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할 때 ‘본관’ 증명자료 없으면
국내 주소 등으로 새 본관 만들어
“조상이 물려주신 한국 이름이 버젓이 있는데 ‘콴 찌윤’이라니요”
중국동포들이 구독하는 한민족신문의 전길운 대표가 지난 19일 자신의 옛 거소신고증을 보여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동포들의 신분증 역할을 하는 거소신고증에 적힌 그의 이름은 ‘QUAN JIYUN’이다. 전길운을 중국식 발음인 ‘콴 찌윤’으로 읽은 후 이를 영문 표기한 거다. 전 대표는 이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거소신고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서울 대림동을 중심으로 한 중국동포 사회에서는 이름 때문에 한숨짓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전 대표는 “신문사로 들어오는 이름 표기 관련 민원만 한달에 12건이 넘는다”고 말했다.
◇“한글로 읽으면 자연스러운데 왜 영어인가요?”
중국동포들은 조상에게서 받은 2~3자 짜리 한자 이름이 있다. 거소신고증을 발급하는 법무부에서는 이를 외국인 성명 표기법에 따라 중국식 발음으로 영문 표기한다. 2014년 국적을 취득한 남명자(60)씨는 “귀화하기 전 관공서나 병원에 가서 거소신고증을 내면 꼭 한글 이름을 다시 물었다. 내 발음을 듣고 마음대로들 썼다. 한국식 이름이 있는데 왜 영문 표기를 해서 일을 만들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고 말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라고 읽는 걸 동포는 '리'라고 읽는 경우 등이 있어 아예 영문으로 표기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진영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를 “행정편의주의적인 해명이다”고 비판했다.
전 대표가 국적을 취득하기 전 사용하던 거소신고증. 김나한 기자
◇주민등록증 본 은행 직원 단박에 “중국동포시죠?”
중국동포들은 국내에 5년 이상 체류 등의 조건을 갖추면 귀화할 수 있다. 귀화한 후에는 일반 한국인들처럼 주민등록증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들의 주민등록증에는 이름이 한글로만 표기돼 있다. 보통 주민등록증에는 한글 이름 뒤에 괄호를 치고 한자 표기를 함께 한다.
2004년 국적을 취득한 강생금(60)씨는 “은행이나 관공서에 가서 주민등록증을 내밀면 괄호 안 한자가 없는 것만 보고도 직원이 ‘아 동포분이시죠?’라고 묻는다. 내가 이 사회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그때 받는다”고 말했다. 주민등록증 발급 업무를 담당하는 자치구 관계자는 “중국식 한자와 우리나라 한자가 다른 부분도 있어서 한글 이름만 표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밀양 박씨인데 나는 영등포 박씨”
가문의 시조를 나타내는 성씨의 본은 행정당국도 난감해하는 중국동포들의 애환이다. 중국동포들은 대부분 자신의 조상들로부터 전해 들은 본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를 증명할 족보는 없는 경우가 많다. 전 대표는 “중국에서는 1966년부터 10년간 이어진 문화대혁명 당시에 중국동포들의 족보가 대부분 불살라졌다”고 이유를 말했다.
하지만 법원에서는 족보가 없이는 해당 본을 인정해주기 힘들다. 법원 관계자는 “족보가 없이 인정해주면 해당 가문에서 항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난감해 했다. 법원에서는 족보가 없는 경우 자신이 특정 본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미 있는 본을 피해야 하기 때문에 ‘영등포 정씨’, ‘구로 김씨’ 등 거주하는 지역을 본으로 추천한다.
전 대표가 서울남부지법에서 받아온 본 창설허가신청서.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본의 예시로 '구로''금천''영등포' 등을 들고 있다. 김나한 기자
전문가들은 유연한 행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한국에 들어온 중국 동포가 80만명을 넘었다. 대부분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있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일체감을 느끼고 적응하도록 행정적으로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