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에 마흔다섯 살 주부의 고민이 한 줄 올랐다. 몇 십 년 만에 나간 초등학교 동창 모임. 한 남자가 "네가 나의 첫사랑"이었노라 고백했단다. 외모와 직업 번듯한 데다 자상하기까지 해서 모임 끝나고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더란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는 물음에 댓글이 와르르 달렸다. 부러움 섞인 글도 있지만 '꿈 깨!'라는 조언이 갑절로 많았다.
▶이런 댓글도 있다. "저도 30년 만에 사은회에 나갔더니 '네가 첫사랑이야' 속삭이는 남자 있더군요. 그래서 '얘, 고백을 하려면 그때 했어야지, 왜 다 늙은 이제 와서 하니?' 면박을 주고는 '얘들아, 얘가 글쎄 날 짝사랑했단다' 하고 외쳤답니다." 봉변한 그 남자 누군지 몰라도 두 번 다시 동창회에 걸음하진 않았으리라.
▶장석주의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은 구구절절 중년 남자를 울리는 시(詩)다. 특히 마지막 시구가 그렇다.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첫사랑이 뭐길래 버나드 쇼는 '약간의 어리석음이 더해진 호기심 덩어리이자 감당할 수 없는 열병'이라고 했다. 아인슈타인마저 '첫사랑같이 중요한 생물학적 현상을 어찌 화학이나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첫사랑의 환상은 남자에게 더 강력한 모양이다. 경찰이 여자 동창을 사칭한 전화를 걸어 110억원 넘게 돈을 챙긴 보이스피싱 조직을 적발했다. 8만5000명에 이르는 피해자 대부분이 50대 남자다. 한 남자는 "친구야 반갑다"며 전화를 걸어온 여자가 "6학년 때 짝꿍인데 이혼한 뒤 딸 하나 키운다"는 말에 솔깃했고, "잡지나 블랙박스 하나 사주면 소주 한잔 사겠다"는 말에 덥석 송금했다고 털어놓았다.
▶불혹(不惑)이라는 마흔만 넘어도 여자는 세상에 별 남자 없다는 걸 깨닫는데 남자는 왜 그리 첫사랑에 목을 맬까. 오스카 와일드 말처럼 '남자들의 꼴사나운 허영심'일까. '아이 러브 스쿨' 열풍이 SNS로 옮아간 걸 보면 첫사랑 찾기에 대한 열망, 식지 않았나 보다. 오죽하면 '밴드 십계명'에 '예쁘고 잘생긴 동창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서로가 협력하여 경계한다'는 조항이 있을까. 하여간 남편에게 잔소리할 거리만 하나 더 늘었다. '친구야 반갑다'며 걸어오는 여자 전화는 대꾸도 말고 끊을 것. 설령 첫사랑을 만나더라도 정신 바짝 차릴 것. 파도 치는 바다에 뛰어들어본들 그대를 기다리는 건 장렬한 익사(溺死)뿐이니.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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