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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부치는 편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11월1일 09시54분    조회:4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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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엄마:    
 
엄마, 하늘나라가 있나요? 혹시 그곳에서도 이 못난 아들 걱정을 하고계시는것 아닌가요? 다들 시간이 약이라고 하건만 엄마가 우리곁을 떠난지 거의 2년이 돼가도 나는 아직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컥하고 눈시울이 젖어들어 필을 들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 막내아들이 저지른 불효때문인가 봅니다.    
 
내가 걱정돼서 제대로 눈 못 감으시고 돌아가신 엄마니까 항상 하늘에서 나를 굽어보시겠지요?    “엄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철 모르던 그때 나의 이 한마디 말이 얼마나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도려냈을가요? 어릴적엔 오른쪽 팔다리를 쓰지 못하니까 다른 애들처럼 뛰여놀고싶었고 애들이 놀리는것 같아서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을 말을 했었습니다.
 
엄마라고 나를 뇌성신경마비로 낳고싶었겠습니까? 다른 애들처럼 일찍 말하고 걷지 못하는 육중한 나를 엄마는 변변치 못한 갸날픈 몸으로 일곱살까지 업고 다니셨잖습니까? 그뒤로는 비틀거리며 걷긴 하여도 한쪽 지체를 잘 쓰지 못하다보니 저절로 옷 입고 머리 감고 목욕하는 너무나 사소한 모든 일상생활이 나에건 커다란 고민거리였고 갓난아이처럼 한시도 엄마의 손길을 떠날수가 없었습니다.
 
엄마는 행여나 내 병을 고칠 방도가 있을가싶어 없는 농촌살림에 재봉기술로 온동네사람들의 옷을 도맡아싶이 해주고 짬나는대로 새끼 꼬는 일을 해가면서 열심히 한푼두푼 돈을 모아서는 용하다는 명의들을 찾아 길림, 장춘, 심양, 북경 병원을 넘나들었습니다. 아직까진 이 병을 고치는 의술이 없다는데도 혹여 의술이 발달하여 이 병에 효험이 있는 방도가 나질상싶어서 말입니다. 그사이 마음고생인들 얼마나 하셨습니까?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하늘이 엄마를 조롱하듯 그토록 건강하시던 아버지까지 생산대나무를 운반하다가 차사고로 나어린 우리 4남매를 남겨두고 44세의 젊은 나이로 너무 일찍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세번이나 까무러쳤다가 겨우 깨여나는 엄마를 보고 마을사람들은 허약한 엄마가 혼자 우리들을 키우지 못한다면서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며 혀를 찼었죠.
 
그때 모두들 애들을 경로원에 보내라고 권했지만 엄마는 저 어린것들을, 더우기 저 불쌍한 애를 경로원에 보내고 어찌 발편잠을 잘수가 있냐며 절대 안된다고 하셨죠. 그때 어디서 그런 비장한 각오가 나오셨을가요? 엄마도 소아마비로 다리가 아프시잖아요? 성한 몸일지라도 이런 삶의 타격을 견디기 힘드시겠는데 철부지 자식들을 어떻게 키우시려구요. 엄마도 젊으셨잖아요? 엄마 인생이 있는데 왜 자식인생을 선택하셨나요?    
 
아버지가 세상떠서 얼마 안되여 엄마는 끝내 심한 타격과 과로에 만성간염이 간경화로 번져 병원에 실려갔었죠. 향병원에서 간경화로 남산만하게 부은 배를 보면서 엄마까지 치료가 곤난다면서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권했건만 엄마는 우리가 걱정되여 형님더러 밀차를 갖고 오래서는 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을 우리가 미는 밀차에 의지하여 가만히 집으로 나오셨죠. 아파서 죽는것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 철부지들은 엄마가 집에 온다니까 좋아서 난리였고요.
 
엄마는 중약을 지어 드시면서 하루도 편히 누워있을 새 없이 형님, 누나한테 살림살이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11살짜리 누나가 밥하고 형님이 불을 땠었죠. 그 밥과 반찬이 맛 있으면 얼마나 맛있었고 환자에겐 더우기 어떠했겠습니까? 글쎄 돼지풀을 캐오면 한근에 2전씩 돈을 준다니까 형님은 근을 불그느라 뿌리채로 흙이 가득한걸 비닐주머니에 담아와서는 돈을 받았다고 했잖아요.
 
엄마, 우리가 셈이 드니 이야기처럼 이런 말을 꺼내시면서 남편 잃은 슬픔에 눈물 흘릴 새마저 없었다고 했었죠. 어쩜 불쌍한 우리한테 엄마의 나약함이 더큰 그늘이 될가봐 항상 웃으면서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우리가 잠든 저녁이면 살아갈 일에 홀로 베개잇을 적시면서 날밤을 지새운 날들이 수없이 많았다고 하셨죠. 하늘도 엄마의 강한 의지와 자식사랑에 놀랐는지 중약과 웅담을 쓰고 엄마의 병은 기적같이 나으셨어요.
 
    그후 엄마는 계속 개, 닭, 돼지를 키우고 넓은 마당에 고추도 심었으며 아버지와 함께 계획했던 양봉업을 시작했었죠. 또 야무진 손재주로 동네 새옷가지들을 해주면서 재봉업도 하셨죠. 엄마의 로고덕에 우리는 돈걱정 크게 없이 생활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뒤부터 시작된 호도거리가 엄마한테 또 난제를 제기했었습니다. 일군이 없는 우리 집에 누가 남정네들 하는 밭갈이 같은 일을 해주고 씨앗을 뿌리고 기음 매며 비료 주고 가을걷이하며 소로 하는 싣걱질을 할수 있었겠습니까?
 
엄마는 아빠 계실 때 한번도 접촉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나가야만 했습니다. 밤이면 농업과학기술책을 보면서 벼모를 키우는 기술, 모내기 기술, 농약 치는 기술 등을 배우면서 농사일을 해나갔습니다. 그 다리로 논밭을 오가면서 미끌어넘어진적은 얼마였고 산처럼 높이 쌓인 벼낟갈이에서 떨어져 허리도 상했었잖아요.    
 
그뿐이였습니까? 넷이나 되는 자식들이 커가니 공부시키려면 돈을 벌여야 한다면서 남들이 다 쉬는 겨울에는 조선장사, 또 심양에 가서 옷이며 천들을 들여다 팔고 길림의약공장에서 정통편도 들여다 팔았습니다. 장사길에 커다란 보짐을 이고 지고 하면서 물 한병, 빵 한쪼각도 아껴 드시면서도 힘드신줄 모르고 돈을 벌기 위해 돌아쳤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조건이 편리했음 좋으련만 두메산골로 통하는 뻐스는 하루에 고작 한번이였고 길도 울퉁불퉁하여 몸 약한 엄만 그냥 차멀미를 해가면서 오갔지요. 그런줄도 모르고 우리는 엄마가 돌아오시면 먹을것이 있나 자기 옷가지라도 사왔나 가방 들추기에 신났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포근한 그 누구의 품이 그리웠을텐데요…    
 
엄마의 피타는 노력이 있었기에 량부모가 다 계시는 집들에서도 애들 공부뒤바라지 하기 힘들다고 하셨지만 엄마는 우리한테 속에 든것이 있어야 사회에 유용한 사람이 될수 있다면서 그 누구보다 학업에 힘쓰도록 우리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형님이 4학년인가 다닐적에 분수부분에서 학습성적이 떨어지니 엄마는 자신이 교과서를 보고 학습하고 그날 배운 지식을 가르치고는 이튿날 배울 지식까지 예습시켰습니다. 또 《세계명언명구집》이라는 책이 작문짓기에 유용한데 파는것이 없다니까 낮에 밭일하고 고달프셨지만 저녁이면 동그란 밥상에다 목책을 펼쳐놓고 열심히 베껴주셨습니다. 닷새밤을 패가면서 목책 3권에 그 책을 다 베껴주셨죠. 그리고 친히 작문짓기를 하셨고 그림그리기에서의 비례맞추기 등 기본적인 상식들을 가르쳐준 덕에 우리는 과외보도를 모르는 농촌에서 엄마한테서 학습방법을 배웠습니다.
 
어렸을적 공부를 잘하셨지만 신체조건이 돼야 고등학교에 진학할수 있었던 옛시절의 조건땜에 엄마는 학업을 포기하고 일찍 공작에 참가하여 처녀시절에 로과부녀주임, 남평향 방송원, 화룡현인민대표를 지내셨습니다. 그 여력이 자식들의 교육에 발휘되였습니다. 형님이 초중에서 놀음에 탐하고 나쁜 습관에 젖어들 때 엄만 한치의 양보도 없이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공부 잘하던 누나가 잠시라도 농촌학교 고중진학률에 실망을 느껴 공부에 흥미를 잃을적에도요
 
엄마는 “나는 너희들이 애비 없이 자라서 공부도 제대로 못했다는 말, 례모없이 자랐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더 신경써야 한다”면서 다른 집 애들은 공부를 안해도 되는지 몰라도 우리 애들은 한번 쳐서 안되면 두번, 아님 길림조선족고중에 있는 삼촌한테 보내서라도 꼭 공부시킬테니까 학업을 포기할 생각은 꼬물만치도 하지 말라면서 그루를 박았습니다. 엄마는 정말 다른 농촌엄마들과는 달리 책보기를 즐기셨고 문장을 잘 쓰셨으며 글씨도 명필이셨으며 너무나도 명지하셨습니다. 엄마의 옳바른 교육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우리가 있겠습니까?    
 
그땐 이 모든것이 부모면 응당한것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학교에 입학해서 음악선생이 하모니카를 배울 학생 손 들라니까 엄마한테 하모니카를 사달라고, 전자풍금을 사달라고 투정도 부렸습니다. 엄마는 그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꼭 재간이 필요하다면서 한손으로 악기를 다룰수만 있다면 도전해보라고 하시면서 하모니카와 전자풍금을 마련해주셨습니다.
 
비록 한손이였지만 음악에 흥취가 남다른 나한테서 보기 드물게 야무진 곡들이 나오자 마치 내가 하늘의 별이나 따온듯이 기뻐해주셨습니다. 그후 생활이 좀 펴이자 웬만한 사람들이 비싸서 사기 좀자르는 몇천원씩하는 야마하 586까지 마련해주셨습니다. 그후 제가 작곡한 작품들이 어쩌다 공모에 당선되면 엄마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이 못난 막내자랑을 하셨습니다.    
 
형님이 사업에 참가하자 엄마는 세집을 맡고 상점을 꾸리셨습니다. 돈이 모자랐으니까 모든것이 갖춰진 조건에서 할수가 없었죠. 이때 엄마는 어느덧 목수가 돼있었습니다. 허름한 상점매대를 얻어서 머리를 써가면서 뚝딱뚝딱 못을 박았고 재료가 모자라니 옛적에 벽에 붙였던 사진틀까지 리용하여 하얀색칠을 하여 제법 온천한 매대를 만드셨습니다.
 
지금은 전화 한통이면 물건구입이 가능하지만 그때는 모든 물건을 자기가 가서 도매해서 가져다 팔아야 했었죠. 엄만 어데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셨는지 때시걱에 손님이 찾아들어 음식을 거르면서도 돈이 모아지면 제일 좋은 일이라면서 제시간에 편히 밥 한끼 시름놓고 드시지 못하시면서 상점을 경영하였습니다. 그렇게 돈을 모으고 은행대부금을 맡아 자기집을 마련하고 상점간판을 다시 걸었습니다. 신용으로 고객을 대했기에 상점은 날로 잘되였고 1년이 지나 은행대부금을 다 물었습니다.    
 
그후에는 곰사양업을 하셨죠. 참 곰같이 생긴 사내들도 엄두를 못내는 곰사양을 륙십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에 엄마는 단호하게 “곰” 같은 타산을 단호하게 밀어나갔습니다. 처음에는 곰사양책을 학습하고 기술원한테서 지도를 받으시더니 반달도 안돼서 엄마는 자체로 모든것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억척같이 일하셔서 우리들을 시집 장가 보내시고 아빠트까지 마련해주셨습니다. 신체가 건강한 총각들을 장가들기 힘들다는 세월에 제가 장가들어 두 자식을 보게 되자 엄마는 고목에 꽃이 핀것이라면서 다른 손주들보다 유난히 제 자식들을 특별히 귀여워하고 사랑으로 키워주셨습니다.
 
혹여 생일집이나 군일집에 가셨다가도 맛좋은 음식들이 생기면 포장해서는 “네 형들은 단위행사때나 동료들과의 회식에서 이런 료리들을 흔하게 먹어보지만 무직업인 너희들 부부는 어디서 이런 음식을 맛 보겠니? 그래서 내가 이런거 생기면 너희들 줄려고 가져오는거란다”라고 하시면서 보잘것 없는 이 막내자식을 형들보다 몇갑절 더 사랑해주고 관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갖은 고생을 다하시면서 아들딸들, 손자손녀들을 다 키워놓고 이젠 한시름 놓았다던 엄마가 한창 복 받을 나이에 그만 췌장암이란 가혹한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엄마는 외과에서 가장 힘든 췌장암수술을 받으시고 투병생활을 하시면서도 항상 불구자로 태여나게 한 저에게 미안하다 하시면서 형님누나들한테 항상 이 못난 막내를 잘 돌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엄마는 투병기간에도 식사때면 엄마 드시라고 마련한 색다른 료리들을 저가락 놀리기 서투른 나를 먹으라고 제 밥공기에 친히 담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나한테는 각별히 넓은 아량으로 보듬어주셨습니다.
 
엄마, 돌아가시기 반년전인가 엄마가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현훈증이 나서 비칠하자 이 아드놈은 급한 마음에 엄마를 부치긴다는것이 그만 엄마의 팔에 무릎을 쫗았습니다. 엄마의 팔은 즉시에 10센치 길이에 3센치 너비로 가죽이 홀랑 다 벗겨졌습니다. 가뜩이나 수술후 건강 회복이 늦어서 저단백증으로 온몸피부가 투명한 비닐을 한겹 씌운것처럼 팔락팔락하여 살짝 다쳐도 피멍이 드는데 빈혈에 당뇨병까지 있는 엄마 이 상처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너무나 대형사고를 쳐서 나절로도 이걸 어쩌면 좋지 한달이 걸려도 상처가 다 아물가 하는 생각에 억이 막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내가 미안해서 점심도 거르고 밖에 나갔다 오니 엄마는 안해가 남편인 내가 운신을 잘 못하니깐 애 셋을 거느리는거나 마찬가지라면서 자기 잘못이기나한듯이 가슴아파하시면서 안해를 많이 생각해주라고 하셨죠. 그러면서 돈 100원을 손에 넣어주면서 곧바로 시장들러서 꼭 며느리가 좋아하는 소고기랑 사서 저녁에 집식구끼리 단란하게 먹으라고 하셨죠. 내가 나간 사이에는 안해에게 주눅들가봐 애 엄마를 조용히 불러 앞으로 자신이 없어도 우리 부부 두 자식 거느리고 앞으로 들이닥칠 어떠한 난관도 꿋꿋이 이겨내며 잘살아라고 신신당부 하시였습니다.
 
상했으면 상처가 낫지 않을가봐 걱정하련만 항상 내 걱정을 앞세우시는 엄마, 성하지 못하게 낳은게 마음의 응어리로 남아 한평생 미안해 하시는 엄마, 언제 한번 원망하지 않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있을 며느리의 애로까지 보듬어주려는 엄마, 불치의 병에 걸려서 침상에 누워있는 엄마한테 지금 피 한방울이라도 극난이련만 나무람 한마디 없이 아직도 사랑으로 우리들을 배려해 주시는 엄마, 엄마의 속 깊은 아량에 오늘도 머리 숙여집니다.    
 
엄마는 1년 4개월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시고한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셨습니다.    
 
엄마의 유물을 정리하던 날, 침대밑에 몰래 치워두웠던 돈봉투를 꺼내보고 우리는 또 목메여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애타게 엉엉 소리내여 엄마를 부르며 슬피 울었습니다. 세상 떠나는 날까지도 이 못난 막내아들 위해 단돈 몇푼이라도 아껴 저에게 주려한 “바보엄마”, 이 세상 어느 어머니와도 비할수 없는 위대한 엄마—어린 시절 그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아버지 없는 우리 형제들이 같은 또래친구들에게 주눅들가봐 밤낮으로 고된 일에 지친 피곤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천사와도 같이 환한 미소 지으시며 우리를 대하시던 자애로운 우리엄마, 양봉업을 하시다 벌떼들 습격에 인사불성이 되셨던 엄마, 도거리 맡은 논밭에 농약을 치다가 농약중독으로 논밭에 까무러치셨던 엄마, 과도의 피로와 간경화로 쓰러지셨다가도 억센 의지와 오또기정신으로 꿋꿋이 다시 일어나셨던 내 엄마. 한마디로 엄마는 구쏘련의 빠웰, 일본의 오신, 중국의 장해적과 강의함과 지혜, 담대함을 겨룰수 있는 억세고 당당한 엄마입니다.    
 
다들 고생끝에 락이라고 하건만 엄마는 이 못난 막내아들 위해 한평생그토록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엄마, 다음 생애란것이 있을가요? 정말 있다면 저는 다시 한번, 이번엔 엄마의 건강한 아들로 태여나서 이 세상에서 하지 못했던 효도 실컷 하면서 엄마와 함께 살고싶습니다.    
 
엄마는 분명 천국에서 오늘도 우리를 굽어보시겠죠?    
 
진정 천국이 있다면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락을 영원한 그곳에서 영생복락 하시길 바라면서 오늘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엄마를 그리며 나훈아의 홍시를 목메여 불러봅니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엄마가 생각이난다    
눈이 오면 눈 맞을 세라 비가 오면 비 젖을 세라    
험한 세상 넘어질세라 사랑땜에 울먹일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던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하는 울엄마가 보고파진다.   
 
찬란한 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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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 14일, 길림시설봉문화협회의 행사가 길림시 송화호 기린애섬에서 있었다. 협회 회원 40여명이 아침길을 줄여 한시간 반가량 가도가도 끝이 없을듯한 수림속 산길을 뚫어 도착한 송화호 서남변 선착장, 또다시 배를 타고 찾은 곳은 기린애섬이다. 송화호 기란애섬에 도착 산수가 어우러져 그림같은 선경에 잠시 잃었던 넋...
  • 2013-07-16
  • 2006년 3월 27일에 뇌경색이라는 불청객이 나한테 또 찾아왔다. 이날도 친구와 둘이서 술한병을 마셨는데 이번에는 오른손을 잘 쓸수 없었다. 2년전의 경험이 있는 지라 그 길로 병원에 갔더니 이번에는 왼쪽 뇌혈이 막혔다는것이다. 평소에도 맥박이 고르지 못하고 비오기 전날 심장이 아파나는데 고통스러워 가슴을 주먹...
  • 2013-07-15
  • 어머니와 함께. 왕청진에 거주하는 김순자는 ( 올해 72세) 지난해 43년전에 갈라진 아들 전진석을 만나게 되였다. 김순자는 1963년에 결혼하여 1965년에 아들 진석이를 봤는데 남편과 감정이 맞지 않아 1967년 2월 28일에 법적리혼을 하고 아들애는 남편이 키우기로 했다. 김순자는 애가 보고파 애와 갈라진 두달후인 4월 ...
  • 2013-07-15
  • 최근 몇년간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족축구협회에서는 민족 축구 발전과 화합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목단강시조선족축구협회에 따르면 이 협회는 2011년 동북조선족축구련의회로부터 목단강대표처로 임명되면서 새롭게 탄생하였다.지난 세기 80년대 목단강시조선족축구협회가 설립된적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여...
  • 2013-07-12
  • “마을일이라면 발벗고나서는 '걱정도감'을 신문에 내줄수 없습니까?” 10일, 화룡시 투도진에서 아침 일찍 뻐스를 타고 본사 사무실을 찾은 김학송(80세)로인의 말이다. 그가 말하는 걱정도감은 화룡시 투도진 신북촌의 김송웅(73세)로인으로서 화룡시 공안국에서 사업하다 퇴직한후 마을과 이웃들을 위...
  • 2013-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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