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앞줄에 앉은 사람들로 이어지는 그때 그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1월28일 10시09분    조회:449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60
년대 농촌청년 참군기념사진을 보며

확실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내가 본 집체사진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앞줄에 앉은 사람들의 대개가 친척이나 사회에서 존중을 받는 대표적 인물들이다.
어느 날 필자는 사진을 정리하다가 1969년 12월에 <<제국주의 수정주의를 철저히 매장하자>>(徹底埋葬帝修)는 글을 새긴 집체사진에 눈길을 멈췄다.
 이 집체사진은 당년에 도문시 홍광공사 수남대대 7대(달라자마을)청년 김영화의 참군을 기념하며 찍은 것이다. 그때만도 누가 참군하면 온 마을의 경사로 동네가 들썽했으니깐 말이다.

총 32명에 그중 마을의 로농대표 4명(가족포함), 마을청년 16명, 지식청년(집체호)12인데, 앞줄에9명(주인공, 가족포함)의 대표적인물이 앉았다.
오늘 필자는 앞줄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제국주의 수정주의를 철저히 매장>>년대를 반추한다.(앞줄에 앉은 9명중 이미 6 명이 하늘나라 사람으로 되였음)

이야기는 왼쪽 첫 사람을 1번으로 9번까지 이어진다.

1,  <<대비판 첨병>> 장련귀(蔣連貴,)

지난세기 60년대 나라에서는 도시의 초중이상 졸업생을 조직하여 농촌에 보냈다. <<문화혁명전>>에는 이들을 <<하향청년>>이라 부르며 광활한 농촌에 가서 단련한다고 했고  <<문화혁몀>> 때는 <<지식청년>>이라는 부르며 농촌에 내려 가서 재교육을 받는다고 하였다.
1969년 4월 우리 마을에는 도문가도에서 조, 한족으로 조직한 <<집체호>>가 입적하였다.

장련귀(한족)는 그때 온 청년으로 말이 지식청년이지 기실은 소학생 3학년정도였다. 납자쌍둥이의 형으로  태여난 련귀는 키가 작고 체질이 약질(弱質)이며 자기의 코물마저 건사할줄을 모르는 <<매재기>>였다. 그는 집에서 놀다가 때로는 도문농장에서 양을 몰았다고 한다.

그런데 장련귀는 생산대 대비판회의 때마다 늘 선참으로 발언을 했는데 그는 발언할 때마다 <<우리 지식청년들은…>>을 반복하면서 상당한 지식청년의 신분으로 대접을 받으며 기치가 선명한<<대비판 첨병>>이란 별호를 가졌다.

문맹을 자랑으로, 대신 지식분자를 <<구린내나는 아홉째>>로 비판하고 로동개조를 시킨 <<문화혁명>>이  사진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 사진의 최금순(중간줄 오른쪽 네번째)은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서 재교육을 받았고 반문맹인 장련귀는 <<대비판 첨병(尖兵)>> 으로 우쭐거렸다. 언비(言秘)에 걸린 최금순이 <<정치불문>>으로 사람들에게 무시(無視) 당하던 그 모습이 정말 측은했다.

2, <<정신병자>> -한성훈(韓成勳)

한성훈(韓成勳)은 고중을 졸업하고 철도중학교에서 한어교직에 있다가 <<정신병>>이 라는 의심을 받고 실업을 당하고 집에서 놀았다고 한다. 그의 별호는 <<한선생>>, <<정신병자>>였다.

<<문화혁명>>때는 <<혁명>>을 멀리 하고 책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의심했다.수남마을에도 중문, 조문공부에 미쳐있는 열혈청년을 <<정신병자>>로 취급한 실레가 있다.한성훈은 실로 공부에 미친 <<싸쓰개>>(정신병환자)였다.

그는 글씨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수영도 잘했는데 그의 위병은 그가 농촌에 와서 의학을 배우고 자체로 자기 몸에 침을 놓으면서 완치하였다.
그는 라지오를 가지고 다니며 밤 늦게까지, 새벽 일찍부터 영어, 서반아어, 세계어, 로어… 등 외국어 공부를 견지하였다. 그는 기억력이 좋고 언변이 좋아 <<수호전>>,<<홍루몽>>을 하도 생동하게 이야기 하기에 웃동네 사람들까지 들으려 왔다. 특히 그의 속기법과 한어발음은 사람들을 놀래울 정도였다. 그가 중국공산당 9차대표대회보고를 방송을 한어로 듣고 기록하고 기록한 문장을 한자성조(聲調)까지 달면서 기록하여 대회에서 전달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때 저마다 혀를 차며 엄지를 내 흔들었다.
로동자 모집때 그는 도문벽돌공장공인으로, 다시 도문제재공장 중학교교원으로, 개혁개방이 초기에 길림성대외무역국에서 한성훈을 제 1호로 초빙해갔다.

2007년 필자가 한성훈이 <<길림신문>>에서 꾸리는 <<동북저녈>>의 편집으로 초빙되였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장춘에 가서 한성훈을 찾아 뵈였다. 필자는 지금도 한성훈의 의학필기장과 독서필기장을 수장품으로 보관하고 있다.

지식분자를 <<정신병자>>로 몰던 <<문화혁명>>을 생각하면 진정 소름이 끼친다.

3, <<주괄 아즈바이>>(猪官叔叔) – 오기활(吳基活)

오늘 따라 필자는 처음으로 용기르 내서 <<나는 달라자 공신이다>>를 말하고 싶다.
1963년에 필자는 도문중학(그때는 연길현4중) 제 16기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새농촌건설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발언을 했고 뢰봉학습모범으로 학교에서 입단을 하고 회향(回鄕)하였다.

 필자는 청년사업을 힘있게 틀어쥐여 달아자의 첫 단지부를 건립하고 단지부서기와 정치대장을 맡았다. <<농업에서 대채를 따라배우는>>운동가운데서 전 도문시에서 제일 먼저 집체우사를 돌로 지어 전시에서 보급했고 모택동저작학습반을 잘 꾸린데서 1964년 <<왕청현우수보도원>>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후 <<문화혁명>>때 백부가 억울한 모자를 쓰고 망나니들에게 타살되자 정치상에서 권리를 박탈하고5년간 생산대집체양돈장의 사양원을 맡았다. 그때 달라자양돈장을 성, 주, 시 전형이였고 필자는 주, 시 모태동저작학습선진분자로 대회에서 강용(大會講用)을 했다. 그때 필자의 별명은 오대장, 오서기, 오호장(집체호정치호장)이 라고 부르지 않고 <<주골아즈바이>>로 불렀다.
 글의 9번 (쇄지-김영철)에서 당년의 배경이 보충된다.

4, 농촌의<<수재>>- 최성욱(崔成旭)

최성욱의 별명은 농촌의 <<수재>>먼저 <<코대>>(코가 큰 사람을 가르킴)였다.
사람들은 한사람의 체구나 이목구비에 비춰 그의 별명을 곧 잘 짓는데 그때 달라자에는 <<최코대>>, <<리코>>, <<주코대>>가 있었기에 그저 <<코때>>라면 서로간 엇갈렸다.. 최성욱은 코큰 아버지(최석준)를 계승하여 어렸을 때부터 <<코대>>라 불렸다.
소학교문화수준인 최성욱은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렸고 독서를 즐기기로 조선문으로 번역된 세계명작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그때 동네서는 최성욱이 그린 화토를 빌려 가지고 다니며 화토놀이를 하였다

최성욱은 퉁소, 해금 등 악기를 잘 다뤘고 목수, 미장일도 능했다.  그래서 동네서 그의 별명을 <코때>>보다도  농촌의 <<수재>>라 하였다.
최성욱은 달라자의 첫 공청단원이며 민병패장, 생산대장을 지냈다. 사회주의교육운동때인 1964년에 그의 그림작품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가 수남대대 계급투쟁교양도편교재로 추천되여 타동네서 빌려다가 전시 하기도 했다.

필자보다 9년 년상인 최석준은 19살에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어 양자를 길렀는데 그의 아들이름을 필자가. 글 문(文), 밝을 철(哲)로 <<최문철>>이라고 지었다. 최성욱은 60이 넘은 나이에 돈벌이로 한국에 가서 페암으로 진단받고 집에 돌아와 타계하였다.

5, <<피똥싸개>>- 김철국(金哲國)

나의 아버지친구인 김철국의 별명은 <<피똥싸개>>에 <<감철국>>까지 둘이다.
<<피똥싸개>>는 그가 혈변(血便)을 본다는 질병에서, <<감철국>>은 지난 세기 50년대 문맹 퇴지 야학반에 다닐 때 김철국이 자기의 성 <<김>>이라고 쓴다는것이 <<감>>으로 쓴후부터 불려진 이름이다.

로빈농성분에 체격까지 우럭진 김철국은50년대부터 생산대 대장과 빈하중농대표로 활약하였다. 그는 기억력이 좋아 상급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기록도 없이 회의 정신을 빠짐없이 전달한데서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1958년 대약진 때 상급에서는 마을을 단위로 <<네가지 기발 뽑기>>경쟁을 벌렸는데 붉은색기는 공산주의사회를, 노란색기는 사회주의사회를, 흰색기는 자본주의를, 검은색기는 암흑한 봉건사회를 상징하였다. 그때는 <<사회주의 멀다더니 공산주의 눈앞이다>>며 5년이면 영국을 릉가하고 10년이면 미국을 따라 잡는 천만군의 기세로 <<약진, 약진, 대약진!>>을 부를 때다.

그때 우리 마을의 큰길 옆에 자동차바퀴쇠가마를 높이 달아맨 종(鐘)대에 검은색기발이 펄럭거렸는데 김철국대장은 <<한 대대에서 공산주의면 어떻고 봉건사회면 어떻냐…>>면서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는 실사구시한 사람이였다.

지난세기 60년대에 빈하중농대표인 김철국은 정치대장을 하는 필자에게 몇번이나  이런 말을 하였다.
<<오대장,신문이라고 하여 다 믿을것이 못되오, 신문이 도삽(거짓)입데…>>
사실은 이러했다.

1952년 조선전쟁이 폭발한후 조선의 모 밀수군이(성이 남씨로 기억됨) 밀수건으로 달라자에 있는 사돈(오세준)을 찾아 왔다. 그 때 조선전쟁때라 고도로 긴장된 대대의 간부들은 그를 <<조선특무>>(남로당)라 의심하고 다시 오면 붙잡기로 하였다.(그때 필자의 사촌형(오기품)이 그 밀수군의 심부럼으로 밀수폼을 운반해 줬다고 했다) 하루는 김철국이 배앓이병 도져서 길옆 널판자변소에 앉아 있는데 그 밀수군이 또 나타나자급히 바지춤을 올리고 나서 그자를 체포했다.

그런데 그후 신문에는 수남대대 민병련장인 송림마을의 안창렬이 달라자의 오세준세 집에있는 꿰짝속에 이틀간이 나 숨어서 그자를 기다렸다가 뛰쳐나와 직접 붙잡은 것으로 보도되였다는 것이다. 김철국의 얘기를 오랫동안 간직했던 필자는 이 글을 쓰려고 지난해 11월에 연변일보사 자료실에 가서 당년의 신문을 찾아 봤더니1952년 6월 19일자 <<동북조선인민보>>에 지승원의 그림으로 <<안창렬이 오세준네 꿰짝에 숨어서…>>는 련환화가 련속 3기로 발표되였다.
사진속에 한족솜옷을 입고 신끈도 없는 기운 왕바신(솜신)을 신고  등장한 김철국의 신분은 참군하는 아들의 아버지신분이다.

6 <<대 자란>>- 김영화(金英和)

김영화는 이 사진에 참군하는 주인공이다.
김철국의 큰 아들인 영화는 도문중학교(초중)를 졸업하고 회향하여 농사일을 하다가 참군, 퇴대후 농촌에서 추천받고 중등전업학교에 입학, 졸업후 도문시건설국계통에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퇴직후 영화는 한국에가서 용역으로 일했고 한국모 부문에서 조직한 응모작품에 입선되여 상금을 타기도 했다.
영화는 말수가 적고 글씨를 잘 쓰고 장기에 흥취가 있었다.
영화가 <<대자란>>(대어른)이란 별명을 얻게 되기까지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가 한번은 동네친척집에서 차린 <<약혼택>>잔치에 갔다가 심부름꾼으로 술을 사려 도문에 갔다가 영화구경을 하고 친구 집에서 밤을 자고 이틑날에 왔다. 술을 고대히 기다리던 동네 사람들이 너무나도 기가찬 나머지 <<그래도 그눔이 대자란이다>>며 자기를 달랬다. 

7, <<마우재>>  - 주성문(朱成文)

주성문은 60년대 중반에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이다.  그의 별명은 <주코때>>, <<마우재>> 둘이다. 얼굴모양이 쏘련사람 같다고 하여 <<마우재>>라 불렀다.
주성문의 얘기는 세가지로 이어진다.
<<깍쟁이 주코때>>
주성문은 언제나 남 먼저 남성들(그때는 자란들이라고 불렀다)의 개추렴을 발동하고는 자기는 번번히 빠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돈 때문이겠는데 술상에서 그를 <<깍쟁이 주코때>>라며 술안주에 올렸다.
김철국에게 당했다.
그 년대는 술이 귀하기로 <<배급이면 과부도 통장을 들고 다니며 술을 산다>>는 년대였다.

어느 하루 길닦이를 하는데 주성문이 손님이 와서 아침에 술을 마였다며 술냄새를 피웠다. 그에서 술냄새에 함께 일하던 남자들이 <<어디서 술냄새가 난다>>며 서로간  올라오는 술충을 달랬다.  이에 주성문은 자기가 술을 마였다면서 <<혼자 마여서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곁군들이 술생각을 잊어버리자 하면 그가  또 <<혼자서 마여서 미안하다>>를 몇번이나 반복하였다. 이에 처음에는 미안해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랑한다>>로, <<술군들을 골려 준다>>로 풀이를 하더니 나중에는 김철국(이 글의 5번)이 삽을 팽개치고 <<네게 혼자서 채웠(먹었)으면 채웠지  무순놈의 자랑이냐?!>>며 대판 싸움을 벌렸다.

장세날에 춤판을.
주성문은80로모가 사망되여 후사를 치른 날에 동네분들 앞에서 <<로모의 사망은 액상(厄喪)이 아닌 호상이다>>며 술상이 끝난후 먼저 나서 노래를 부르며 오락판을 벌렸다.
그때까지 모든 사망을 슬픔으로만 여겨온 필자는 주성문한테 호상(好喪)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호상이면 오락판을 벌려도 별문제인 풍속을 처음 알게 되였다.
필자는 주성문을 떠 올리면 술이 긴장하던 년대가 떠오른다.

8, <<따거즈>> - 최장국(崔長國)

최장국은 체격이 웅장한것으로 <<따거즈>>(키큰사람)란 별명을 가졌다.
 항미원조 때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군, 퇴대후 영예군인으로 조직된 왕청현 석현진 <<봉오동농장>>에 배치 되였다. 그후 남양(지금의 향양)에 이사를 왔다가 또 아래 마을인  달라자에 이사를 왔다.
최장국은 성질이 콸콸하였다. 한번은 그가 돼지새끼를 팔려고 도문시장에 갔다가 팔리지 않아서 그대로 수레에 싣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서  술독이 퍼졌던지 안산다리우에서 산 돼지새끼를 몽땅 북강물에 처넣었다.

또한 최장국은 필자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필자가 수남소학교에 다닐 때인 1953년 음력 정월 초, 어느 날 오후에 내가 휴식시간에 합작사(공소사)에 가보니 바로 필자의 아버지(오호준)와 최장국이 마른 명태를 사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는 필자에게 한대에 3전짜리 싸리연필 몇대를 사주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이번 만남이 최후의 만남으로 될 줄이야!

그날 아버지는 쌀을 찧으려고 수남정미소를 갔는데 최장국이를 만나 술을 마이고 갈라졌는데 후에 아버지는 수남우물의 내리막 길에서 쌀마대를 싫은 소수레에서 떨어져 수레바퀴에 깔려 과다출혈로 이틑 날에 사망되였다. 그 후로부터 필자는 최장국이를 보면 어린 나이에도 그가 술을 함께 마이고 술동무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지난 70년대 김철국(5호인물)의 생일에 다른 술상에서 일부러 필자를 찾아 와 술을 마이던 최장국이 <<오대장은 모르오, 내가 오대장의 아버지와(오호준) 제일 친한 사람이요…>>하며 옛이랴기를 하던 중 불시에 찰떡이 목에 메여 사망될 줄이야!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맺어진 최장국의 사망은 나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난 해 11월 23일에 필자는61년 만에 처음으로 최장국의 아들 최정록을 찾아가서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로 나누었다.(당시에 최정록이 외지에 있었다)

9. <<쇄지>>  -  김영철(金英哲)-

필자보다 한살 우인 김영철의 애명은 <<쇄지>(송아지)다. 이 애명은 그의 부모들이 영철이 우로 여러 자식을 몽땅 잃고 쌍스럽게 이름을 짛으면 좋다는 말에 <<쇄지>(송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집에서 귀하게만 자란 그는 자존심이 많고 사람들의 말로 하면 성질이 <<에지뿐>>(바르지 않다는 뜻) <<쇄지>>로 헐치않는 뿔이 난 <<쇄지>>였다.
그가<<에짓뿌>> 기로 소학교3학년 때 소선대 입대의식이 끝날 무렵 <<김일성이 김해 김씨다. 김일성장군이 우리 모다바이다!>>고  높이 웨친데서 사생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초중을 졸업한 영철이는 상대적으로 같은 또래들보다 일을 할 줄 몰라 생산대에서 평공을 하면 같은 또래에 비해 공수를 적게 받았다. 그래서 그는 <<에씨- 에씨>>하며 두덜대며 눈물코물을 흘렸다. 한 때는 농촌이 안착되지 않아 조선에 갈 궁리를 하였다.
필자는 영철이와 특별히 절친한 관계였다. 그가 농촌에 안착하지 않을 때 단지부서기인 필자는 자존심을 죽여가면서 그를 찾아 담화를 하면서 끝내 그의 입단소개인이 되여 그를 입단시켰다.

<<문화혁명>>때 필자는 달라자를 대채로 건설하겠다는 일념을 품고 대장사업을 하며 <<마구 지휘하는>> 대대간부들과 맞선대서 <<당의 말을 안 듣는 반혁명>>이란 모자를 썼다. 그리고 <<문화혁명>>초기에는 혁명조직(그때는 자발적을로 조직하는 반란파조직을 혁명조직이라 불렀음)에도 참가하지 않다가 썩 후에 김영철이 조직한 <<혁명을 틀어쥐고 생산을 촉진하는 전투대>> (抓革命促生産戰斗隊)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별 일이였다. 필자는 남보다 뒤늦게 혁명조직에 들었는데도 간부선거 때면   번마다 필자가 영철이의 상급으로 선거되였다. 아마도 이것이 <<쇄지>>의 자존심을 상하게 헸는가 본다.

<<쇄지>>는 승강심이 강하기로 호랑이 엉덩이마냥 누구도 그를 다치면 안되였다 .실례로 생산대 오송준과 최태욱이 그의 아버지(김종섭)의 력사문제 조사로 (당년에는 외조<外調>라고 했다)라자구에 다녀 왔다는 것을 알고 9년이나 년상인 오송준을 두들겨 패기까지 하였다.

알고보니 영철이는 필자를 자기가 승급하는 라이벌로 생각하였다. 한번은 그와 함께 술을 마이고깔래기(재낄래기) 놀음을 하는데 그가 필자한테 깔리자 일찍부터 맘속에  준비하고 있던 말인지는 몰라도 <<나는 너와는 한치의 땅도 다툰다(寸土必爭)>>면서 달려 들었다.그때부터 필자는 (네가 나와 죽기내기로 경쟁하는구나!)를 알게 되였다.

그후 <<문화혁명>>이 군중조직간에 대련합을 할 때 필자와 반대조직의 우두머리인 최동우(崔東宇)가 홍광공사련합회 체1책임자로, 필자가 수남대대 제1책임자로 선거되였다. 지금 생각하면 영철이는 혁명조직을 창건한 조직자로 필자의 자리가 응당 자기가 차지할 자리라고 생각한것같다. 그래서 대련합후에 영철이는4명으로 된 비법적인 조직인 <<자발군중전정소조>>를 건립하고 (필자는 그가 서춘권(徐春權) 등 딴 심보를 품은 필자의 정적(政敵)들에게 리용되였다고 생각된다) 서춘권, 김영철 등 <<자발군중전정소조>>에서는 필자의 백부(오광준)에게 <<조선특무>>라는 억울한 모자를 씌우고 다른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투쟁대회를 조직하였는데 목적이 있게 당일 저녁에 백부를 타살하였다.(이틑날 홍광공사 해당책임자들이 회보를 받고 즉시 와서 시체를 검사하고 타살로 인정, <자발군중전정소조>를 비법적인 조직으로 선포하고  해산시켰음)

백부가 사망된후 백부문제가 정형(定性)되지 못한 정황에서 필자는 회의에 참가할 권정치적권리까지 박탈당하고 생산대 양돈장에서열심히 일했다. 그후 영철이는 수함소학교에서 빈하중농대표로 서기나 교원(당년에 貧敎라고 불렀다)을 파견할 때 빈교로 추천되여 인생을 바꾸었다. 그때 백부문제가 아니라면 빈교(貧敎)는 긍정코 필자의 몫이였다.

영철이는 필자의 백부를 때려 죽인 것으로 량심의 가책을 받은 것 같다. 례하면 그후 필자가 연변농학원을 졸업하고 홍광공사수의소 소장을 지낼 때 전국적으로 <<문화혁명>>때 비판, 투쟁을 받은 사람들의 억울한 모자를 벗겨주는 평판(平判)대회에서 필자가 수해자가족의 대표로 발언하였는데 그후 영철이와 단 둘이서 술을 마시는 장소에서 영철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너는 정말 대단하다, 만약 내가 네 처지였다면 가만히 잊지 않았을 것이다>>며 울면서 반성하였다.

그후 영철이는 수남소학교교원, 도문시 병원의 회계를 하다가 간암에 걸려 50대 나이에 사망되였다.
필자는 지금도 그의 사망을 팔자 백부사망과 련계시키며 그가 스트례스를 받은 것으로 암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문화혁명>>을 반추하면 그때 비판,투쟁을 받은 피해자나 가해자나 모두 <<문화혁명>>의 피해자라고 필자는 말한다.

지금 필자의 앞에 놓인 <<수정주의 제국주의를 철저히 매장하자>>는 실로 지나온 시대의 축소판으로 등장한 인물들이 당년에 손색없는 시대의 배우들이다.
반우파운동, 대약진운동, 사회주의교양운동, <<문화혁명운동>>을 두루 겪은 필자는 <<제국주의와 수정주의를 철저히 매장하자>>던 력사의 한페지를 번지는 이 순간 력사를 잃는 것은 오늘에 대한 배반이며 력사를 기록하는 것은 지나온 그릇된 력사를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는 이글을 빌어 영철친구를 비롯해 저세상에 계시는 6명의 친인들에게 먹고 쓰고 살기에 걱정없는 오늘의 행복한 생활을 자랑을 하며 억울하고 쓰라린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하며 그들의 명복을 빈다.

오기활 (2015 1 25일 도문서)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손강은 우리 부녀의 구명은인이라오”  안도현공상국 회의실에는 “죽어 가는 사람을 구하고 부상당한 사람을 도와준 간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어려울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공상간부의 풍격을 보여주어”라는 글발이 적힌 두폭의 금기가 걸려있다. 심수의 장애민씨가 ...
  • 2014-03-27
  • “돈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다.마음이 풍요롭고 넉넉해야 진정한 부자이다.” 주위 로인들한테 남다른 사랑을 베풀고있는 연길시 건공가두 장해사회구역 로인협회 김금복회장(64살)의 나누는 삶의 신조이다. 설명절을 앞두고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병원나들이를 하면서도 로인들 걱정으로 잠못 이룬다는 그를 만난...
  • 2014-03-27
  •  가목사시조선족중학교 김금녀선생님의 이야기      부모들의 기나긴 타향살이로 부모사랑에 굶주린 학생들을 놓고 말하면 김금녀교원은 담임교원이자 어머니이고 교육자이자 친구였습니다.      1990년 흑룡강성조선족사범학교 한어학과를 졸업한 그는 가목사시조선족중학교...
  • 2014-03-26
  • 연길시 리화촌에 자리잡은 향토식품공장, 3000평방메터 뜰안에 500여개 장독 줄줄이 연길시 리화촌에 자리잡은 향토식품공장 안뜰의 봄해살이 감빛으로 물들고있다. 이곳에서 아스라한 기억속에서나 떠올릴수 있는 전통장독들을 만날수 있다. 마당 가득한 장독, 마당 그득한 해빛, 투박하지만 정겨운 항아리들이 묵직한 된...
  • 2014-03-24
  • 《리춘자장학금》설립 및 제1회 장학금 수여식 영길조1중에서     교우 박철(오른쪽1)장학금시상식장에서 장학금 수상생들과 함께     2014년 3월 17일, 영길현조선족제1중학교에서 교우 박철의 어머니 이름으로  명명된《리춘자장학금》설립 및 제1회 장학금 수여식이 있었다. 영길조1중 교우인...
  • 2014-03-19
  • 요즘은 개성시대이다. 남들과는 다른 매력, 다른 특점들을 가진 사람들이 경쟁력을 가지는것만큼 가족들도 각자의 개성이 뭉쳐 더 탄탄하고 경쟁력있는 가정을 이룰수 있다. 나는 지금부터 우리 집의 개성과 가족을 소개하려고 한다.     “기부천사”   오늘도 길가에 서있는 거지를 보자마자 지...
  • 2014-03-19
  •     지난  3월13일, 78세인 최인숙할머니는 연길시 건공가두 장생사회구역을 찾아와 어렵게 살아가던 세월에 도움을 많이 준 이웃의 “주임”을 찾아 달라고 청들었다.    1978년, 최할머니가 흑룡강성에서 연길에 이주해와 쳘남의 룡남가두에 살게되였다. 지체장애인 아들과 손녀...
  • 2014-03-17
  • 흑룡강성 상지시의 김금란(45세)은 《명가떡집》을 꾸려 딸 류학공부를 시키고있다. 한국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 돈벌 생각만 하지 말고 한가지 기술을 배워야 하겠다고 생각한 김금란은 떡집에서 떡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김금란은 귀국하여 동서가 꾸리는 떡집에서 배운 기술을 더 익히다 동서가 떠나고 그 떡집을 인계...
  • 2014-03-17
  • 왕뤼와 그의 아내 자오웨이웨이는 아기가 태어난 후 처음으로 해외로 휴가를 가게 됐다. 22개월이 된 아기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에 신이 난 부부는 장인장모까지 초대해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다. 성공한 경영컨설턴트인 왕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바쁜 업무에서 벗어나 일주일 간 휴가를 냈다. Drew Kelly for the Wa...
  • 2014-03-16
  •  심양시조선족산거지구로인련합협회 남세옥할머니의 가족사랑    일전 심양시조선족산거지구로인련합협회는 “3.8” 부녀절 경축행사에서 본협회의 남세옥할머니(79)를 “모범녀성”으로 선정하고 표창했다.   남세옥할머니는 중풍에 걸린 시어머니를 18년, 뇌졸증으로 앓던 남편...
  • 2014-03-14
  •   날이 춥다. 경칩이 지났지만 밖에는 여전히 찬바람이 몰아친다. 주말내내 방안에 콕 박혀있다가 심심풀이 삼아 오래만에 펼쳐든 사진첩, 그속에 흑백사진 한장이 눈길을 잡아 끈다. 뿌연 담배연기사이로 저가락이 휘어져라 두드려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앞에서 예사롭지 않은 춤사위를 선보이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
  • 2014-03-14
  • 황혼의 노을 보다 아름다와 - 전 화룡시인민법원 정치처 주임 윤동길씨 화룡시인민법원에서 정치처 주임, 당조성원을 담임하였던 윤동길(65세)씨는 퇴직후의 인생을 의의있고 다채롭게 보내고있다. 국가4급 고급법관인 윤동길씨는 퇴직한후 자신의 전문기능으로 사회를 위하여 적극적인 기여를 하고있다. 퇴직후 그는 줄곧...
  • 2014-03-14
  • 동북군정대학 60주년 합영. (세번째줄 좌로부터 일곱번째가 아버지 신청송임) 사람들은 흔히 자식들을 따스한 품에 안아주시고 살뜰히 쓰다듬어주시는 어머니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비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자식들을 지켜주고 이끌어주는 아버지를 우뚝 솟은 높은 산에 비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를 낳아주고 생명의 젖...
  • 2014-03-13
  • 21살, 최진영의 하루는 로어에서 시작해 로어로 마무리된다. 잠자리에 누운채로 하고싶은 이런저런 말들을 로어로 해보고 혹시 발음이 꼬이면 수없이 반복해 만족스러워야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일어난다. 식구들과도 로어로 아침인사를 하고 학교갈 준비를 하면서 부딪치는 생활용품들도 모두 로어로 한번 되새겨본다. 로...
  • 2014-03-11
  • 아들들의 안내로 성형병원을 찾은 83세 고령의 김경숙할머니(왼쪽 두번째) 《3.8》국제부녀절을 맞으면서 환갑을 넘긴 60대 아들이 83세 로모에게 미용성형수술을 시켜드린 이야기가 훈훈한 미담으로 전해지고있다. 지난 2월 하순, 50~60대 두 남성이 한 할머니를 모시고 연길시에 있는 동창림의학미용병원에 찾아왔다. 80...
  • 2014-03-10
  • 황림봉이란 이름이 우리한테는 익숙치 않다. 하지만 검색창에 “중국소년패”와 함께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의 기사들로 도배된다. “조선족의 대표적인 무용가운데 하나인 상모춤, 국가급 무형문화재인 상모춤을 널리 알린 꼬마”, “웃음이 사탕처럼 달콤한 꼬마” , “세상에서 나...
  • 2014-03-10
  • 《3.8》국제부녀절을 맞으며 한국에서 일하시는 어머니께 감사의 인사와 명절을 축하드림과 아울러 지극정성으로 어머니의 자리를 메워주신 아버지께 진정 공훈메달을 드리고싶습니다. 부모님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로 태여나 28년 동안 곱게 자란 저입니다. 제가 부모님의 곁에 오기까지 아주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 2014-03-07
  • 연길시항정복장유한책임회사 최영희경리의 일가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소규모의 기업을 중등기업으로 키워 나만의 특색,나만의 스타일로 갖춘‘영이네"브랜드를 세상에 더 널리 알리고싶고 장애인으로서 장애인을 돕기 위한 사업에도 최선을 다 하고싶어요” 4일,사무실이전준비로 눈코뜰새없이 바...
  • 2014-03-06
  •  연길 “흑기사” YES다 뷰티샵 사장 리화씨의 일가견      사진은 고객과 상담하는 리화사장(오른쪽)     이미지변신을 위해 며칠전 원래의 긴 생머리를 짧은 웨이브로 바꿨다는 헤어스타일, 하얀 셔츠에 긴 베이지색 민소매가디건을 바쳐입은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패션, 반달눈...
  • 2014-03-06
  • “음식업은 맛을 유지하는것이 관건입니다. 그리고 손님들에게 량호한 봉사를 제공해주는 동시에 복무원들에 대한 인성화관리도 절대 소홀히 할수 없습니다.” 이는 리해옥장국왕 체인점을 운영하며 창업의 희열을 만끽하고있는 박영춘씨(32세)의 창업경험이다. 2월 25일, 기자는 연길시진학파출소 서쪽켠에 자리...
  • 2014-03-06
‹처음  이전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