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공연사진을 펼쳐보는 강동춘씨의 눈빛에는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애잔함이 묻어났다.
만담가 강동춘씨 수술후유증으로 힘든 나날...
“아! 옛날이여”,꼽웃음 추억으로만 남나?
강동춘이라 하면 연변은 물론 국내 조선족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만담배우다. 그가 무대에서,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진지도 15년 정도, 21일, 자택을 찾았을 때 선글라스차림에 불편하게 움직이며 마중나온 강동춘씨의 모습은 한시절 무대를 주름잡으며 뭇사람들에게 배꼽웃음을 선사하던 활기찬 모습이 아니였다.
모든게 뇌졸증때문이였다. 15년전, 연길시조선족구연단 단장을 맡고있던 강동춘씨는 뇌졸증때문에 그토록 애착하던 무대와 자신에게 그렇게 열광하던 관중과 시청자들을 "잠시" 떠날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떠난 "잠시"가 어언 15년으로 이어졌다.다행히 꾸준한 치료를 거쳐 건강은 많이 회복되였지만 여전히 힘든 나날을 보내고있다.불편한 안면경련을 치료하고저 수술을 선택했지만 효과보단 후유증만 남겼다. 지금 오른쪽 얼굴은 청력이고 시력이고 모두 잃었다. 발음도 새여나가 취재중 자주 재확인해야 했다.
만담 “개”로 구연계에 데뷔를 한 강동춘씨,그가 만담과 인연을 맺은건 리광수극작가때문이다.18살이 되면서 어느 집체호에 가야 하나 고민하던중 석문대대 선전대에 있던 리광수극작가의 권유에 석문대대 선전대에 들어가 연주원으로 활약하면서 피리며 손풍금을 익혔고 리광수가 쓴 가사에 곡을 붙여 중창곡, 무용곡 등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던중 연변예술학교 음악창작반 학생모집에 참가했는데 생산대의 추천이 없다는 리유로 합격되지 못했다. 이듬해 음악이 아닌 연극에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성대조건이 연극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리유로 또 탈락했다. 그 이듬해에는 나이때문에 아예 자격조차 차례지지 않았다.
세번의 탈락으로 고민해있던 강동춘을 찾아준 사람이 친형님처럼 많이 따랐던 리광수작가였다. “동춘아, 만담을 해보자”는 말에 예술을 안한다며 머리를 저으면서도 그를 따랐다. 당시 리광수는 강동춘씨에게 우리 말중 “개”자가 들어가는 단어를 아는것만큼 적어보라고 했다. 두 사람의것을 모아보니 150여개 되였다. 이는 나중에 히트한 만담 “개”의 극본으로 완성되였다. 극본을 외우는건 어렵지 않았지만 관중을 웃기는건 정말로 힘들었다. 처음 몇번 공연은 반응이 미미했다.혹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거울을 마주보고 꾸준히 련습했고 삼로인 공연도 찾아보며 무대표현을 배웠다.
결국 현에서 펼쳐진 회보공연에서 만담 “개”는 관중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줬다. 그해가 1978년이였다. 얼마 뒤 연변구연예술극단에 들어간 그는 “장생불로약”, “술” 등 만담으로 여러번 사람들의 웃음샘을 터쳐놓았다. 그는 중국어로 된 만담을 번역, 표현해 큰 웃음을 선사했는데 대표작이 “소방대동무들”이다.
1989년 첫 만담테프 “웃음주머니 1”를 발매한데 이어 도합 4집의 만담테프를 발매했는데 록음기가 한창 성행하던 당시 강동춘씨의 만담테프는 집집이 갖추던 테프였다.
전국소수민족구예공연 1등상을 비롯해 길림성 표현 1등상 등 수많은 상을 받은 강동춘씨, 요즘 그러한 상장들과 흑백으로 된 공연사진들을 보느라면 가슴 한쪽이 아련해진다.뜻대로 되지 못한 후계자 양성이 안타깝다면서도 말을 아낀다…
취재를 마친 뒤 강동춘씨의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어쩐지 강동춘씨의 인생 페지를 장식하던 “웃음”이 점점 사라지고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연변일보 허국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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