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일요일 남자>>송해 중국에는 <<두만강반의 녀자>> 임봉금.
건국 전에 아들을 업고 입단선서를 한 90세 로인의 인생스토리
4월 17일, 연변의 <<독서왕>> -송해숙(76세,연변제4기독서절 최고년령수상자)이 조직한 도문의 <<독서3자매오찬파티>>에서 큰언니(임봉금,90세)가 술을 부으며 하는 말(말씀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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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술은 우리 신랑이(김영덕,92세, 사냥, 낚시달인) 잡은 범뼈에 웅담, 사향, 우황, 구렁이 등 보약으로 자작한 장수술 입니다. 우리 량주는 장수술 덕뿐에 다리나 허리가 아픈 줄을 모릅니다. 여러분도 이 술을 마이고 장수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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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랑이 불편(지난해에 큰 아들이 요절한후 심리타격으로 치매에 걸렸음)하기에 여러분을 집에다 모실수 없습니다. 이달 25일 11시 반에 스포츠회관에 꼭 오세요, 내가 한턱 낼게요.>>
뒤이어 그는 <<공산당 만세!>>와 <<여러분의 장수를 위하여!>>를 높이 외치며 건배하였다.
자리를 한 모두가 박수갈채를 보내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감탄을 되풀이했다.
아들을 엎고 입단선서를
임할머니의 기억력은 대단하였다.
이하는 필자의 물음에 <큰언니>>의 화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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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충청남도 금산에서 출생하여 일본소학교를 5학년을 다니다가14살에 부모를 따라 흑룡강성 의란현 흥성촌에 왔습니다. 조선서 학교를 다닐 때 매달에 17전씩 내는 월사금이 없어서 교장선생님네 집에서 심부름 꾼으로 일을 하였답니다. 소학교6학년은 중국에서 다녔는데 그때 6학년학생이 4 명이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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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집형편이 궁하여 하루라도 빨리 시집을 가서 밥이라도 변변히 먹으라는 부모들의 말에 혼사말이 떨어지자 10일 만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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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나자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흑룡강성 벌리에서 도문을 왔는데 그때 나의 재산이란 령감과 시부모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선도 못 가고 남양(조선)을 다니며 밀수를 하고 명태장사, 엿장사, 싹기음으로 푼돈 벌이를 하였습니다. 령감이 하도 손재간이 좋은 덕에 철공소야장일로 가정을 지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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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의 남녀평등, 인권평등교육이 내 마음에 확 들었습니다. 언권이 없고 평등이 없던 나에게 언권과 평등이 있으니 힘이 나더군요. 그래서 선뜻이 나서서 가도공작을 했는데13년이나 1전 도 받지 않고 신화가 부녀주임과 치보주임을 하였습니다. 1949년 4월 말에 중국민주주의(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 했는데 두살짜리 아들을 엎고 입단선서를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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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에 가도정부의 추천으로 도문화확공장에 들어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한달 로임을 23원씩 받았는데 나는 29원씩 받았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가도에서 나의 감정을 잘해 준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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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랑이 사냥을 잘하는 덕분에 하룡원수도 만났고(1964년 하룡원수가 조선을 방문하고 귀국길에 도문을 지날 때) 주덕해주장, 조남기서기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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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퇴직금이 2200원이나 되는데 공산당에 감사를 얼마나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큰절을 올리며 감사를 드려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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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겠소>>
임봉금의 건강은 직접 보고 듣지 않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2009년 3월에 필자가<<50년대 명포수 오늘은 뢰봉>>이란 글을 쓰며 그의 남편 김영덕을 취재할 때 임봉금할머니 한테 하루의 일정을 물으니 이렇게 소개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꽃을 가꾸고 아침식사후에는 령감과 함께 동네청소를 하고 오후엔 한참 음악을 감상하고 둘이서 뽀뽀도 하고 신문잡지를 읽고 나서 령감은 실내서 (건신기에서)걷고 나는 매일 두만강변을 돌고…>>
<<걸어야 장수한다>>는 그의 신념이며 향수란다. 매일 걸어서 노래강습실이나 로인활동장을 다니며 혹시 젊은들이 택시를 타자고 해도 젊은이들이나 타라며 한번도 안탔단다.
그의 건강비결을 이런 세가지란다.
먹거리가 건강해야 한다.
매일 주식이 현미, 귀밀, 율무, 옥수수 등 잡곡에 당근, 양배추, 양파를 넣고 된장(발효식품)을 풀어 죽을 만들어 먹고 잠을 자기전에 <<장수술>>을 마신다. 과식은 절대 안 한다.
운동을 견지한다.
매일 발꿈치로 나무몽둥이(운동용)를 2000번씩 차고 두손에 힘을 주어 배를 3000개씩 두드리는 것을10여 년 이상을 견지했다.
4월부터 10월 말까지 매일 두만강변을 한 바퀴 걷는것을 십몇년을 견지했다. 한편으로 가고 싶은 강넘어 그리운 고향을 그리며 가슴속에 간직한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심리가 좋아야 한다..
시집부모를 잘 모시고 (시아버지가 90세에 사망) 자식농사를 잘하며(네 아들이 대학생, 공정사) 맡은 사업을 잘하고 동네의 일을 잘 돌봐야 한다. 심지어 동네사람들에게 부담을 안 주려고 당신들의 금혼잔치에도 친척들만 모셨다.
<<죽어도 원망이 없소!>>
신문잡지는 그의 매일 동무란다. <<로인세계>>와 <<로인의 벗>>은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한기도 빠짐없이 통독을 했다.
80에 <<80인생>>이란 시를 <<새출발>>잡지에 발표했고(사진제공) 그가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잘 살아보세>>도 그가 작곡작사를 하였다.
필자가 노래가사를 물으니 자기는 작곡작사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저 생각나는 말에 곡을 붙힌것이라며 노래를 해야 가사를 안다며 노래를 불렀다.
필자는 그의 노래에 따라 가사를 기록했다.
인생살이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
이 좋은 세월에 잘살아 보세
청실홍실 맺은 사랑 해달같이 오래오래
원앙처럼 잘살아 보네
랑군님 손목잡고 어디 가나 함께 가세
인생살이 만리길을 웃으면서 걸아보세
공산당에 감사드리며 오래오래 잘살아보세
(필자는 미안해서 가사대조를 안 청했음)
<<큰언니>>는 필자의 손을 잡고 <<내 인젠 죽어도 원망이 없소!>>며 이런 사연을 말하였다.
그에게 그가 십수년을 지켜본 10년 년하인 <<몽고로친>>(김영희,80)친구가 있다.
<<몽고로친>>은 인물이 곱고 마음씨 곱으며 늘 남에게 베풀고 노래도 잘하고 손맛도 좋으며 성질이 활발하고 글씨도 잘 쓰기에 <<아무튼 좋고 잘하기로 흠을 잡을 데 없다>>
특히 탄복된 것은 <<몽고로친>>의 구지욕이다.
소학교출신인 영희는62세에 한국에 갔다가 10년간 일하고 돌아올 때 72세 나이에 이제부터 평생해야 할 일을 공부를 선택하고 돌아올 때 한석봉의 <<천자문>>을 사가지고 왔다.
김영희는 집에 돌아온 후 매일 천자문을 쓰고 읽고 외우면서 열심히 학습한데서 지금은 친필로 쓴 <<천자문>>을 책으로 만들어 남들에게 선물한다. 김영희는 또 흘러간 노래와 속담을 정리하며 하루 평균 2시간 학습을 견지한다.
<<나는18년간 로인세계를 한기도 빠짐없이 보았는데 몽고로친과 같은 사적을 보지 못했습니다.>>
<< 내가 죽기 전에 김영희의 사적을 세상에 알려야 원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송로친에게 김영희를 소개했는데 오선생이 김영희의 사적을 신문, 텔레비, 로인세계잡지에 발표했으니 인젠 죽어도 원망이 없습니다.>>
임봉금할머니는 필자의 두손을 꼭 잡고 그냥 고맙다면서 오는 25일에 한턱 낼 테니 11시 반전에 꼭 스포츠회관에 오라고 몇번이고 당부했다.
필자는 우리 민족의 훌륭한 인물을 세상에 알려야 죽어도 원망이 없다는 90할머님의 민족의 책임성에 머리가 숙여졋다.
임봉금이야말로 맛있고 멋있는 한권의 인생작품이였다..
필자는 한국의 <<일요일 남자>>- 송해와 <<두만강반의 녀자>> - 임봉금을 우리 민족의 <<로인모델>>과 <<장수오누이>>로 만방에 추천한다.
오기활
사진설명
1,임봉금인물상,
2, 임봉금의 시
3, 도문의 <<독서삼자매>> (왼쪽으로부터 김영희, 임봄금, 송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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