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마반산아버지》께 올리는 편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12월9일 15시51분    조회:370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한평생 농사군으로 황소처럼 일하며

자식들을 위해 살아오신 아버지 박두현.

《세월이 류수》라더니 아버지께서 저 세상에 가신지도 어느덧 30여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셋째딸 동선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그날부터 이 딸은 종래로 아버지를 잊은적 없습니다. 세월이 좋아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애절하게 가슴을 허빕니다. 아버지, 이 딸은 아버지 뵈러 마반산산소에 왔습니다. 한평생 자식 위해 고생만 하시다가 불행하게 세상뜨신 나의 아버지, 늦게나마 이 글을 바쳐올립니다.

 

자식들 위해 사셨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성함은 박두현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여덟살 때 흑룡강성으로 이민와 집마당에서 우물을 파시던 부친과 형님을 가스폭발사고로 하루아침에 잃고 학교문앞도 못가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평생 한이 된 아버지께서는 자식들만은 꼭 공부를 시켜내리라 마음먹었다고 하셨습니다.

흑룡강국영농장의 기술원으로 일하시던 아버지께서는 1959년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연길로 이사를 왔다지요. 그러나 3년재해가 들이닥치면서 대식품새대를 맞게 되였습니다. 끼니조차 잇기 어렵던 1960년, 큰언니는 흑룡강대학에 추천받은 기쁨을 안고 집으로 왔습니다. 희소식앞에 며칠밤 애꿎은 담배만 태우시던 아버지는 끝내 친척들 도움으로 입학금을 마련하여 큰언니손에 쥐여주었습니다.

그뒤로 연길시국영농장에 출근하시던 아버지는 집을 마반산으로 옮겼습니다. 산골에 가서 자식들에게 밥이나마 배불리 먹이고 산부업을 해서라도 자식들 공부뒤바라지를 할 심산이였지요. 마반산기차역에서 20리 산길을 더 걸어야 도착하는 마반2대는 전기도 없고 수레길조차 변변찮은 편벽한 두메산골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이사짐을 부린 이튿날부터 생산대의 밭갈이, 후치질 등 힘든 일을 닥치는대로 하셨습니다. 봄부터 밭머리휴식시간이 되면 담배쉼도 못하고 더덕이며 약재며를 캐셨고 찌물쿠는 한여름 점심참에도 구질구질 비내리는 휴식날에도 산속에 들어가 피나무껍질을 벗겼습니다. 무거운 피나무껍질을 산더미처럼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옷은 늘 땀과 비에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땀에 절어 해진 아버지의 흰광목적삼을 씻어 깁어드렸구요.

저녁이면 아버지는 고된 로동의 피곤을 무릅쓰고 등잔불밑에서 피나무속껍질을 잘게잘게 찢어서 밤깊도록 바를 들이셨습니다. 《덜커덩…덜커덩…》 아버지의 바틀소리, 우리 자식들은 저녁마다 그 《요람곡》 들으며 꿈나라로 들어가군 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딴딴한 참나무바훓개는 아버지의 손과 바에 다슬어 반들반들해졌고 깊은 홈이 패였지요. 해마다 생산대의 바를 도맡아 들이신 아버지, 십여년동안 아버지께서 손이 다슬게 들인 바줄은 몇천메터인지 모른답니다! 그러는 아버지의 손가락은 늘 갈라터져 뻘건 살이 보였지요. 반창고도 없어 실로 아버지의 손가락을 감아드리는 우리는 그토록 모진 고생을 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기가 몹시 가슴 아팠습니다.

목숨으로 지켜준 학교 가는 길

아버지는 생산대의 빚을 안 지고 살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통나무벌목, 발구다리 등 힘겹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셨지요.

어느해 봄날, 이 딸은 뒤산에 나물 캐러 올라갔다가 발구에 통나무를 꽉 박아싣고 산을 내리는 한 농부의 뒤모습을 본적 있습니다. 발구가 한창 비좁고 가파로운 산길을 미끌어져가고있었습니다. 산중턱에 주먹처럼 뚝 삐여져나온 굽인돌이를 돌 때 갑자기 왼켠으로 기우뚱하는 발구군, 굽인돌이옆은 곰처럼 웅크리고 앉은 들쑹날쑹한 바위돌, 아래는 아찔한 깊은 낭떠러지…

(넘어지면 큰일날텐데...) 조바심을 태우며 지켜보는데 그 뒤모습의 임자가 바로 아버지란것을 알아본 순간, 이 딸은 다짜고짜 발구를 쫓아 산아래로 내리뛰였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 일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이 딸은 아버지의 두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좔좔 흘리며 빌었어요. 소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저의 머리를 쓰다듬던 아버지는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야 너희들이 배 곯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지!》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흑룡강성에서 달려온 큰언니 박길자(왼쪽)와 함께.

그후에도 뒤산 그 위험한 발구길엔 아버지의 발자국이 그냥 찍혔어요. 어느날, 발구길밑의 채 녹지 않은 얼음을 잘못 디뎌 넘어지는바람에 아버지는 황소 발에 밟혀 왼쪽 어깨뼈가 골절됐어요. 인사불성이 되여 병원에 실려가서 처치받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돈이 없어 약도 못 썼지만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으셨어요. 상처가 좀 낫자 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셔서 또 밤낮 없이 일하셨습니다.

그때 우린 매일 이른 아침 큰 강을 건너가 기차를 타고 학교로 갔습니다. 60~70년대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이 합류해 마반산자락을 감돌아흐르는 강은 깊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셔서 장대기를 들고 먼 강에 나가보셨습니다. 장마철이면 아버지는 힘겹게 바줄을 당겨 세찬 물결을 헤가르며 우리를 태워 강을 건너주셨습니다.

제일 위험한 계절은 초봄 그때였습니다. 간밤에 슬쩍 얼었던 얼음장이 한걸음 내딛는 순간 꺼져내려앉을 때면 온몸이 오싹해나군 하였습니다. 때론 앞에서 길을 내며 걷는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방금 밟고 나서는데 발밑에서 얼음장이《쾅-》 하고 깨지면서 강물속으로 둥둥 떠내려가기도 했지요. 이렇듯 15년동안이나 자식들의 앞에 나서서 위험한 강을 건네주시던 나의 아버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우리는 사고 한번 없이, 지각 한번 하지 않고 강을 건느고 기차를 타고 학교에 당도하군 했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의 정성에 보답하려고 집안일도 돕고 농사일도 거들면서 먼 학교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학기말이면 우리는 우등생성적표며 《3호학생》상장이며를 타다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너무 기쁘셔서 환한 미소를 짓군 하였습니다.

친아버지가 아니였던 의붓아버지

문화대혁명시기 중학교를 졸업한 둘째언니와 제가 재교육대상이 되여 귀향했어요. 자식들의 진학길이 막히자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해온 농민자식들에게 재교육이라니 웬 말이냐며 리해되지 않아 한탄했지요.

그러면서도 앞길이 막막해 실망하는 자식들을 둘러보시더니 한 말씀하셨지요. 《이 밤이 아무리 길어도 밝을 때가 올거다. 농사일을 하면서라도 책은 놓지 말거라.》

역경속에서도 한번 먹은 마음 굽히지 않는 아버지의 그 말씀에 마음이 든든해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계속 간고분투를 했어요.

나(오른쪽)와 둘째언니(웃쪽)는 의붓아버지를 친아버지로 알고 그 사랑에 행복하기만 하였습니다.

대학입학의 기회는 끝내 왔습니다. 1977년 둘째언니는 대학에 갔구요. 저도 이듬해 대학에 갔어요.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그 모습 지켜보는 우리들은 더없이 감격되였습니다. 아버지는 중년에 상처하고 딸 하나 데리고 딸 둘 딸린 어머니와 재혼을 하셨다지다. 그해 큰언니가 열다섯살이고 둘째언니(친언니)가 세살, 제가 한살이였지요. 생계마저 어렵던 그 가난한 세월에 우리 두 의붓자식을 친자식처럼 키워주시고 대학교에까지 보내주신 나의 아버지, 그 다함 없는 사랑과 은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두딸이 대학에 가자 예순이 넘는 아버지였지만 더구나 손 쉴새 없이 허리 펼새 없이 억척스레 일하셨지요. 그러나 한공에 몇십전씩밖에 안 가던 세월이다보니 생활은 그냥 어렵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간혹 하는 고기추렴에도 안 갔지요. 실농군인 아버지는 호도거리농사를 한번 지어봤으면 하는 소망을 지니고 좋은 세월이 오기를 고대하셨습니다.

어느 《5•1절》이였습니다. 명절 휴가에 집으로 갔던 이 딸을 멀리 바래주시던 아버지께서는 담배쌈지에서 꼬깃꼬깃 한 돈 2원을 꺼내주시며 말씀하셨지요. 《돈이 적다. 차비나 하거라.》

그렇게 젊고 영준하던 어버지의 얼굴엔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박혔고 그토록 거쿨진 건장한 체구였던 아버지는 구부정한채 마디가 툭툭 불거진 투박한 손으로 내게 그 돈을 건네고있었습니다. 저는 하염없이 솟구쳐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앞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몸을 돌려 발걸음을 재우쳤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꼭 아버지께 효도하리라 결심하면서...

마반산 양지바른 언덕에 아버지를 모시고

1979년 5월 13일, 아버지께서 사망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부고를 받고 우리 자식들은 정신없이 집으로 뛰여갔습니다.

마반산과 연길은 지척이지만 생활난에 쪼들리던 우리 형제들은 어쩌다 연길로

영화구경을 왔다가 얼음과자 한대씩 사먹고 연길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이른 새벽에 담배모상판일에 나가셨던 아버지께서는 차사고를 당하였습니다.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오른팔이 끊어진채 피가 즐퍽한 땅우에서 운명하시며 아버지께서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셨고 끝내는 눈을 감지 못하셨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천으로 여러벌 감싼 시체는 선혈로 얼룩져있었습니다.

객사를 당한 아버지는 따뜻한 집안 온돌이 아닌 차디찬 창고 땅바닥에 처참히 누워계셨습니다.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 자식들은 가슴이 찢어지는듯했고 하늘이 무너지는듯했습니다.

신체가 건장하고 기술이 좋았던 아버지께서 그토록 고대하던 호도거리농사를 눈앞에 두고, 이제 2~3년이면 대학을 졸업할 딸들의 효성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채 어쩌면 이렇게 한 많은 농부의 일생을 마치시는가요!

아, 가난이 원쑤였습니다! 세월도 무정합니다! 한평생 소처럼 일하시던 우리 아버지 성한 몸 하나 온전히 갖지 못하시고 이렇게 세상을 떠나신단 말입니다!

고향분들도 눈물을 주체 못하며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장례가 끝난후 아버지무덤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우리 자식들은 농민아버지의 운명이 너무도 기구해서 목놓아 통곡했지요. 울고울다가 그토록 견강하셨던 아버지앞에서 울고만 있을수 없어서 굳은 맹세를 다지며 산을 내렸습니다.

그후 아버지를 닮아 손재간 좋은 작은 남동생이 먼저 연길시공신촌 기업에 들어와서 일을 잘해 집을 타고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둘째언니와 저는 대학을 졸업하자 큰 남동생과 녀동생을 연길시에 데려다 공부를 시켜 대학을 졸업시켰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각자 직장에서 사업하면서 아버지 같은 로백성들을 위해 성심으로 일했습니다. 지금 큰언니는 대학졸업배치를 받은 흑룡강성에서 그냥 살고있고 우리 다섯 자식은 연길시에서 잘살고있습니다.

아버지 이젠 시름놓으십시오. 여기 마반산은 웅위로운 산도 무슨 명산도 아닌 매돌모양의 평범한 산이지만 아버지가 계시는 이곳은 영원히 우리 형제들이 오매에도 잊지 못하는 마음의 고향입니다.

이른봄부터 산나물이며 산열매며 마지막 락엽 한잎까지도 먹을거리, 부업거리로 전부 주고나서 빈 몸으로 소리없이 겨울속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산 마반산은 영원한 아버지산입니다.

아버지 나의 영원한 마반산아버지, 해마다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는데 아버지께서도 다시 한번 소생할수 있다면 연길집에 모시고 가서 한번만이라도 고기국밥을 배불리 대접하고싶습니다. 따뜻한 새옷을 해드리고싶습니다.

세월이 좋아져 지금 연길시에서는 농민들도 의료보험, 양로대우를 향수하면서 행복하게 사는데.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를 모시고 따뜻한 아빠트에 살면서 함께 락을 나눠봤으면…이 딸의 십년 생명으로 아버지의 하루 소생을 바꿀수 있다면 달갑게 달갑게 그렇게 해드리련만!

아버지, 이젠 편히 눈 감으시고 쉬세요! 아무런 근심걱정하지 말아주세요. 래세에는 꼭 못 다한 효성 다해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 큰절 올립니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천갑록씨(61살)는 신발수리공이다. 돋보기를 넌지시 코에 걸치고 능숙하게 실을 꿰는 천씨는 흰 운동화를 손에 들고 해진 곳을 바느질한다. 여기저기 해져서 볼품없던 신발이 천씨의 꼼꼼한 바느질로 금세 새살이 붙으면서 말끔한 모습을 보인다. 천씨는 2년 넘게 연길시 북대 대우화원 아빠트 입구에 자리를 지키고있다. ...
  • 2013-07-31
  •    올해 62세인 서숙자는 10년전 연길시 저압전기기구공장에서 퇴직한후 지금 북산가두 단영사회구역에서 로후를 장식하고있다.    2005년부터 북경에 있는 딸 집에서 생활하며 열심히 신문열독을 하면서 가치있는 자료들을 스크랩하기 시작하였다.    “지나간 일들을 누가 ...
  • 2013-07-29
  •             일전에 연변두만강애심협회에서는 불우한 장애인가정 학생들에게 사랑으로 넘치는 달콤한 하루를 선물했습니다. 연변지체장애인협회에서 추천한 김이령, 우희봉, 허충량 등 12명 학생들은 두만강애심협회에서 조달한 조학금과 학용품을 받았습니다. 두만강애심협회 윤희백회장님...
  • 2013-07-29
  • 왕청현려명예술단 단장 리주성씨의 로후생활 새로운 무용곡을 구상하고 있는 리주성씨. 가야하반에 자리잡은 연변주 왕청현에는 퇴직한후 장장 11년동안 아무런 보수도 없이 오로지 민족예술에 대한 사랑과 집념으로 천부적인 장끼를 서슴없이 발휘하여 조선족예술을 계승, 발전시켜 연변은 물론 동북3성에서 《민간예술가...
  • 2013-07-29
  • “무더위에 환경청결을 하느라 땀을 많이 흘렸는데 사회구역 간부들이 따라준 녹두물을 마시고 마음이 더없이 개운하고 시원해졌으며 더위가 확 날아간것 같았습니다.” 이는 연길시 공원가두 원성사회구역에서 청결공으로 일하고있는 52세 리서진씨가 청결도중 원성사회구역 간부들이 갖고 온 녹두물을 마시고 ...
  • 2013-07-25
  • “시내가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 농민들도 ‘공인’처럼‘쌍발’해 월급 타거든요.” 함주원씨는 아담하고 정갈한 마을풍경과 시설, 경영체를 일일이 가리키면서 “땅도 부치니까 이중수입이다보니 우리 마을 사람들이 호강스럽게 살아간다”고 자랑한다. 함주원씨는 민속관광, 특...
  • 2013-07-25
  • 8년간 사회구역 주민들을 위해 충실히 일해온 간부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연길시 건공가두 연화사회구역 당총지서기 대지품입니다. 요즘 연화사회구역 경찰아파트단지에서는 단지출입구에 자동문을 설치하느라 바삐 보내고 있습니다. 원래 아파트단지는 자동문이 설치안돼 관리에 허점이 많았는데 사회구역 당총지서기 대...
  • 2013-07-23
  • 연길시 조양천진 승리사회구역 철남에 거주하고있는 올해 71세인 최인숙은 전국로력모범의 본색을 잃지 않고 퇴직후에도 20여년을 하루와 같이 마을 주민들을 위해 봉사하고있다. 일찍 개산툰 철물상점에서 과장으로 사업하면서 20만원이란 놀라운 영업수입을 올린 최인숙은 1985년에 전국로력모범으로 표창받았다. 그후 조...
  • 2013-07-22
  • 백혈병소년 박명혁, 따뜻한 성원속에 두번째 화학치료도 무사히 마무리 두번째 화학치료후 병실문을 나서서 걷다가 힘들어 쉬고있는 박명혁학생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앓는 애와 저희 가족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내용의 메세지와 함께 련속부절히 입금해주고있습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의 은혜를 잊을수 없습...
  • 2013-07-22
  • 《우리는 나라 발전의 견증인이며 유공자이다》   이때가 얼마나 좋았던가?...1963년도에 찍은 왕청현제5중학교 졸업생사진 1963년 7월 10일은 왕청현제5중학졸업생들이 기념사진을 찍은 날이다. 지난 7월 14일, 도문립봉산장에서 반백년만에 처음 이 학교 당년졸업생기념파티가 있었다. 파티의 조직자인 문영수, 강봉...
  • 2013-07-18
  • 한국 벽제농협과 안도현 만보진 홍기촌이 자매결연을 맺고 17년간 끈끈한 우정을 이어오고있다. 지난 6월말, 자매결연 17돐을 맞아 또다시 홍기촌을 찾은 한국 벽제농협 리승엽조합장을 비롯한 임직원 4명은 촌민들과 함께 즐거운 만남을 가진후 홍기촌발전기금과 만보소학교발전기금, 마을 54명 학생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 2013-07-18
  • 연길시 신흥가두 민화사회구역에는 지은지 20여년이 되는 한 아빠트가 있는데 하수도가 자주 막히는바람에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있었다. 2011년에 민화사회구역의 일군들이 애를 써서 겨우 하수도를 소통시켜놓았는데 금년에 또 문제가 발생하였다. 민화사회구역 일군들은 부득불 한집에서 30원씩 거두기로 하고 집집을 찾...
  • 2013-07-18
  • 하늘이 내린 선물 —안도 만보진 홍기촌의 세쌍둥이(8살, 지미선, 지미자, 지송군)가 모두의 갸륵한 마음 그대로 자라 이제는 동심의 꿈을 한껏 펼쳐가는 어엿한 소학생이 되였다.   “학교생활 신이 나요”   11일, 특대홍수후 새로 닦은 시원한 도로를 따라 골목안으로 아담하게 들어앉은 안도...
  • 2013-07-18
  • 왕청현 제18차 민족단결진보표창대회에서 선진으로 표창받은 오기철.(사진 김룡기자) 일전에 연변주 왕청현 배초구진당위에서는 복림촌 촌민 리옥희(李玉喜)가 보내온 감사신을 받았다. 감사신에는 배초구진 복림촌 촌민위원회 주임 오기철이 자기 안해가 중병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는 관건적인 시각에 선뜻이 나서서 남...
  • 2013-07-17
  • 란간 보수작업을 하는 오기송씨(왼쪽사람).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온다. 연길의 명물이라 불리는 부르하통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인다. 문뜩 그 사람들 사이로 탁 트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외로운 쪽배 하나가 손에 잡힐듯 시선을 잡아끈다. 뭘 하나 유심히 봤더니 상류쪽에서 떠내려오는 쓰레기들을 긴...
  • 2013-07-17
  • 7월 14일, 길림시설봉문화협회의 행사가 길림시 송화호 기린애섬에서 있었다. 협회 회원 40여명이 아침길을 줄여 한시간 반가량 가도가도 끝이 없을듯한 수림속 산길을 뚫어 도착한 송화호 서남변 선착장, 또다시 배를 타고 찾은 곳은 기린애섬이다. 송화호 기란애섬에 도착 산수가 어우러져 그림같은 선경에 잠시 잃었던 넋...
  • 2013-07-16
  • 2006년 3월 27일에 뇌경색이라는 불청객이 나한테 또 찾아왔다. 이날도 친구와 둘이서 술한병을 마셨는데 이번에는 오른손을 잘 쓸수 없었다. 2년전의 경험이 있는 지라 그 길로 병원에 갔더니 이번에는 왼쪽 뇌혈이 막혔다는것이다. 평소에도 맥박이 고르지 못하고 비오기 전날 심장이 아파나는데 고통스러워 가슴을 주먹...
  • 2013-07-15
  • 어머니와 함께. 왕청진에 거주하는 김순자는 ( 올해 72세) 지난해 43년전에 갈라진 아들 전진석을 만나게 되였다. 김순자는 1963년에 결혼하여 1965년에 아들 진석이를 봤는데 남편과 감정이 맞지 않아 1967년 2월 28일에 법적리혼을 하고 아들애는 남편이 키우기로 했다. 김순자는 애가 보고파 애와 갈라진 두달후인 4월 ...
  • 2013-07-15
  • 최근 몇년간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족축구협회에서는 민족 축구 발전과 화합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목단강시조선족축구협회에 따르면 이 협회는 2011년 동북조선족축구련의회로부터 목단강대표처로 임명되면서 새롭게 탄생하였다.지난 세기 80년대 목단강시조선족축구협회가 설립된적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여...
  • 2013-07-12
  • “마을일이라면 발벗고나서는 '걱정도감'을 신문에 내줄수 없습니까?” 10일, 화룡시 투도진에서 아침 일찍 뻐스를 타고 본사 사무실을 찾은 김학송(80세)로인의 말이다. 그가 말하는 걱정도감은 화룡시 투도진 신북촌의 김송웅(73세)로인으로서 화룡시 공안국에서 사업하다 퇴직한후 마을과 이웃들을 위...
  • 2013-07-1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