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마반산아버지》께 올리는 편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12월9일 15시51분    조회:363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한평생 농사군으로 황소처럼 일하며

자식들을 위해 살아오신 아버지 박두현.

《세월이 류수》라더니 아버지께서 저 세상에 가신지도 어느덧 30여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 셋째딸 동선입니다. 아버지를 잃은 그날부터 이 딸은 종래로 아버지를 잊은적 없습니다. 세월이 좋아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애절하게 가슴을 허빕니다. 아버지, 이 딸은 아버지 뵈러 마반산산소에 왔습니다. 한평생 자식 위해 고생만 하시다가 불행하게 세상뜨신 나의 아버지, 늦게나마 이 글을 바쳐올립니다.

 

자식들 위해 사셨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성함은 박두현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여덟살 때 흑룡강성으로 이민와 집마당에서 우물을 파시던 부친과 형님을 가스폭발사고로 하루아침에 잃고 학교문앞도 못가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평생 한이 된 아버지께서는 자식들만은 꼭 공부를 시켜내리라 마음먹었다고 하셨습니다.

흑룡강국영농장의 기술원으로 일하시던 아버지께서는 1959년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연길로 이사를 왔다지요. 그러나 3년재해가 들이닥치면서 대식품새대를 맞게 되였습니다. 끼니조차 잇기 어렵던 1960년, 큰언니는 흑룡강대학에 추천받은 기쁨을 안고 집으로 왔습니다. 희소식앞에 며칠밤 애꿎은 담배만 태우시던 아버지는 끝내 친척들 도움으로 입학금을 마련하여 큰언니손에 쥐여주었습니다.

그뒤로 연길시국영농장에 출근하시던 아버지는 집을 마반산으로 옮겼습니다. 산골에 가서 자식들에게 밥이나마 배불리 먹이고 산부업을 해서라도 자식들 공부뒤바라지를 할 심산이였지요. 마반산기차역에서 20리 산길을 더 걸어야 도착하는 마반2대는 전기도 없고 수레길조차 변변찮은 편벽한 두메산골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이사짐을 부린 이튿날부터 생산대의 밭갈이, 후치질 등 힘든 일을 닥치는대로 하셨습니다. 봄부터 밭머리휴식시간이 되면 담배쉼도 못하고 더덕이며 약재며를 캐셨고 찌물쿠는 한여름 점심참에도 구질구질 비내리는 휴식날에도 산속에 들어가 피나무껍질을 벗겼습니다. 무거운 피나무껍질을 산더미처럼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옷은 늘 땀과 비에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땀에 절어 해진 아버지의 흰광목적삼을 씻어 깁어드렸구요.

저녁이면 아버지는 고된 로동의 피곤을 무릅쓰고 등잔불밑에서 피나무속껍질을 잘게잘게 찢어서 밤깊도록 바를 들이셨습니다. 《덜커덩…덜커덩…》 아버지의 바틀소리, 우리 자식들은 저녁마다 그 《요람곡》 들으며 꿈나라로 들어가군 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딴딴한 참나무바훓개는 아버지의 손과 바에 다슬어 반들반들해졌고 깊은 홈이 패였지요. 해마다 생산대의 바를 도맡아 들이신 아버지, 십여년동안 아버지께서 손이 다슬게 들인 바줄은 몇천메터인지 모른답니다! 그러는 아버지의 손가락은 늘 갈라터져 뻘건 살이 보였지요. 반창고도 없어 실로 아버지의 손가락을 감아드리는 우리는 그토록 모진 고생을 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기가 몹시 가슴 아팠습니다.

목숨으로 지켜준 학교 가는 길

아버지는 생산대의 빚을 안 지고 살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려고 통나무벌목, 발구다리 등 힘겹고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셨지요.

어느해 봄날, 이 딸은 뒤산에 나물 캐러 올라갔다가 발구에 통나무를 꽉 박아싣고 산을 내리는 한 농부의 뒤모습을 본적 있습니다. 발구가 한창 비좁고 가파로운 산길을 미끌어져가고있었습니다. 산중턱에 주먹처럼 뚝 삐여져나온 굽인돌이를 돌 때 갑자기 왼켠으로 기우뚱하는 발구군, 굽인돌이옆은 곰처럼 웅크리고 앉은 들쑹날쑹한 바위돌, 아래는 아찔한 깊은 낭떠러지…

(넘어지면 큰일날텐데...) 조바심을 태우며 지켜보는데 그 뒤모습의 임자가 바로 아버지란것을 알아본 순간, 이 딸은 다짜고짜 발구를 쫓아 산아래로 내리뛰였습니다.

《아버지, 제발 이 일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이 딸은 아버지의 두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좔좔 흘리며 빌었어요. 소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저의 머리를 쓰다듬던 아버지는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야 너희들이 배 곯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지!》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흑룡강성에서 달려온 큰언니 박길자(왼쪽)와 함께.

그후에도 뒤산 그 위험한 발구길엔 아버지의 발자국이 그냥 찍혔어요. 어느날, 발구길밑의 채 녹지 않은 얼음을 잘못 디뎌 넘어지는바람에 아버지는 황소 발에 밟혀 왼쪽 어깨뼈가 골절됐어요. 인사불성이 되여 병원에 실려가서 처치받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돈이 없어 약도 못 썼지만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으셨어요. 상처가 좀 낫자 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셔서 또 밤낮 없이 일하셨습니다.

그때 우린 매일 이른 아침 큰 강을 건너가 기차를 타고 학교로 갔습니다. 60~70년대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이 합류해 마반산자락을 감돌아흐르는 강은 깊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셔서 장대기를 들고 먼 강에 나가보셨습니다. 장마철이면 아버지는 힘겹게 바줄을 당겨 세찬 물결을 헤가르며 우리를 태워 강을 건너주셨습니다.

제일 위험한 계절은 초봄 그때였습니다. 간밤에 슬쩍 얼었던 얼음장이 한걸음 내딛는 순간 꺼져내려앉을 때면 온몸이 오싹해나군 하였습니다. 때론 앞에서 길을 내며 걷는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방금 밟고 나서는데 발밑에서 얼음장이《쾅-》 하고 깨지면서 강물속으로 둥둥 떠내려가기도 했지요. 이렇듯 15년동안이나 자식들의 앞에 나서서 위험한 강을 건네주시던 나의 아버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우리는 사고 한번 없이, 지각 한번 하지 않고 강을 건느고 기차를 타고 학교에 당도하군 했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아버지의 정성에 보답하려고 집안일도 돕고 농사일도 거들면서 먼 학교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학기말이면 우리는 우등생성적표며 《3호학생》상장이며를 타다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너무 기쁘셔서 환한 미소를 짓군 하였습니다.

친아버지가 아니였던 의붓아버지

문화대혁명시기 중학교를 졸업한 둘째언니와 제가 재교육대상이 되여 귀향했어요. 자식들의 진학길이 막히자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해온 농민자식들에게 재교육이라니 웬 말이냐며 리해되지 않아 한탄했지요.

그러면서도 앞길이 막막해 실망하는 자식들을 둘러보시더니 한 말씀하셨지요. 《이 밤이 아무리 길어도 밝을 때가 올거다. 농사일을 하면서라도 책은 놓지 말거라.》

역경속에서도 한번 먹은 마음 굽히지 않는 아버지의 그 말씀에 마음이 든든해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계속 간고분투를 했어요.

나(오른쪽)와 둘째언니(웃쪽)는 의붓아버지를 친아버지로 알고 그 사랑에 행복하기만 하였습니다.

대학입학의 기회는 끝내 왔습니다. 1977년 둘째언니는 대학에 갔구요. 저도 이듬해 대학에 갔어요.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그 모습 지켜보는 우리들은 더없이 감격되였습니다. 아버지는 중년에 상처하고 딸 하나 데리고 딸 둘 딸린 어머니와 재혼을 하셨다지다. 그해 큰언니가 열다섯살이고 둘째언니(친언니)가 세살, 제가 한살이였지요. 생계마저 어렵던 그 가난한 세월에 우리 두 의붓자식을 친자식처럼 키워주시고 대학교에까지 보내주신 나의 아버지, 그 다함 없는 사랑과 은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두딸이 대학에 가자 예순이 넘는 아버지였지만 더구나 손 쉴새 없이 허리 펼새 없이 억척스레 일하셨지요. 그러나 한공에 몇십전씩밖에 안 가던 세월이다보니 생활은 그냥 어렵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간혹 하는 고기추렴에도 안 갔지요. 실농군인 아버지는 호도거리농사를 한번 지어봤으면 하는 소망을 지니고 좋은 세월이 오기를 고대하셨습니다.

어느 《5•1절》이였습니다. 명절 휴가에 집으로 갔던 이 딸을 멀리 바래주시던 아버지께서는 담배쌈지에서 꼬깃꼬깃 한 돈 2원을 꺼내주시며 말씀하셨지요. 《돈이 적다. 차비나 하거라.》

그렇게 젊고 영준하던 어버지의 얼굴엔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박혔고 그토록 거쿨진 건장한 체구였던 아버지는 구부정한채 마디가 툭툭 불거진 투박한 손으로 내게 그 돈을 건네고있었습니다. 저는 하염없이 솟구쳐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앞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른 몸을 돌려 발걸음을 재우쳤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꼭 아버지께 효도하리라 결심하면서...

마반산 양지바른 언덕에 아버지를 모시고

1979년 5월 13일, 아버지께서 사망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부고를 받고 우리 자식들은 정신없이 집으로 뛰여갔습니다.

마반산과 연길은 지척이지만 생활난에 쪼들리던 우리 형제들은 어쩌다 연길로

영화구경을 왔다가 얼음과자 한대씩 사먹고 연길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이른 새벽에 담배모상판일에 나가셨던 아버지께서는 차사고를 당하였습니다.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오른팔이 끊어진채 피가 즐퍽한 땅우에서 운명하시며 아버지께서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셨고 끝내는 눈을 감지 못하셨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천으로 여러벌 감싼 시체는 선혈로 얼룩져있었습니다.

객사를 당한 아버지는 따뜻한 집안 온돌이 아닌 차디찬 창고 땅바닥에 처참히 누워계셨습니다.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본 자식들은 가슴이 찢어지는듯했고 하늘이 무너지는듯했습니다.

신체가 건장하고 기술이 좋았던 아버지께서 그토록 고대하던 호도거리농사를 눈앞에 두고, 이제 2~3년이면 대학을 졸업할 딸들의 효성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채 어쩌면 이렇게 한 많은 농부의 일생을 마치시는가요!

아, 가난이 원쑤였습니다! 세월도 무정합니다! 한평생 소처럼 일하시던 우리 아버지 성한 몸 하나 온전히 갖지 못하시고 이렇게 세상을 떠나신단 말입니다!

고향분들도 눈물을 주체 못하며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 장례가 끝난후 아버지무덤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우리 자식들은 농민아버지의 운명이 너무도 기구해서 목놓아 통곡했지요. 울고울다가 그토록 견강하셨던 아버지앞에서 울고만 있을수 없어서 굳은 맹세를 다지며 산을 내렸습니다.

그후 아버지를 닮아 손재간 좋은 작은 남동생이 먼저 연길시공신촌 기업에 들어와서 일을 잘해 집을 타고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둘째언니와 저는 대학을 졸업하자 큰 남동생과 녀동생을 연길시에 데려다 공부를 시켜 대학을 졸업시켰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각자 직장에서 사업하면서 아버지 같은 로백성들을 위해 성심으로 일했습니다. 지금 큰언니는 대학졸업배치를 받은 흑룡강성에서 그냥 살고있고 우리 다섯 자식은 연길시에서 잘살고있습니다.

아버지 이젠 시름놓으십시오. 여기 마반산은 웅위로운 산도 무슨 명산도 아닌 매돌모양의 평범한 산이지만 아버지가 계시는 이곳은 영원히 우리 형제들이 오매에도 잊지 못하는 마음의 고향입니다.

이른봄부터 산나물이며 산열매며 마지막 락엽 한잎까지도 먹을거리, 부업거리로 전부 주고나서 빈 몸으로 소리없이 겨울속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산 마반산은 영원한 아버지산입니다.

아버지 나의 영원한 마반산아버지, 해마다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는데 아버지께서도 다시 한번 소생할수 있다면 연길집에 모시고 가서 한번만이라도 고기국밥을 배불리 대접하고싶습니다. 따뜻한 새옷을 해드리고싶습니다.

세월이 좋아져 지금 연길시에서는 농민들도 의료보험, 양로대우를 향수하면서 행복하게 사는데.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를 모시고 따뜻한 아빠트에 살면서 함께 락을 나눠봤으면…이 딸의 십년 생명으로 아버지의 하루 소생을 바꿀수 있다면 달갑게 달갑게 그렇게 해드리련만!

아버지, 이젠 편히 눈 감으시고 쉬세요! 아무런 근심걱정하지 말아주세요. 래세에는 꼭 못 다한 효성 다해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 큰절 올립니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결혼 76년,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사랑 모든 것이 판타지 같지만 실재하는 이야기다. 모든것이 아름다움을 넘어 감동 그 자체를 말한다. 이야기는 한국 강원도 횡성군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다. 나무꾼 처럼 "건장"해 보이는 98세 조병만 할아버지와 "수줍은 공주" 89세 강계열 할머니, 노부부는 겨울에 눈싸움을 하고...
  • 2015-08-02
  • 초록과 붉은 태양이 행운을 안겨주는 7월 5일 75기 화룡2중 3학년 6반(1975년 졸업)  동창들은 존경하는 한영헌담임을 모시고 아름다운 삼동리조트(도문 마패위치)에서 고중졸업 40주년 경축모임을 성황리에 가졌습니다.  반장 김승원을...
  • 2015-07-28
  • 원제: ‘박카스 아줌마’는 어떻게 ‘박카스 할머니’가 되었나? "나는 진짜 삶이 급해. 돈이 급해서 여기 나오는 거야. 다른 일은 몸이 아파서 못해. 당뇨도 심하고, 위염도 있고. 팔다리도 저리고 눈도 시리고. 약을 달고 살아. 자식? 있지. 그런데 걔들도 힘들어. 돈 달란 말은 못하겠더라고." 지난...
  • 2015-07-12
  • [여성조선] 김태원 아내 이현주의 가족 소통법 그룹 부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김태원의 아내 이현주 씨가 엄마들과 시간을 가졌다. 자폐를 앓고 있는 아들과 독한 사춘기를 겪은 딸을 키운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많은 엄마가 공감했다. 전라남도 여수교육지원청 강의실. 특수교육 학생과 그 가족의 소통 이야기를 ...
  • 2015-07-12
  •   직업녀성의 당당함과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배움의 전당에서 쌓은 지혜와 수양으로 나눔의 행복을 가꾸어가는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연변대학 녀성평생교육총동문회 녀성들이다. “녀성시대 직업녀성의 앞선 의식과 매력,헌신정신을 한껏 보여줄것입니다…” 1999년에 직업녀성들의 종합자질을...
  • 2015-07-02
  • (흑룡강신문=하얼빈) 28일 오후 “내 친구 국량이를 살려주세요~”라는 애처로운 글이 위챗모멘트에 급속도로 퍼졌고 이어 국량이 살리기에 팔을 걷고나서는 조선족젊은이들의 열정적인 모습이 우리 사회에 찐한 감동을 주고있다고 료녕신문이 전했다.   “무슨 병인지 정확한 진단도 내리지 못했고 온 몸...
  • 2015-07-01
  • 연길시 화린무역회사 리덕봉사장(우)과 김복순할머니   지난 6월 29일, 연길시 화린무역회사 리덕봉사장과 연변비암미디어 홍욱사장일행은 연길시 신흥가두 민안사회구역 리마화서기의 안내로 로당원 김복순할머니를 위문했다. 올해 90고령인 김복순할머니는 리덕봉사장과 홍욱사장의 손을 꼽 잡고 “찾아주셔서...
  • 2015-07-01
  • —생태미술에 희망을 건 중국조선족민속촌 목수집 주인장 오운봉씨의 이야기 얼마전 가랑비가 잔잔히 내리는 날, 기자는 정식개원을 앞둔 중국조선족민속촌을 거닐다 《목수집》이라는 간판앞에 발길을 멈췄다. 담너머로 들여다보니 뜨락에는 온통 각이한 뿌리조각공예품들이 진렬되여있었다. 《구새목》(굴뚝)에...
  • 2015-06-27
  •      신수리를 하느라 점심식사도 미룬 전영춘씨      3일 오전, 연길시 8중 맞은편에 위치한 애심신수리부에 도착했을때 한창 솔로 바닥의 먼지를 꼼꼼히 털어내고 있던 전영춘(55세)씨와 그의 안해 김화(51세)씨는 어서 들어오라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연길시 신흥가두 민화사회구역의 ...
  • 2015-06-04
  •           “내 팔뚝 좀 만져보오, 이런 알통 만져봤소?” 거짓말 안보태서 주먹만한 근육이 불끈 솟아오른 서영옥할머니의 팔뚝, 올해 76세라고 소개했을 때 놀라고 팔뚝을 만져보고 두번 놀랐다. 록두가루와 살구씨기름을 파는 할머니라하면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할머니, 그냥 보따...
  • 2015-06-03
  • 김광선성형미용병원 김춘자실장의 삶의 지혜   “인생은 가치투자여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비전이 있어야 하지만 사랑하고 성취감느끼고 행복을 느끼는것이야말로 내 인생에 삶의 가치가 아닐가 생각합니다.” 김광선성형미용병원(이하 미용병원) 김춘자실장의 삶의 가치관이다. 김춘자실장은 나이 60에 가...
  • 2015-05-29
  • 지난 5월 23일 연길시 연신소학교 1학년 3반 학생들은 김향선담임선생님과 함께 룡정시 광신촌에 위치한 "도촌자애원"에 봉사활동을 진행하였다.  부동한 년령단계의  오갈데가 없는 20여명의 지체장애자들이 있는 도촌자애원에서 원장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있었다.  제일 오래 있은 아이는 15년이 되였...
  • 2015-05-28
  •   '서로 다른 장애 보완하고 배려하며 살아야죠' 26일,맹인들한테 나누어줄 옷들을 챙기러 달려온 룡정4급 지체장애인인 주순옥(51살)씨가 맹인사업을 도와나서게 된 동기를 이같이 겸손히 터놓았다. 식당을 경영하다가 그만둔후 우연한 기회에 맹인들과 인연이 닿아 8년전부터 맹인돕기사업에 나서게 되였다...
  • 2015-05-28
  •   올해11살인 추해도는 엄마아빠사랑을 잃고 할아버지막벌이로 공부하는 한족어린이이다.    2012년부터 연길시로인뢰봉반의 조선족할머니 김봉선의 “손자”로 되면서부터 사랑의 품을 느껴보게된다. 김할머니의 추천으로 중국국제방송국조선어부의 김동광주임도 해마다 추해도에게 1000씩...
  • 2015-05-26
  •       아이들에게 전통교양을   “6/1”국제아동절을 맞으며 연길시 신흥가두 민창지역사회에서는 22일 “5로”들을 모시고 신흥소학교 6학년 5학급에가  “전통 배우기”로 아이들과 명절맞이 기념활동을 벌였다.   일찍 항미원조전쟁에 참가...
  • 2015-05-26
  • 들의  “6.1”선물    5월19일 연길시의 들인 리성복 김봉숙 왕효평 세 로인은 연길시 연남소학교에 찾아가 뢰봉정신을 전파하며 별장학금을 발급하여 아이들의 작은 가슴에 큰 꿈을 키워주었다.   세 모범로인은 모두 연길시 북산가두의 뢰봉자원봉사자이다. 국제아동절을 맞으며 그들은 연...
  • 2015-05-22
  • 이름난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에 마흔다섯 살 주부의 고민이 한 줄 올랐다. 몇 십 년 만에 나간 초등학교 동창 모임. 한 남자가 "네가 나의 첫사랑"이었노라 고백했단다. 외모와 직업 번듯한 데다 자상하기까지 해서 모임 끝나고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더란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는 물음에 댓글이 와르르 달렸다. 부러움 ...
  • 2015-05-21
  • 올해74세인 김월선할머니는 연길시 건공가두 장해지역사회에 사신다. 자식들이 외국돈벌이 나가고 집에서 손자를 돌보는 할머니는 하루도 쉴사이 없이 동네로인들의 도우미로 나서 “이웃사촌”이라 불리며 로후를 즐겁게 보내고있다.  김월선할머니도 퇴행성관절염을 앓다보니 허리도 휘고 걸음걸아도 퍽 불...
  • 2015-05-14
  •   (흑룡강신문=하얼빈) 2015년 전국부녀련합회에서 조직한 '가장 아름다운 가정'활동을 전개한이래 전국적으로 많은 가정의 적극적인 참여와 추천을 받았다. 주최단위에서는 그 기초상에서 층층의 선발을 통해 도합 300호의 가정을 전국 '가장 아름다운 가정'후보명단에 입선시켰다. 그중 조선족 김미란...
  • 2015-05-07
  • 5.4청년절을 맞으며 연변대학 과학기술학원 AMP 총동문회 산하조직인 축구협회(회장 리덕봉)에서는 축구시합, 기부 등 다양한 행사로 5.4청년절을 뜻깊게 맞이했다. 축구협회에서는 5월 3일 신라월드 5층 회의장에서 좌담회를 열고 5.4청년절의 의미와 애국운동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으며 이를 통해...
  • 2015-05-05
‹처음  이전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