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의 궤적은 자치주의 길과 똑같습니다. 우리 동갑내기의 몸에는 자치주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묻어있어요.”
김학송 시인은 ‘자치주와 동갑’시리즈의 첫 취재대상이란 말에 무척 기뻐했다. 지난 6월 21일, 김학송 시인이 즐겨 찾는다는 자택 근처의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김학송 시인
“자치주는 저에게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나의 삶 자체를 안아주고 보듬어 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습니다. 자치주와 동갑인 덕분에 오늘같은 행운이 차례지는 일도 많았어요.”
김학송 시인은 1977년 장춘야금지질학교를 졸업하고 도문시석유공사에서 물가원으로 분배받았을 때 까지도 ‘시’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물가원이란 직업은 그의 취향이 아니였고 딱히 꿈도 없어서 꽤 긴 시간 동안 방황을 했다. 술 한잔을 기울이다가 무심코 떠오르는 시상을 몽당연필로 필기장에 적었는데 문학을 좀 아는 친구가 읽어보고는 시가 너무 좋다며 《연변문예》(《연변문학》의 전신)에 투고하라고 부추겼다.
당시 《연변문예》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조선어 문학지라곤 《연변문예》 하나였고 발행량이 8만 7000부였다고 한다.
“책 하나를 주변 사람들이 돌아가며 다 읽었으니 아마 구독자수는 20만 정도가 되지 않았을가요.”
70년대 말은 잃어버린 청춘과 잃어버린 꿈을 찾으려 시인, 작가들이 대거 창작에 뛰여든 시대였다.
“그때 김철, 김성휘, 조룡남, 리상각, 리욱, 박화, 리삼월… 정말 문학애호가들에겐 범접못할 시인들이 문단을 주름잡았어요. 르네상스였죠.” 하고 김학송 시인은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으로 끄적여본 시를 고이 접어 봉투에 넣고 8전짜리 우표를 붙인 후 봉투의 한 귀퉁이를 가위로 벴다. 그것은 내용물이 투고작품이라는 표시였다. 석현 우전국 앞에 있는 록색 우체통 앞에 설 때까지도 투고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리고 두달이 지난 10월의 어느날, 그에게 편지가 날아왔다. 봉투에 멋지게 손글씨로 적혀있는 《연변문예》라는 네 글자를 확인한 순간부터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김학송 동지, 작품 <시골에서>가 11월호에 실렸습니다.”하고 붉은 도장까지 박아서 보낸 채용통지서였다. 그의 첫 습작이자 데뷔작이였다.
“독서를 할 겨를도 여건도 없었던 시대였어요. 그러나 《모주석어록》과 《모주석시사》는 정말 닳도록 읽고 학습했었죠. 그것이 전부였어요. 저는 시대의 행운아였어요.”
월급이 27원이던 그 시절 원고비를 10원이나 받았다는 사실보다 대작가들이 용솟음치던 년대에 79쪽 짜리 《연변문예》에 자신의 처녀작이 비집고 자리를 차지했단 사실이 그를 더욱 흥분하게 했다.
1983년에 연변대학 부교장이였던 정판룡의 추진 하에 연변대학에서는 조선족 문학인재를 양성하는데 취지를 두고 작가양성반을 4년제 본과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연변작가협회 편집부의 추천을 받은 후 시험을 쳐야 했어요. 그렇게 동북 3성 23명 학생들로 구성된 조선족 최초의 작가반이 탄생했죠.”
그리고 김학송 시인은 작가반 학생중 첫 사람으로 1984년에 《연변문예》 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반을 졸업하고 도문시문화국 창작실로 배치받아 사업하다가 1992년에 《연변문학》 편집부로 자리를 옮겼다.
“도문과 연길의 차이를 실감했어요. 그때 사무실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한국 문학서적은 저에게 신세계였어요.”
그때 처음 뽑아들었던 한국의 유명 작가의 수필집은 김학송 시인의 창작의 길에 큰 영향을 줬다. 그후 김학송 시인은 해당 시인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1993년부터 약 2년간 한국에 체류했고 무려 13개의 작품집을 출판할 만큼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려갔다.
1995년에 귀국한 후 자유기고인으로 지내다가 1998년부터 201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연변가무단에서 전업작사가로 활동했다.
김학송 시인은 지금까지 작품집 30여부를 출간했고 그의 동시 <첫눈>, <봄비>, 장시 <혼의 노래>, 수필 <태산에 오르며> 등 16편의 작품이 중소학교 조선어문교과서 및 열독참고서에 실렸다.
2007년에 전국 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 자치주 창립 60돐 가요공모 1등상, 2015년 장백문화대상, 2020년 단군문학상을 수상한 외에도 지용문학상 등 우리 문단의 대다수 문학상을 수상했다.
“자치주 창립 초기인 지난 세기 5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시 창작의 전성기였어요. 그때는 시인도 작품도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수준 높은 시들이 많았어요. 반면 요즘에는 작품은 량산되고 있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어요.”
김학송 시인은 기억에 남는 시로 1950년대 황옥금이 쓴 서정시 <고향의 봄>을 꼽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시지만 고향 왕청을 쓴 이 시는 지금 읽어도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 체취, 정신면모가 무척 생동하게 안겨온다고 한다.
“황상박의 시 <꽃피는 공소부>도 좋았어요. 공소부라는 그 시대 특정된 산물, 모든 이의 삶의 모습이 집중된 곳을 생활맛이 짙게, 진솔하게 그렸어요.”
김학송 시인은 자신의 시도 대중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시가 되길 바란다. 요즘 일고 있는 시랑송의 붐을 타고 김학송 시인이 여러해 전에 창작한 시들이 다시 회자되고 있는 가운데 <나는 조선족이다>가 랑송인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5~6년 사이에 열린 전국조선족시랑송경색에서 해마다 그의 시가 가장 많이 랑송된 것으로 통계됐다.
“내 작품에 혼을 불어넣고 피와 살을 준게 자치주입니다. 1952년 생들은 특히 자치주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어요. 자치주 동갑내기들의 꿈은 자치주와 함께 영글어왔으니까요.”
글·사진 리련화 기자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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