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풍년해이다. 훈춘시 반석향 맹령촌의 산골짜기와 들은 울긋불긋 사과로 뒤덮였다. 벌거우리하고 어린애머리통만한 사과들이 가지휘게 달려 보는이들을 경탄케 한다.
"우리 촌의 사과산업발전에는 이름없는 영웅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시농업국의 안종헌이야말로 첫손 꼽을만한 무명영웅이지요."
맹령촌 리호식의 정에 겨운 말이다.
진정으로 농민들을 생각
촌민들이 이토록 한입 모아 칭찬하고 치하하는 안종헌은 과연 어떤 사람일가.
그는 훈춘시농업국 간부이다. 체제개혁전에는 시특산국 과장으로 사업해오다 특산국이 농업국산하로 편입되면서부터는 인사사업과 행정후근사업을 책임지고있는 현역간부이다.
시에서는 북쪽에는 만무사과배기지, 남쪽에는 만무사과기지 건설의 슬로건을 내걸고 제반 사업을 내밀고있을 때 안종헌은 국으로부터 맹령촌사과기지를 일층 공고발전시킬 임무를 맡고 맹령촌에 파견간부로 내려왔다. 그 당시만 하여도 맹령촌의 사과기지건설은 분산적인 령세업종으로서 규모는 말할것도 없고 효익 역시 그저 푼돈이나 버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다년간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향의 일초일목에 익숙한 리호식 등 촌의 중견인물들은 바로 이 "령세업종"에 잠재한 거대한 우세를 통찰해내고 사과재배라는 이 농업대상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당지 기후와 토양에 알맞는 사과품종을 인입,육성하기 위하여 로심초사하였다.다년간 농업특산부문에서 사업해오던 안종헌은 속으로 굳은 결심을 내리고 맹령촌의 사과기지건설에 한몫 하려고 신심을 다졌다.
사과재배에서 품종선택, 기술전수가 관건적인 고리임을 보아낸 안종헌은 촌지도부와 상의하고 외지고찰과 기술전수를 병행하는 방법으로 사과재배농들의 안계를 넓히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함에 아울러 사과재배정보수집과 시장판로와 시세흐름의 대세에 주의를 몰부어 진정 시장에 발붙일수 있는 사과품종인입과 배육에 공력을 쏟았다. 그들의 이러한 신고는 헛되지 않았다. 2005년부터 맹령촌의 한부사과는 점차 시장의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부사과 역시 자체의 약점이 있었다. 품종개량이 급박하였다.
개량품종인입의 걸림돌은 역시나 자금이였다. 농민들은 한그루에 50원(당지가격)씩 하는 묘목값을 부담하기에는 그 재력이 너무나 가냘팠던것이다.
향정부와 촌민위원회에서 발벗고 앞뒤로 뛰여다니며 자금곬을 틔우려했으나 금융부문 역시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는지라 자금대부가 수월치 않았다.
안종헌 역시 이 모든 사정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에게도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다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안달만 떨고있을 때 무언가 안종헌의 뇌리를 스치는 반짝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신용대부금은 담보를 최고로 치는데 우리들이 나서서 담보하면 어떨가?"
그는 자기의 이 생각을 한과의 동료들앞에 털어놓았다. 당시 시농업국국장이였던 조현호도 그의 대담하고도 기발한 생각에 힘을 불어넣었다.
"참으로 고마운 생각입니다. 진정으로 농민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엄두도 못낼 발상입니다. 저희들도 힘껏 돕겠습니다."
"종헌이, 당신만 믿고 따르겠네."
다년간 고락을 함께 해온 동료들도 지지해나섰다. 그러나 금융대부금담보란 그에 따르는 위험이 동반되는만큼 녀성동료들은 제외하고 8명 남성동료만이 련대담보자로 나섰다.
이렇게 대규모 새 품종 인입의 스타트가 떼졌다. 촌민들도 그들의 몸에서 힘을 얻고 그 적극성이 전에 없이 고조되였다.
그후부터 맹령촌의 사과기지는 해마다 40~50쌍의 규모로 발전하였다. 하여 지금은 450여쌍으로 발전하였고 정상적인 년분의 출하량은 300~350만킬로그람으로 껑충 뛰여올랐다. 불과 손가락튕기는 몇해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맹령촌의 셀렌사과는 성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어떤 통큰 도매상은 전 촌의 셀렌사과를 몽땅 도거리하겠다고 나섰다. 도매상들도 맹령촌의 셀렌사과에 잠재해있는 거대한 시장성을 보아낸것이다.
그만큼 맹령촌 주민들의 생활은 향상되기만 하였다. 가로세로 쭉쭉 뻗은 아스팔트길, 붉고 푸른 새 벽돌기와집이 이젠 화제거리도 아니다.
그러나 안종헌은 자기특유의 통찰력에서 또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고심하였다. 바로 단합의 힘이였다. 목전에 호단위 사과출하는 어디까지나 분산적이여서 때론 사과 재배농들끼리 서로를 제약하는 포승줄이 될수 있었던것이다.
맹령촌 셀렌사과전문합작사가 설립되고 안종헌은 전문합작자의 고문직을 맡았다. 그는 전문합작사의 당위성과 그 리점을 셀렌사과재배농들에게 설명해주면서 합작사를 키워나갔다. 회원은 120여세대로 늘어났다.
셀렌사과는 당도가 높고 수분이 많을뿐더러 껍질까지 얇은데다가 무공해재배법으로 재배하다보니 시장에서 일약 힌트를 치게 되였다. 바로 그 여세를 몰아 맹령촌셀렌사과축제가 발족되였다.
2008년 10월 8일의 첫 축제의 위세를 타고 쭉 5년간 련속되였는데 그 규모로 맹령촌을 벗어나 훈춘시 세기광장, 연길시 시대광장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확산할만큼 맹령촌의 셀렌사과는 인기절상이였다.
이쯤하면 안종헌도 한숨 쉴법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뜻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임무가 기다리고있었다.
2012년 음력설을 갓 쇠고나서 시농업국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 시농업국산하 국영농장당지부서기로 부임하게 되였다.
농업부문에서 오래동안 사업해온 안종헌은 농장의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한마디로 골치덩어리단위였다.
이제까지 조직의 결정에 불복한적이 없는 그는 선듯이 책임을 맡아나섰다.
합격된 공무원이 되자
1954년에 건립된 훈춘시국영농장은 이미 근 60년의 력사를 가진 로농업기업이다. 근 60년의 력사에 국영농장은 열혈청년들로 운집되여 청춘의 끓는 피와 땀을 쏟아가며 건설한데서 한때 휘황한 업적을 자랑하였었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세월의 변혁속에서 언제부터인가는 그 빛이 바래기 시작하여 줄곧 문제거리단위로 남았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부터 농장은 개혁에 개혁을 거듭해왔지만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농장의 사정은 시당정지도부와 농업국의 미해결문제로 2012년까지 남아있었다.
안종헌이 농장당지부서기로 부임해왔어도 군중들의 반응은 그저 랭담하기만 하였다. 지어는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몇몇 사람은 여차하면 손찌검이라도 댈 기세였다. 그만큼 농장문제는 너무나도 오래동안 곪아왔던것이다.
300여명 농장원의 현재생계 유지, 로후생활대책, 이렇듯 민생에 민감한 문제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져있었다.
안종헌은 우선 농장개혁지도소조를 설립하고 농장원대표들과의 진지한 대화로 출로를 모색하고 방법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긴가민가 하면서 팔짱을 끼고 관망하면서 불평만 부리던 이들도 점차 마음이 동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진심에 감동을 먹은것이다.
근 10여차의 큰 회의, 작은 회의를 통하여 안종헌은 당과 정부의 관심을 전하고 “로동법”, “양로보험법” 등에 준하여 개혁방안을 내오려고 농장원대표들을 이끌고 왕청, 연길 등지로 다니며 외지의 관련 경험들을 학습하였다.
그러나 근 60년이 되는 오랜 기업인데도 불구하고 농장의 인사관계서류는 너무나도 엉망이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원시서류를 찾을길 없었다.
“글쎄 농장에서 30~40년 동안 근무해온 이들도 인사서류가 없으니 해당 부문에서도 어떻게 손써볼 근거가 없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의 정경을 회억하며 안서기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여 서류정리보충작업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정말 말이 쉽지 여간 공력이 드는 일이 아니였다. 근 300명의 농장원들의 서류를 정리 보충하여야만 그후의 개혁절차를 이어나갈수 있었기때문이다.
개혁개방초기 농장의 인당 토지배당량은 2.9무로서 3무도 채 안되였다. 나이가 들어 밭을 다룰수 없게 된 로농장원들은 처음에는 한무에 쌀 50킬로그람씩 받고 린근 농민들에게 토지를 세주었다. 바로 이 150킬로그람도 채 안되는 쌀이 바로 그네들의 유일한 생계줄이였다.
그네들의 념원도 아주 단순하였다. 기타 다른 국영기업의 종업원들과 같이 퇴직금, 양로금, 의료보험 등 대우를 향수하는것이였다.
“국가공직자로서 백성질고를 헤아릴줄 모른다면 어찌 그를 합격된 공무원이라 할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렇게 누구를 위한 일인가 하는 원칙적문제에서 추호의 드팀도 없이 안종헌은 농장의 개혁을 밀고나가면서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 기간 시당위, 시정부, 시농업국의 련석회의도 여러차례 소집되였다. 의제는 당연 국영농장의 개혁문제였다. 근본적인 개혁을 거치지 않고서는 농장의 300여명 종업원의 생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수 없었기때문이였다. 농장의 개혁은 차츰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안종헌은 이 유리한 계기를 다잡고 농장마을환경건설에 농장원들을 동원하여 그제날 소침하기만 하던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2013년초, 안종헌은 지나친 로고로 심장병이 도져 심장지지대를 2개 하게 되였다. 그러나 이제 갓 방향을 잡은 농장개혁이 관건적인 시점에서 많은 시간을 점할수 없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였기에 음력설휴가와 농한기시간을 리용하여 남몰래 시술을 받았다. 의사는 그에게 지지대 3개를 권유하였지만 그는 2개만 받고 인차 농장으로 돌아왔다. 바로 그의 일터가 농장이였기에 그는 한시도 마음의 탕개를 늦출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시당위, 시정부에서는 그의 개혁방안에 적극 지지해나섰다. 근 300여명 농장원이 모두 퇴직금, 양로보험 및 의료보험에까지 보장이 있게 되였다.
2013년 10월 15일, 황금빛으로 뒤덮인 풍요로운 대지와 함께 훈춘시국영농장의 종업원들의 마음속에도 풍년의 희열이 넘쳐났다.
그네들이 그토록 오매불망 고대하던 로임통장을 발급받게 된것이다.
“살아 생전에 이렇게 자기 이름으로 된 퇴직금통장을 받게 되였으니 죽어서도 눈을 감을수 있게 되였수다…”
이제 90 고령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마음속 고백이다.
이 할머니의 말은 바로 농장원들의 마음속말을 대변한것이기도 하다.
“안서기가 우리 농장에 내려온지 2년도 채 안되는 동안에 수십년을 끌어오던 농장원들 대우문제가 해결되였으니 그 치하를 어디에 하겠소. 그저 당과 정부에 감사드릴뿐이요. 안서기처럼 훌륭한 간부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으니 말입니다.”
연변일보 박득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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