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현공안국 교통결찰대대
차량관리중대 지도원 최광일
전국 제5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인민경찰' 시상식을 마치고 돌아 온 최광일(오른쪽 세번째)과 그의 부인
경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 안전을 수호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다년간 병마와의 싸움으로 검게 변색한 눈주위, 퉁퉁 부은 얼굴, 허나 아픈 사람 내색 하나 없이 시종 입가에 머금은 미소, 긍정적 에너지가 넘치는 말투, 지난 6월 30일 만난 왕청현공안국 교통결찰대대 차량관리중대 지도원 최광일(57세)의 첫인상이다.
1966년 왕청현 라자구진에서 태여나 경찰이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라며 그는 향후 꼭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인민경찰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1989년, 꿈에도 그리던 경찰복을 입게 된 그는 ‘일에 영원히 충성하리라’는 다짐과 함께 30여년간 경찰 사업에 심혈을 몰부어왔다. 1등공 1차례, 3등공 1차례의 영광을 지닌 그는 선후하여 ‘전국 제5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인민경찰’, ‘전국 공안계통 1급 영웅 모범’, ‘전국 공안기관 애민 모범’, ‘전국로동본보기’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았고 2017년에는 19차 당대회 대표로 당선되였다.
굳은 신념, 집요한 추구, 불굴의 의지, 뼈속까지 곧은 사나이, 그의 동료들이 최광일을 일컫는 말이다. 어떤 곤난에 맞딱드리던지 항상 전력을 다해 임무를 완성하고 사업에 대한 고도의 충성으로 인민경찰의 정치적 본색을 아낌없이 드러낸다는 그이다.
1995년 8월, 최광일은 도주한 범죄자를 검거하는 임무에 투입됐다. 범죄자와의 격투중 범죄자가 동료의 머리를 향해 쇠망치를 휘뒤르는 일촉즉발의 순간, 최광일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료를 밀어내고 맨팔로 쇠망치를 막아냈다. 범죄자를 완전히 제압한 후에야 그는 팔이 들어올려지지 않을 정도로 심한 타격을 입은 것을 알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동료는 “최광일이 나의 생명을 구했다. 나의 은인이다.”며 감격을 금치 못하군 한다.
2002년 8월, 마약단속 경찰직을 맡았던 최광일은 한 음식점 앞에서 두무리의 사람들이 손에 칼, 쇠파이프 등을 들고 싸우는 것을 목격하게 되였다. 무고한 시민들이 다칠 수도 있다고 판단한 최광일은 쏜쌀같이 달려가 ‘경찰이다. 칼 내려놔라”고 외쳤다. 리성을 잃은 악당들은 최광일을 향해 칼을 휘둘렀고 그는 전력을 다해 악당들과 싸웠다. 동료들이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여러차례 칼에 복부를 찔린 후였다. 창자가 드러나고 뜨거운 피가 온몸을 붉게 물들였다.
그 일에 대해 최광일은 “경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 안전을 수호하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책임입니다.”고 말했다.
폭풍우에도 끄떡없는 강철 같은 그에게 2012년 8월 청천병력 같은 일이 발생했다. 병원으로부터 중증 뇨독증을 판정받은 그는 일주일에 3차례씩 투석 치료을 받아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직에서는 그의 몸상태를 고려해 그를 교통경찰대대로 보내고 상대적으로 쉬운 일을 배치했지만 누구보다도 일에 대한 ‘집착’이 강한 그는 또 스스로 일을 찾아나서군 했다.
한번은 하루종일 업무에 집중하느라 동정맥루 수술 지혈대를 제때에 풀지 못했고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혈관이 막혀버려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일로 인해 그의 팔에는 두번의 대정맥루 수술로 생긴 자국이 곱지 않게 자리해있다.
그러던 2014년, 기적이 나타났다. 그해 10월,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지만 사업에 들인 노력을 인정받아 그는 전국 제5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인민경찰’ 수상식에 참여하게 되였다. 이번 시상식에서 주최측은 시상자를 특별히 그의 안해로 지정했는데 남편에게 상장을 건네면서 안해는 이같이 물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었인가요?"
“나의 소원은 내가 퇴직하는 그때 까지, 딱 60세까지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소.”
그가 답하자 안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저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소원이예요.”
방송으로 이 장면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절강대학부속제1병원 지도자들은 공안 부문에 련계를 취해 최광일의 병을 치료해주겠다고 지원했다. 이듬해 그는 두차례에 거쳐 심장관상동맥우회술과 신장의식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1년간의 입원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 2개월 후, 적어도 반년은 휴식을 취하라는 의사의 만류에도 그는 또 ‘옹고집’을 부렸다. 그때부터 아침 7시면 어김없이 거리로 나와 교통상황을 정리하고 새로 입사한 새내기들에게 솔선수범하여 일을 가르치며 청년인재 배양에 힘쓴다고 한다.
“저의 두번째 생명은 당이 준 것입니다. 남은 시간을 알차게 리용해 사업에 더 큰 공헌을 하고 제가 받은 도움의 배로 사회에 환원해 당에 보답하렵니다.”
30여년간 완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인민경찰이라는 이름에 한치의 부끄럼없이 자신을 헌신했고 병마와 싸우면서도 연변의 사회안정을 수호하는 일에 전력을 다한 최광일, 그는 지금도 변치 안는 초심으로 사명을 실천하는 ‘길’을 오롯이 걷고 있다.
연변일보 전해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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