일씨는 현재 학생이 무려 320여명이지만 조선족은 8,9명뿐이며, 학교 유아반에는 원생이 약 150명이지만 조선족은 5명뿐이라고 말했다.
그럴지라도 조선족소학교 교정에는 아직도 '조선말'이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명칭이 '조선족학교'라고 1주 2교시의 조선어과를 설치, 한족과 조선족 학생이 함께 수업을 받고 있었다.
김진일씨는 수업 내용을 얘기하면서 막무가내의 표정을 짓는다. "교수 시간이 적어서 조선어문을 애들에게 외국어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졸업할 때 '조선 글'이 뭔지를 해득할 수 있는 정도이며, 조선 글의 신문을 독파할 능력까지 이르기 힘들다고 한다. 북대하의 '외로운 섬'은 언제인가부터 바다에 침몰되고 있는 것.
신나채 마을 어귀에 세운 표지석, 하필이면 마을 이름이 떨어져 있다.
얼마 전 북대하를 답사하면서 들렸던 부근 노룡현(盧龍縣)의 신나채(新挪寨)가 새삼스레 눈앞에 떠올랐다. 신나채 역시 이름 그대로 조선족촌처럼 새로 옮겨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 주변에 분산되어 있던 촌락을 재차 이동하여 한데 합쳐 놓았으며 이로 하여 신나촌이라고 불린다고 마을의 석비가 분명하게 적고 있다. 현지(縣志)는 이 마을에 이동했던 주민의 신분은 고구려인이라고 낱낱이 밝힌다. 신나채는 그때 당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어명으로 지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석은 '고구려' 이름 두 글자를 빠뜨렸으며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원주민의 정체를 감감 모르고 있었다.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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