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하늘에 부치는 편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11월1일 09시54분    조회:454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엄마, 하늘나라가 있나요? 혹시 그곳에서도 이 못난 아들 걱정을 하고계시는것 아닌가요? 다들 시간이 약이라고 하건만 엄마가 우리곁을 떠난지 거의 2년이 돼가도 나는 아직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울컥하고 눈시울이 젖어들어 필을 들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이 막내아들이 저지른 불효때문인가 봅니다.    
 
내가 걱정돼서 제대로 눈 못 감으시고 돌아가신 엄마니까 항상 하늘에서 나를 굽어보시겠지요?    “엄마, 왜 나를 낳으셨나요?”    철 모르던 그때 나의 이 한마디 말이 얼마나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도려냈을가요? 어릴적엔 오른쪽 팔다리를 쓰지 못하니까 다른 애들처럼 뛰여놀고싶었고 애들이 놀리는것 같아서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을 말을 했었습니다.
 
엄마라고 나를 뇌성신경마비로 낳고싶었겠습니까? 다른 애들처럼 일찍 말하고 걷지 못하는 육중한 나를 엄마는 변변치 못한 갸날픈 몸으로 일곱살까지 업고 다니셨잖습니까? 그뒤로는 비틀거리며 걷긴 하여도 한쪽 지체를 잘 쓰지 못하다보니 저절로 옷 입고 머리 감고 목욕하는 너무나 사소한 모든 일상생활이 나에건 커다란 고민거리였고 갓난아이처럼 한시도 엄마의 손길을 떠날수가 없었습니다.
 
엄마는 행여나 내 병을 고칠 방도가 있을가싶어 없는 농촌살림에 재봉기술로 온동네사람들의 옷을 도맡아싶이 해주고 짬나는대로 새끼 꼬는 일을 해가면서 열심히 한푼두푼 돈을 모아서는 용하다는 명의들을 찾아 길림, 장춘, 심양, 북경 병원을 넘나들었습니다. 아직까진 이 병을 고치는 의술이 없다는데도 혹여 의술이 발달하여 이 병에 효험이 있는 방도가 나질상싶어서 말입니다. 그사이 마음고생인들 얼마나 하셨습니까?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하늘이 엄마를 조롱하듯 그토록 건강하시던 아버지까지 생산대나무를 운반하다가 차사고로 나어린 우리 4남매를 남겨두고 44세의 젊은 나이로 너무 일찍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세번이나 까무러쳤다가 겨우 깨여나는 엄마를 보고 마을사람들은 허약한 엄마가 혼자 우리들을 키우지 못한다면서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며 혀를 찼었죠.
 
그때 모두들 애들을 경로원에 보내라고 권했지만 엄마는 저 어린것들을, 더우기 저 불쌍한 애를 경로원에 보내고 어찌 발편잠을 잘수가 있냐며 절대 안된다고 하셨죠. 그때 어디서 그런 비장한 각오가 나오셨을가요? 엄마도 소아마비로 다리가 아프시잖아요? 성한 몸일지라도 이런 삶의 타격을 견디기 힘드시겠는데 철부지 자식들을 어떻게 키우시려구요. 엄마도 젊으셨잖아요? 엄마 인생이 있는데 왜 자식인생을 선택하셨나요?    
 
아버지가 세상떠서 얼마 안되여 엄마는 끝내 심한 타격과 과로에 만성간염이 간경화로 번져 병원에 실려갔었죠. 향병원에서 간경화로 남산만하게 부은 배를 보면서 엄마까지 치료가 곤난다면서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권했건만 엄마는 우리가 걱정되여 형님더러 밀차를 갖고 오래서는 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을 우리가 미는 밀차에 의지하여 가만히 집으로 나오셨죠. 아파서 죽는것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 철부지들은 엄마가 집에 온다니까 좋아서 난리였고요.
 
엄마는 중약을 지어 드시면서 하루도 편히 누워있을 새 없이 형님, 누나한테 살림살이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11살짜리 누나가 밥하고 형님이 불을 땠었죠. 그 밥과 반찬이 맛 있으면 얼마나 맛있었고 환자에겐 더우기 어떠했겠습니까? 글쎄 돼지풀을 캐오면 한근에 2전씩 돈을 준다니까 형님은 근을 불그느라 뿌리채로 흙이 가득한걸 비닐주머니에 담아와서는 돈을 받았다고 했잖아요.
 
엄마, 우리가 셈이 드니 이야기처럼 이런 말을 꺼내시면서 남편 잃은 슬픔에 눈물 흘릴 새마저 없었다고 했었죠. 어쩜 불쌍한 우리한테 엄마의 나약함이 더큰 그늘이 될가봐 항상 웃으면서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우리가 잠든 저녁이면 살아갈 일에 홀로 베개잇을 적시면서 날밤을 지새운 날들이 수없이 많았다고 하셨죠. 하늘도 엄마의 강한 의지와 자식사랑에 놀랐는지 중약과 웅담을 쓰고 엄마의 병은 기적같이 나으셨어요.
 
    그후 엄마는 계속 개, 닭, 돼지를 키우고 넓은 마당에 고추도 심었으며 아버지와 함께 계획했던 양봉업을 시작했었죠. 또 야무진 손재주로 동네 새옷가지들을 해주면서 재봉업도 하셨죠. 엄마의 로고덕에 우리는 돈걱정 크게 없이 생활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뒤부터 시작된 호도거리가 엄마한테 또 난제를 제기했었습니다. 일군이 없는 우리 집에 누가 남정네들 하는 밭갈이 같은 일을 해주고 씨앗을 뿌리고 기음 매며 비료 주고 가을걷이하며 소로 하는 싣걱질을 할수 있었겠습니까?
 
엄마는 아빠 계실 때 한번도 접촉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나가야만 했습니다. 밤이면 농업과학기술책을 보면서 벼모를 키우는 기술, 모내기 기술, 농약 치는 기술 등을 배우면서 농사일을 해나갔습니다. 그 다리로 논밭을 오가면서 미끌어넘어진적은 얼마였고 산처럼 높이 쌓인 벼낟갈이에서 떨어져 허리도 상했었잖아요.    
 
그뿐이였습니까? 넷이나 되는 자식들이 커가니 공부시키려면 돈을 벌여야 한다면서 남들이 다 쉬는 겨울에는 조선장사, 또 심양에 가서 옷이며 천들을 들여다 팔고 길림의약공장에서 정통편도 들여다 팔았습니다. 장사길에 커다란 보짐을 이고 지고 하면서 물 한병, 빵 한쪼각도 아껴 드시면서도 힘드신줄 모르고 돈을 벌기 위해 돌아쳤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조건이 편리했음 좋으련만 두메산골로 통하는 뻐스는 하루에 고작 한번이였고 길도 울퉁불퉁하여 몸 약한 엄만 그냥 차멀미를 해가면서 오갔지요. 그런줄도 모르고 우리는 엄마가 돌아오시면 먹을것이 있나 자기 옷가지라도 사왔나 가방 들추기에 신났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포근한 그 누구의 품이 그리웠을텐데요…    
 
엄마의 피타는 노력이 있었기에 량부모가 다 계시는 집들에서도 애들 공부뒤바라지 하기 힘들다고 하셨지만 엄마는 우리한테 속에 든것이 있어야 사회에 유용한 사람이 될수 있다면서 그 누구보다 학업에 힘쓰도록 우리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형님이 4학년인가 다닐적에 분수부분에서 학습성적이 떨어지니 엄마는 자신이 교과서를 보고 학습하고 그날 배운 지식을 가르치고는 이튿날 배울 지식까지 예습시켰습니다. 또 《세계명언명구집》이라는 책이 작문짓기에 유용한데 파는것이 없다니까 낮에 밭일하고 고달프셨지만 저녁이면 동그란 밥상에다 목책을 펼쳐놓고 열심히 베껴주셨습니다. 닷새밤을 패가면서 목책 3권에 그 책을 다 베껴주셨죠. 그리고 친히 작문짓기를 하셨고 그림그리기에서의 비례맞추기 등 기본적인 상식들을 가르쳐준 덕에 우리는 과외보도를 모르는 농촌에서 엄마한테서 학습방법을 배웠습니다.
 
어렸을적 공부를 잘하셨지만 신체조건이 돼야 고등학교에 진학할수 있었던 옛시절의 조건땜에 엄마는 학업을 포기하고 일찍 공작에 참가하여 처녀시절에 로과부녀주임, 남평향 방송원, 화룡현인민대표를 지내셨습니다. 그 여력이 자식들의 교육에 발휘되였습니다. 형님이 초중에서 놀음에 탐하고 나쁜 습관에 젖어들 때 엄만 한치의 양보도 없이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공부 잘하던 누나가 잠시라도 농촌학교 고중진학률에 실망을 느껴 공부에 흥미를 잃을적에도요
 
엄마는 “나는 너희들이 애비 없이 자라서 공부도 제대로 못했다는 말, 례모없이 자랐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더 신경써야 한다”면서 다른 집 애들은 공부를 안해도 되는지 몰라도 우리 애들은 한번 쳐서 안되면 두번, 아님 길림조선족고중에 있는 삼촌한테 보내서라도 꼭 공부시킬테니까 학업을 포기할 생각은 꼬물만치도 하지 말라면서 그루를 박았습니다. 엄마는 정말 다른 농촌엄마들과는 달리 책보기를 즐기셨고 문장을 잘 쓰셨으며 글씨도 명필이셨으며 너무나도 명지하셨습니다. 엄마의 옳바른 교육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우리가 있겠습니까?    
 
그땐 이 모든것이 부모면 응당한것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소학교에 입학해서 음악선생이 하모니카를 배울 학생 손 들라니까 엄마한테 하모니카를 사달라고, 전자풍금을 사달라고 투정도 부렸습니다. 엄마는 그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꼭 재간이 필요하다면서 한손으로 악기를 다룰수만 있다면 도전해보라고 하시면서 하모니카와 전자풍금을 마련해주셨습니다.
 
비록 한손이였지만 음악에 흥취가 남다른 나한테서 보기 드물게 야무진 곡들이 나오자 마치 내가 하늘의 별이나 따온듯이 기뻐해주셨습니다. 그후 생활이 좀 펴이자 웬만한 사람들이 비싸서 사기 좀자르는 몇천원씩하는 야마하 586까지 마련해주셨습니다. 그후 제가 작곡한 작품들이 어쩌다 공모에 당선되면 엄마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이 못난 막내자랑을 하셨습니다.    
 
형님이 사업에 참가하자 엄마는 세집을 맡고 상점을 꾸리셨습니다. 돈이 모자랐으니까 모든것이 갖춰진 조건에서 할수가 없었죠. 이때 엄마는 어느덧 목수가 돼있었습니다. 허름한 상점매대를 얻어서 머리를 써가면서 뚝딱뚝딱 못을 박았고 재료가 모자라니 옛적에 벽에 붙였던 사진틀까지 리용하여 하얀색칠을 하여 제법 온천한 매대를 만드셨습니다.
 
지금은 전화 한통이면 물건구입이 가능하지만 그때는 모든 물건을 자기가 가서 도매해서 가져다 팔아야 했었죠. 엄만 어데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셨는지 때시걱에 손님이 찾아들어 음식을 거르면서도 돈이 모아지면 제일 좋은 일이라면서 제시간에 편히 밥 한끼 시름놓고 드시지 못하시면서 상점을 경영하였습니다. 그렇게 돈을 모으고 은행대부금을 맡아 자기집을 마련하고 상점간판을 다시 걸었습니다. 신용으로 고객을 대했기에 상점은 날로 잘되였고 1년이 지나 은행대부금을 다 물었습니다.    
 
그후에는 곰사양업을 하셨죠. 참 곰같이 생긴 사내들도 엄두를 못내는 곰사양을 륙십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에 엄마는 단호하게 “곰” 같은 타산을 단호하게 밀어나갔습니다. 처음에는 곰사양책을 학습하고 기술원한테서 지도를 받으시더니 반달도 안돼서 엄마는 자체로 모든것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억척같이 일하셔서 우리들을 시집 장가 보내시고 아빠트까지 마련해주셨습니다. 신체가 건강한 총각들을 장가들기 힘들다는 세월에 제가 장가들어 두 자식을 보게 되자 엄마는 고목에 꽃이 핀것이라면서 다른 손주들보다 유난히 제 자식들을 특별히 귀여워하고 사랑으로 키워주셨습니다.
 
혹여 생일집이나 군일집에 가셨다가도 맛좋은 음식들이 생기면 포장해서는 “네 형들은 단위행사때나 동료들과의 회식에서 이런 료리들을 흔하게 먹어보지만 무직업인 너희들 부부는 어디서 이런 음식을 맛 보겠니? 그래서 내가 이런거 생기면 너희들 줄려고 가져오는거란다”라고 하시면서 보잘것 없는 이 막내자식을 형들보다 몇갑절 더 사랑해주고 관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갖은 고생을 다하시면서 아들딸들, 손자손녀들을 다 키워놓고 이젠 한시름 놓았다던 엄마가 한창 복 받을 나이에 그만 췌장암이란 가혹한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엄마는 외과에서 가장 힘든 췌장암수술을 받으시고 투병생활을 하시면서도 항상 불구자로 태여나게 한 저에게 미안하다 하시면서 형님누나들한테 항상 이 못난 막내를 잘 돌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엄마는 투병기간에도 식사때면 엄마 드시라고 마련한 색다른 료리들을 저가락 놀리기 서투른 나를 먹으라고 제 밥공기에 친히 담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나한테는 각별히 넓은 아량으로 보듬어주셨습니다.
 
엄마, 돌아가시기 반년전인가 엄마가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현훈증이 나서 비칠하자 이 아드놈은 급한 마음에 엄마를 부치긴다는것이 그만 엄마의 팔에 무릎을 쫗았습니다. 엄마의 팔은 즉시에 10센치 길이에 3센치 너비로 가죽이 홀랑 다 벗겨졌습니다. 가뜩이나 수술후 건강 회복이 늦어서 저단백증으로 온몸피부가 투명한 비닐을 한겹 씌운것처럼 팔락팔락하여 살짝 다쳐도 피멍이 드는데 빈혈에 당뇨병까지 있는 엄마 이 상처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너무나 대형사고를 쳐서 나절로도 이걸 어쩌면 좋지 한달이 걸려도 상처가 다 아물가 하는 생각에 억이 막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내가 미안해서 점심도 거르고 밖에 나갔다 오니 엄마는 안해가 남편인 내가 운신을 잘 못하니깐 애 셋을 거느리는거나 마찬가지라면서 자기 잘못이기나한듯이 가슴아파하시면서 안해를 많이 생각해주라고 하셨죠. 그러면서 돈 100원을 손에 넣어주면서 곧바로 시장들러서 꼭 며느리가 좋아하는 소고기랑 사서 저녁에 집식구끼리 단란하게 먹으라고 하셨죠. 내가 나간 사이에는 안해에게 주눅들가봐 애 엄마를 조용히 불러 앞으로 자신이 없어도 우리 부부 두 자식 거느리고 앞으로 들이닥칠 어떠한 난관도 꿋꿋이 이겨내며 잘살아라고 신신당부 하시였습니다.
 
상했으면 상처가 낫지 않을가봐 걱정하련만 항상 내 걱정을 앞세우시는 엄마, 성하지 못하게 낳은게 마음의 응어리로 남아 한평생 미안해 하시는 엄마, 언제 한번 원망하지 않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있을 며느리의 애로까지 보듬어주려는 엄마, 불치의 병에 걸려서 침상에 누워있는 엄마한테 지금 피 한방울이라도 극난이련만 나무람 한마디 없이 아직도 사랑으로 우리들을 배려해 주시는 엄마, 엄마의 속 깊은 아량에 오늘도 머리 숙여집니다.    
 
엄마는 1년 4개월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시고한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셨습니다.    
 
엄마의 유물을 정리하던 날, 침대밑에 몰래 치워두웠던 돈봉투를 꺼내보고 우리는 또 목메여오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애타게 엉엉 소리내여 엄마를 부르며 슬피 울었습니다. 세상 떠나는 날까지도 이 못난 막내아들 위해 단돈 몇푼이라도 아껴 저에게 주려한 “바보엄마”, 이 세상 어느 어머니와도 비할수 없는 위대한 엄마—어린 시절 그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아버지 없는 우리 형제들이 같은 또래친구들에게 주눅들가봐 밤낮으로 고된 일에 지친 피곤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천사와도 같이 환한 미소 지으시며 우리를 대하시던 자애로운 우리엄마, 양봉업을 하시다 벌떼들 습격에 인사불성이 되셨던 엄마, 도거리 맡은 논밭에 농약을 치다가 농약중독으로 논밭에 까무러치셨던 엄마, 과도의 피로와 간경화로 쓰러지셨다가도 억센 의지와 오또기정신으로 꿋꿋이 다시 일어나셨던 내 엄마. 한마디로 엄마는 구쏘련의 빠웰, 일본의 오신, 중국의 장해적과 강의함과 지혜, 담대함을 겨룰수 있는 억세고 당당한 엄마입니다.    
 
다들 고생끝에 락이라고 하건만 엄마는 이 못난 막내아들 위해 한평생그토록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엄마, 다음 생애란것이 있을가요? 정말 있다면 저는 다시 한번, 이번엔 엄마의 건강한 아들로 태여나서 이 세상에서 하지 못했던 효도 실컷 하면서 엄마와 함께 살고싶습니다.    
 
엄마는 분명 천국에서 오늘도 우리를 굽어보시겠죠?    
 
진정 천국이 있다면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락을 영원한 그곳에서 영생복락 하시길 바라면서 오늘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엄마를 그리며 나훈아의 홍시를 목메여 불러봅니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엄마가 생각이난다    
눈이 오면 눈 맞을 세라 비가 오면 비 젖을 세라    
험한 세상 넘어질세라 사랑땜에 울먹일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던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하는 울엄마가 보고파진다.   
 
찬란한 해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오빠들 유해라도 보고 죽었으면 한이 없겠는데…》 항미원조전쟁 유가족 김필련할머니의 눈물겨운 마지막 소원 김필련할머니가 본사 편집부에 보내온 편지 최근 돈화시에 살고있는 할머니 한분이 항미원조전쟁터에서 희생된 오빠들이 너무 보고싶다면서 본사 편집부에 만장같은 편지를 써보내왔다. 할머니가 신문사...
  • 2014-05-30
  • 가수 송경철씨가 뇨독증으로 위독한 상황이고 병치료에 드는 거액의 치료비때문에 안타까이 눈물짓고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5월26일 인터넷 길림신문을 통해 보도된후 즉각적인 사회적 관심이 이어지고있다. 5월27일 한국에서 남편의 병시중을 들고있는 송경철씨의 안해 리영희씨를 통해 현재 송경철씨의 병황상황에 대해...
  • 2014-05-30
  • 김봉선은 연길시 건공가두 연춘사회구역의 전임 주임이다. 3년전 연길근교의 동광소학교를 방문하면서 이 학교 2학년의 한족학생 추해도를 알게되였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할아버지의 막벌이로 공부하는 해도는 총명하고 품행도 단정한 아이였다.  그때로부터 김봉선할머니는 해도를 여러모로 살펴주며 ...
  • 2014-05-29
  • 한국에서 쓰러진 대륙영웅의 아빠, 적십자가 돕다 (울산=연합뉴스) 가족 생계를 위해 한국에 일하러 온 중국 조선족 동포 허성일(57. 사진 가운데)씨는 울산의 아파트 현장에서 일하다가 뇌경색증 진단을 받고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러나 치료비가 없어 어려움에 처하자 울산적십자사가 허씨를 긴급지원 수혜자로 선정...
  • 2014-05-29
  • 《새 책가방이 생겨서 너무 좋아요. 명절 선물 너무 고맙습니다.》 평소 갖고싶었던 분홍색 책가방을 선물받고 기뻐하며 수화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사진속의 왕효기어린이는 올해 7살에 나는 롱아이다. 27일, 연길시건공가두 장해사회구역 사업일군들은 《6.1》국제아동절을 맞아 관할구역내 장애인 아동가정을 찾아 명...
  • 2014-05-28
  • 오상4중 84기졸업 30주년 동창모임 칭다오서 열려   단순 모임 차원을 벗어나 모교에 장학금도 전달   (흑룡강신문=하얼빈) 이수봉 박영만 기자 =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아름다운 해변의 도시 칭다오서 오상4중 84기 졸업 30주년 동창모임이 열렸다.   80년대 오상4중 (현재 오상조선족고급중학교)은 흑룡강성의 유일...
  • 2014-05-28
  • [CCTV.com한국어방송]중국인들은 약주를 즐겨 담급니다. 약주는 담근 약재에 따라 약효도 다양합니다.     윈난 쿤밍의 리 선생님은 10년 전 오공, 녹편과 여러 가지 중약재로 술을 담궜습니다. 양기를 돋우어 준다는 말에 10년 동안이나 담궈 뒀습니다. 10년이 지난 지난해, 리 선생은 들뜬 마음에 뚜...
  • 2014-05-28
  • 가수 송경철씨 뇨독증으로 위독, 거액의 치료비로 눈물 짓는다   가수 송경철씨(자료사진) 항상 조선족 전통민족복장차림의 듬직한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 어깨춤이 절로 나는 구성진 가락으로 흥겹게 노래를 불러주던 가수 송경철씨가 최근 몹쓸 병환에 모대기고있어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있다. 지난해 7월말 송...
  • 2014-05-27
  • 단오명절을 앞두고 5월26일 오전, 료녕성 “무순시영안보조선족로인협회 팔순로인 경로잔치”가 무순시 순성구 선학루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 무순시 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무순시조선족문화관, 무순시조선족기업가협회,  무순시 조선족로인협회 및 각 분회의 관계자와 순성구 무순성가두와 민족사회구...
  • 2014-05-27
  •        (흑룡강신문=하얼빈)윤운걸 길림성 특파원 = 23일,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에서 주최하고 한국 재외동포재단,서울 한연연,일본 마사꼬동아리에서 후원한 제15회 초록장학상 시상식 및 재8회 우리민족 전통예술초청공연이 연길시 공원가두와 신흥가두 새 세대관심협회,연변조선문독서사,...
  • 2014-05-26
  • 제1회 연변생태나눔마당 행사 측기 5월 24일 오전 9시, 연길공원광장에 난데없는《꼬마장사군》들이 대거 모여들면서 좌판을 벌이더니 겨끔내기로 사구려를 불러대 제법 장터 못지 않게 흥성흥성했다.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기》를 제창한 《생태보호와 아름다운 나눔의 장》을 주제로 한 《제1회 연변생태나...
  • 2014-05-26
  • 24일, 연변애심어머니협회 제13기사랑나눔행사가 연길대주호텔에서 있었다. 이날 애심어머니협회에서는 70명 불우학생들에게 장학금(고중 인당 800원, 초중 인당 700원, 소학교 인당 500원)을, 10명 빈곤장애인들에게는 인당 2000원의 구축기금을 발급하여 도합 7만여원의 후원금을 전달했다. 올해로 13회째 나눔행사를 이...
  • 2014-05-26
  •   "아이들이 점점 자기 민족의 언어랑 민족풍속습관이랑 잊어가고있습니다. 참말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민속례절교육을 진행하려 하는데 한복이 없네요." 매 학기 두세차씩 도문시 개산툰진 아송2소와 아송2중의 심리교육을 맡고있는 후사모(연변후대사랑과 사회봉사를 실천하는 모임)심리지원쎈터...
  • 2014-05-21
  •  “무한 긍정남” 유린식씨: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지켜나가는것이 꿈”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있는 20대 청춘들은 무엇이 가장 고민일가? 치렬한 “입시전쟁”을 뚫고 진학한 대학이지만 경쟁사회의 문턱을 넘기도 전에 청년실업이 코앞에 와있다. “이태백”, 이십대 태...
  • 2014-05-21
  • 표창대회에 참가한 조선족대표 오기철(오른쪽 두번째). 《습근평총서기와 악수할 때 제가〈총서기님, 저는 길림성 연변에서 온 조선족 오기철입니다.〉라고 회보했더니 습근평총서기는 련이어 〈좋습니다! 좋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월 17일, 《전국 제5차 자강모범 및 장애자방조 선진 집체와 개인 표창대회》에...
  • 2014-05-20
  •   선천성빈혈로 갓 태여난 아이한테 무상헌혈을 해주고있는 "엄마,아빠"들...      “매우 귀여운 녀자애입니다.  수많은 '엄마 아빠'들의 사랑으로 생명을 얻었으니 행복한 아이지요... 너무도 감사합니다!” 수많은 애심인사들의 덕분으로 안해와 아이를 살릴수 있었다며 18...
  • 2014-05-20
  • 아줌마가 ‘아줌마 이야기’ 코너에 아줌마(아이 阿姨 도우미) 이야기를 쓴다. 누구나 다 공감할 것이다. 상하이 생활에 도우미 아줌마들은 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문화, 정서, 입장의 차이 등등 큰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는 걸. 오래 전 조카뻘 되는 새댁 도우미가 손가락을 조금 밴드를 붙이는 정도 다...
  • 2014-05-19
  • 김병섭로인이 전람관에서 거두어들인 비문화유산을 정리하고 있다.   (흑룡강신문=하얼빈) 리삼민특약기자 =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우리 민족의 풍속습관을 물려주고 조선족 문화유산을 전승(传承)하는 력사적 사명감을 안고 무형문화유산 개발에 혼신을 다 바쳐가는 한 로인이 있다. 그가 바로 동녕현 조선족로인협회의 ...
  • 2014-05-16
  • 5월10일 오전, 전통적인 어머니날이 다가오는 전날, 료녕성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 전체 중층이상 령도들과 40여명 학생회 간부들은 무순시중심과 20여리 떨어진 무순현 상장당촌에 위치한 무순시조선족양로센터를 위문하였다. 로인들을 존경하고 효도하는 전통미덕을 발양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베품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 2014-05-12
  • 무순제2감옥 “어머니의 날” 맞이 혈육의 정 교육활동 전개 5월8일,료녕성무순제2감옥에서는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하고 아름다운 미덕을 홍보하자”라는 주제로 “어머니의 날” 맞이 혈육의 정 교육활동을 진행하였다. 당일 오전, 34명 재소자들의 모친들은 감옥령도와 관련 경찰들의 배...
  • 2014-05-12
‹처음  이전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