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님 사랑
태명숙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이다.”란 말이 있다. 시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나로서는 이 말이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다.
내가 23살 꽃나이에 꽃너울 쓰고 박씨가문에 시집 온지도 어언 2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옛날부터 한동네 혼사는 힘들다고 했건만 나는 복받은 녀자인지 한동네 사시는 아버님의 며느리로 박씨가문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만천하에 혼자서 며느리를 삼는것처럼
아버님은 동네방네 일등며느리를 삼았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며 다니셨다.
결혼 며칠후 어느날 점심무렵, 아버님은 조용히 날 불렀다. 그러더니 품에서 저금통장 하나를 꺼내 내앞에 놓으시는것이였다.
“아가야, 이 통장은 네거란다.”
“아버님, 제 통장이라니요?”
그때까지 나에게 저금통장이 있을리가 없는 나는 말똥말똥한 두눈으로 아버님을 쳐다보았다.
“내가 애기에게 주는 마음이란다. 어서 받거라.”라고 하면서 통장을 내 손에 쥐여주시는것이였다. 금방 시집 온 나로서는 그냥 아버님께서 소비돈으로 얼마간 주시는줄 알고 쑥스러워하며 받았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살며시 통장을 펼쳐보았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백원, 천원? 잉? 아닌데… 내가 잘못 보았나?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다시한번 훑어보았다. 얼추 동그라미가 여섯개나 들어있었다. 만원, 천문수자 만원짜리 통장이였다. 나는 놀라서 눈을 말똥히 뜨고 아버님을 쳐다보았다.
“아가야, 이건 내가 평생 모은 돈이다. 앞으로 신혼살림에 보태라.”
아버님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셨다. 나는 어정쩡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안절부절했다. 아버님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을 나한테 넘기다니? 나는 손에 쥔 통장을 아버님께 도로 드렸다.
“아버님, 저 이렇게 큰돈을 못받아요. 아버님이 일생동안 아껴쓰며 모은 돈인데 제가 무슨 자격으로 이 돈을 받아요? 그 마음만 받아도 전 행복해요.”
“이 집에서 네가 이 돈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지. 박씨가문 삼대집 맏며느리지 않냐? 앞으로 네가 박씨가문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에 비하면 이 돈도 많은것이 아니지. 어서 받아라.”
난 코마루가 시큰해났다. 시아버님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소곳이 고개를 돌렸다. 농촌에서 사는 농민한테 만원이란 얼마나 큰돈이였던가!
90년대초는 전국이 만원호를 목표로 할 때였다. 농촌에서 어느 집이 만원을 벌면 떵떵거리며 부자소리를 듣게 되고 거기다가 “만원호”란 이름으로 신문이나 방송에까지 나던 시절이였다. 그러기에 만원은 농민이 한평생을 아껴쓰고 아껴먹어도 손에 한번 쥘듯말듯한 엄청난 큰돈이였다. 그 큰돈을 내 이름으로 통장에 넣어 맡긴다니…
시아버님의 며느리 사랑은 남달랐다.
결혼휴가가 끝나고 출근이 시작되였다. 내가 출근하는 직장은 진소재지에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십여리쯤 떨어진 기차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가야 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시집에서는 오토바이까지 사주셨다. 시아버님과 시어머님은 나의 출근시간을 맞추느라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셔서 밥을 해놓고는 나를 깨우군 했다. 내가 밥 먹을 사이에 아버님이 내가 추워한다고 먼저 나가서 오토바이시동을 걸어놓고 내가 오토바이에 앉으면 대문까지 열어주셨다.
“조심해서 운전해라!”
아버님은 어느 한번도 이 말을 잊지 않으셨다.
원체 꼼꼼하지 못하고 덤벙대는 성격인 나는 거의 매일 갖춰준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출근준비에 집안을 발칵 뒤집었다.
“내 목도리 어데 갔죠? 내 장갑은 또 어데 놓았죠? 내 양말은? 내 열쇠 못 봤어요?…”
이렇게 소란을 떨며 온 집안을 복새판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평온하던 시집에서는 우리가 결혼한 이후로 련 며칠 이런 곤혹을 치렀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내 책상우에 목수건, 장갑, 양말, 열쇠 등등이 차곡차곡 정연하게 놓여있었다. 시아버님이 아침이면 허둥대는 나를 위해 사전에 준비해놓은것이다. 난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났다. 이렇게 나의 부족함은 시아버님의 자상한 배려와 사랑 속에서 차츰차츰 고쳐졌다.
달콤한 신혼생활은 빨리도 흘렀다. 결혼 삼년째에 나는 딸애를 출산했다. 어느 집안인들 안 그러랴만 그때만 해도 아들을 선호하는 시대여서 은근히 아들을 기다렸을것이다. 난 차마 시아버님을 마주볼 체면이 없었다. 그런 나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듯 시아버님은 얼굴에 서운한 기색 하나 없이 환하게 웃으시며 먼저 말을 건넸다.
“수고했네. 에미야, 딸이 더 좋지.”
퇴원후 산후조리가 시작되였다. 아버님은 산모가 잘 먹어야 된다며 십오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이틀에 한번씩 자전거를 타고 진에 가서 싱싱한 고기와 채소를 사왔다. 산후조리하는 4개월 동안 나의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시아버님은 내가 집에서 통근하는것이 너무 힘들어한다면서 직장부근에 세집을 맡아주었다. 그리고는 석탄과 불쏘시개까지 마련해놓고 저녁도 드시지 않고 부랴부랴 우리 세집을 떠났다.
“아버님, 저녁을 드시고 가세요.”
“집에 가서 먹으면 돼. 너무 늦기전에 가야 돼. 집에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 않나.”
십오리 길을 자전거 타고 가시는 시아버님의 마음을 난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이 며느리가 바빠할가봐, 힘들어할가봐 밥 한숟가락 들지 않고 총망히 떠나시는 시아버님의 뒤모습을 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세간살이하던 어느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저녁준비를 하려고 랭장고문을 열었다. 그런데 붉은 비닐주머니가 랭장고안을 가득 채우고있었다. 분명 내가 넣은건 아닌데… 갸우뚱하며 꺼내보니 깨끗하게 손질한 닭 한마리 그리고 찹쌀까지 들어있었다. 비닐주머니에는 글쪽지 하나가 붙어있었다.
“얘들아, 래일은 너희들의 결혼기념일이다. 축하한다! 닭을 잡아왔으니 닭곰 맛 있게 해먹어라.”
바쁘게 사느라 우리도 잊은 결혼기념일을 시아버님은 잊지 않고계셨다.
(아버님두 참…)
며느리에 대한 곡진한 아버님의 사랑, 난 자상한 시아버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목이 메였다.
시아버님은 맛 있는 음식이 생겨도 먼저 이 며느리에게, 좋은 옷도 먼저 이 며느리에게, 값 비싼 가전제품도 먼저 우리에게 돌렸다. 그리고 시아버님은 우리에게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것만으로도 만족해하셨다.
그렇게 시아버님은 이 며느리에게 온갖 사랑을 다 주고는 조용히 저세상으로 떠났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자식이 점점 커갈수록 느껴진다. 우리 부부도 앞으로 시아버님같이 자식들에게 사랑을 쏟을수 있을가?
맛 있는 음식을 먹어도, 남편과 함께 려행을 가도, 명절에 친척들이 단란히 모여앉아도 나의 눈에는 언제나 시아버님의 모습이 밟힌다…
<청년생활>잡지 2016년 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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