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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생은 류씨가문의 주석입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2월3일 08시35분    조회: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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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 시집가문의 튼튼한 세대주ㅡ 2급지체장애인 최원

도문시 옥림1구 최원( 54,)이  류봉군(한족, 60)과 결혼한지도 어느덧 25년이다.
원근에서 최씨네를  “안해머리 남편다”민족단결가정”이름짓고 이들의 미담을 꽃피우고있다.
일전에 필자는 이가정을 인터뷰하였다.
“무엇무엇해도 지난 8월에 딸애가 자기 뜻대로 <<중국해양대학>>연구생에 붙은 것이 제일 큰 자랑 이지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 래일은 딸(류설영)의 생일(12월 24일)이라며 최원씨가 가문의 최대 자랑거리로 화문을 열었다.

인생의 강자 마음의 부자

행복은 《무》에서 《무》을 찾아내고 《가난》에서《만족》을 느낄 때 이루어지며 행 복은 포함된 불행을 용해시키는 불 같은 노력에서 이뤄진다.

2급 지체장애자 최원씨의 인생살이가 이를 증명한다.

최원은 3 살때 소아마비에 걸려 지금도 층계를 오르자면 돌아앉아서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엉뎅이 층계에 올려놓고 한층한층 오르는 2급장애인이다.
2013년 12월 21 일, '감동중국조선족걸출인물' 오기철씨가 생화를묶음을 가지고 특별행사로 최원(우)을 방문하였다

최원이 학교를 다닐 나이에 아버지가 “성한 사람들도 농촌으로 가는 세월에 걸음도 못하는 그 병신에 무슨놈의 공부냐?”며 “걸음 연습이나 하라”며 호통치기에 학교에 다닐 엄두를 못 내다가 “병신일수록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주장으로 11살에 소학교에 입학하여 조선반 2년, 한족학교 2년을 다녔다.

최원은 어머니가 버팀목이되여 남들이 도저히 상상할수도 없는 뼈를 깍아내듯한 고통을 참아내며 독학을 견지하여12 년 4개 월만에 영어중급, 일어 고급료증, 연변대학 본과졸업장 (통신학부), 북경언어문자 대학졸업장(통신학부)을 따냈다.

최원은 일찍부터 홀로서기를 하겠다며 수출품코바늘 뜨개를 뜨고 문화용품공장에 서 반제품을 가져다가 책을 매는 삯일도 하였고 영어공부 유치원을 꾸렸지만 생각 대로 벌이가 안되여 취직을 하려고 시민정국, 중국복리기금회 등박방회장을 만나 려고 북경까지 다녀 왔는데 그가 찾은 곳마다 “그 몸을 가지고 무슨 직업이냐”며 5년이고 10년이고 집에서 기다려 보란다.

1996 년10월, 최원은 출국준비를 하는 조카한테 영어를 배워주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영어공부를 시키던중 아이디어가 생겨 외국어강습반을 꾸린다는 광고를 했더니 생각밖에 학생들이 많았다. 이에 신심을 얻은 최원은 혼자서 “최원단란글방(영어,일어, 한어, 조선어)”을 꾸리고 전국을 대상하여 홈페지에 올렸더니 생각밖으로 지원학원생들이 많았다. 20 년간 중소학교 학생외2000여명의 성인학원생을 양성하여 15개 나라에 출국시켰다.

지금 최원은 120 평방메터짜리 아빠트에서 《최원단란글방》 을 운영하는 외 쟁취한 대부금으로 방치되였던240 평방메터짜리 유치원을 사서 교사로 사용하던 건물을 목역탕으로 개조하고 자기의 이름(崔源)으로 작명한 “원산샘목욕탕(源山泉浴湯)”을 경영하고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정부에서는 최원에게”자강모범”, ”민족단결모범” 등 영예를 수여하였다.중국 매체를 통하여 최원의 사적을 알게딘 한국 MBC 텔레 비방송국에서 수년전에최원의 사적을 드라마로 펴내겠다는 청원을 해당부문에 보내왔다.

그들의 만남

1990년도 거의 막가는 어느날이다. 사영기업회사에서 비서처 처장직을 맡고 열심히 일하는 최원이를 친구인 추월이가 헐레벌떡거리며 찾아와 다짜고짜로 최원이를 밖으로 끌고나가더니 대상남자를 데려 왔으니 빨리 가자고 졸라댔다.

한달전, 최원이가 홀로서 7평방짜리 세집살이를 하는 것을 본 추월이는 결혼이 한시가 급하다며 사흘이 멀다하게 남자를 데리고 와서는 선을 보이고 아니다 싶으면 최원이 말하기전에 돌려보내고는 또 다른 남자를 데려오군 하였다.

이번에 데려온 30대 중반인 한족남자(류봉군)는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에서 제일 가난한高庄子에서 사는 농민인데 1976년 당산대지진때 16살짜리 큰 남동생을 데리고 흑룡강성 록도향 로송령촌에 피난민으로 와서 년년생조카가 셋이나 달린 누나네 집에서 근근득식을 하였다. 데리고 온 동생은 속셈이 깊어 자기가 번 돈을 자기가 챙겨 결혼을 했는데도 착해 빠진 봉군이는 누나네 식구들과 네것 내것이 따로 없이 지내며 제노릇도 못하였다.

30이 되도록 어머니 말만 듣고 살아온 최원은 “남자의 속됨을 알려면 한동안을 지내봐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있는가?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못되니 하루 빨리 결혼하고 살아보다가 괜찮으면 살고 아니면 리혼하여 처녀라는 모자나 벗어버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고 하니 어머니도 마음대로 하란다.

1991년 2월 4일 최원은 간단한 옷가지들 챙겨가지고 온 봉군씨을 데리고 식당에 한상을 차려놓고 어머니, 언니, 동생, 추월이네 부부, 세집주인을 청해 한때를 대접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남편은 결혼 첫날부터 맨날 돈이 없다는 소리다. 결혼식에 입은 옷도 빌린 것이란다. 다섯 형제가 째지게 가난하다보니 결혼 때 부조를 하는 형제가 없었다. 당산에서 막내시동생이 가져온 400원도 농촌신용사에 대부금이라니 그 자리에서 돌려줬다.

사지가 성한 사람이 어떻게 살면 옷까지 빌려 입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남편의 재산이란 나무상자 두개, 덮던 이불 한 채에 남들게서 꿨다는 현금이 1200원, 최원은 그 돈에서 600여원을 주고 흑백텔레비죤를 사고 나머지로 남편의 겉옷 두벌과 솟 옷을 몇 견지를 사니 돈이 거덜이 났다.

결혼을 해서야 최원이는 돈의 중요성을 알게 되였고 근심이 태산 같았다.

신체장애로 아이를 못가질가봐 걱정했는데 결혼하자 임신했다.

1991년 12월 24일 최원이는 열두번째로 수술대에 올랐다. 먼저 열한번은 다리치료를 위한 수술이였다. 태여난 아이는 딸이였다.

온 겨울 눈이 내리지 않더니 성탄절을 맞으며 그날 따라 가벼운 눈이 내리렸다. 그래서 이름을 “雪英”이라 지었다.

해산통증으로 시달리고 있는데 당산에서 막내시동생이 찾아와서 사천성에 가서 녀자를 사와야겠다며 도와 달란다. 최원은 장가를 못 가도 사람을 사고 파는 불법은 안된다며 돌려보냈다.

농촌사람들의 성시사람 기대가 너무나도 컸다. 시집동네서 유일한 성시사람인 최원은 온친족들의 우상으로 되였다

천교령농촌에 있는 큰 시동생 일가와 로송령에 있는 이상 시우이네는 거의 달마다 최원네집에 오는데 련애도 못하고 결혼한 최원에게는 그들이 반가울리 만무했다.

민족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려니 짜증만 나더니 세월에 따라 익숙해지고 정이 들었다.
                        
첫 “대접”

딸의 돌생일을 쇠자 마자 시어미니께서 기별이 왔다. 양력설후 막내시누이가 결혼식을 하니까 손녀도 보고싶고 하여 꼭 왔다가란다.

최원이는 눈앞이 캄캄해났다. 그 추운 1월에 불편한 몸으로 젖먹이 애까지 데리고 먼길을 떠나기도 힘들지만 손에 쥔돈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손에는 딸의 생일때 받은 부조돈 170원밖에 없는데 말이다.. 이돈으로는 차비도 모자란다.

결혼한지 2년이 되도록 시집에 가보지 못했으니 가는 것이 도리였다. 고민 끝에 주머니사정으로 가벼운 선물을 챙기고 길을 떠났다.

20여 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시집에서 사는 현성에 도착하니 저녁때쯤이 되였다.
류씨가문의 첫 연구생 류설령(딸)이 부모들과 함께 청도유람을

사촌시동생이 노새를 메운 수레로 마중을 나왔다. 수레를 보니 온통 노새똥으로 도저히 앉을수 없었다. 헬치어를 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리는데 남편이 자전거를 타고 뒤를 따랐다. 마을에 들어 서니 남편이 양철로 된 큰 대문을 가리키며 저집이란다.

마당에서 서성거리던 안로인이 최원이 올리는 인사는 받는둥 마는둥 어색한 표정으로 올리 보고 내리 보기만 하였다. 느리가 이정도로 병신일 줄을 몰랐던 모양이다.

남편에게 업혀서 집에 들어가니 집안사람들이 서로 쳐다보며 어색해 하였다. 집안은 초라하기로 말이 아니였다. 신혼방이 깨진 유리창문에 때투성 문보가 걸려있었다.

시꺼먼 대들보에 달린 전등불은 어찌나 어두운지 사람을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집바닥은 굳어진 흙덩이로 울퉁불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초불을 들고와서 최원을 쳐다봤다.

정전으로 초불을켜고 저녁을 치른후 최원이 갖고 온 짐을 풀었다.

시어머니한테는 현금을 30원 드리고 기타 친족들에게는 도문서 생산한 비닐쌀함박, 비닐물바가지를 선물로 내놓았다.

이틑날 아침, 저쪽 방에서 시어머니가 울며불며 야단을 쳤다.

최원이 딸애를 내려놓고 나들이 바지를 입은 채로 한 메터도 더 넘는 온돌에서 풍덩 땅바닥에 떨어진후 질질기면서 그쪽 방에갔다.

친척들로  빼곡한 방에서 시어머니가 가슴을 치고 코, 눈물을 흘려가며 야단법석이였다.

알고보니 오라는 목적이 돈이였는데 빈손으로 왔다는것이다.

기실 최원이는 시어머니를 잘해 드리려고 50전짜리 두부도 못 사먹으면서 절약해서 30원이고 50원이고 있는대로 부쳤고 결혼할 때 시동생이 갖공온 400원까지 돌려보냈는데 말이다. 

최원이가 울분을 참으면서 일전 한푼 팔지 않고 며느리를 삼고 손녀까지 봤으면 됐지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더라도 욕은 하지 말라며 언녕부터 하고 싶던 말을 거의 두 시간을 했더니 시어머가 할말을 잃었다.

최원이는 참았던 눈물을 쏬았다….

저녁에 만두를 찔대 쓰는 떡보가 너무나도 어지러워 꺼림해 했더니 남편이 공소사에 가서 천을 사왔다. 최원이 쓰던 떡보를 땅바닥에 던져버리니 6촌 시동생이 두덜거리며 밖으로 씽 나가버렸다.

이튿날 남편이 온마을에 조선족며느리가 시어머니가 쓰던 떡보를 던져버렸다는 소문이 퍼졌더란다.
돌아오는 길에서 남편이 다시 또 오겠는가는 물음에 반문하였다.
“당신네는 모두가 사지가 성한테 왜 그렇게 가난하고도 우매한가?”
“그들의 힘이 되려면 우리가 일어서야 한다. 지혜로 빈곤서 해탈시키자”
우리가 춰서야 한다
돌아와서 최원은 남편에게 아이스크림장사도 시켜보고 양고기꿤장사도 시켜밨는데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였다.

최원이 남편더러 인력거를 하라고 권했더니 그런 일은 죽어도 못하겠단다.

억수로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최원은 아이를 남편한테 맡기고 돈을 벌러 떠나겠다니 그제야 남편이 분부대로 하겠으니 제발 아이만을 잘 키우란다.

그래서 현금 800원을 빌려다가 삼륜인럭거를 마련해 남편에게 줬더니 첫날 오전에 24원을 벌었다. 반천에 반달집세를 번 셈이다.

최원은 푼돈까지 아껴가며 인력거를 만드느라 진 800원과 남편의 호구 천입으로진 빚까지 몽땅 갚았다. 그리고 어머니와 언니의 방조로 남편에게 삼륜모터찌클을 사주었다.
그런데 처음에 순박하고 착하던 남편이 거짓말을 하고 도박에 정신을 팔 줄이야.

1996년 10월18일에 남편이 큰 일을 냈다.

그날 오전, 량수탄광에 갔다가 두시간이면 온다던 남편이 저녁 7시에 돌아와서 와들와들 떨면서 하는 말이 량수탄광까지 실어준 사람이 돈을 주지 않으니 분김에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서 사람을 쓰려 눕혔다는것이다.

이튿날 시교통경찰대대에 불러간 남편이 이틑날에 돌아왔다. 남편의 말이 자기가 쓰러진 사람을 그대로 놓고 도망친 바람에 뒤에 오던 차들에게 깔려 죽었다는것이다.

8개월후 최종판결이 사망원인이 술에취한 대상에게 있지만 인도주의차원에서 피해자가족에 5천원을 배상한다.

최원이 로송령에 가서 일주일간 묵으면서 돈을 해결해 가지고 집에 와서 밤늦게까지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다. 시동생을 시켜서 도박판에서 남편을 데려오자 최원은 억이 막혀 죽어버리는 것이 고통에서 해탈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최원은 남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딸애를 데리고 집을 나서면서 남편더러 따라오라고 하였다.

“나도 싸우기가 지겹고 당신도 나한테 당하면서 사는 것이 지겨우니 우리 다 죽어버립시다.”

처음에 버티던 남편이 따라 나섰다. 세식구가 강물이 제일 깊은 북강<<팔엽교>>중간까지갔다.

남편이 누구부터 뛰여 내리는가고 물었다. 최원은 모두 당신 탓이니 당신부터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남편은 자기 도움이 없이는 최원이 뛰여 내릴수 없으니 자기의 도움으로 최원부터 뛰여 내리란다. 영문을 모르는 딸애는 울기만 댔다.

이때 자전거를 탄 웬 남자가 오더니 조선말로 말로 물었다.

“무슨 못 넘을 고비가 있다고 바보짓을 하오? 아이를 봐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오. 아무리 힘들어도 살길이 생기요…”

최원은 설음이 북받쳐 엉엉울어댔다. 남편은 죽어도 아이를 시동생한테 맡겨놓고 죽자며 최원이를 힘껏 당겼다..

최원은 이틑날에 법원에가서 돈을 바친후 이번 기회에 남편을 혼내겠다는 생각으로 리혼을 제기했다. 생각 밖에 남편이 동의하니 위주임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이틀후 가도에서 파견한 조해원들이 류봉군이 한번만 도박을 하면 리혼을 시키고 호구를 하북성에 돌려보내겠다니 겁에 질린 남편이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한다.

 그후부터 거의 일년간을 지켜보니 남편이 확실히 도박에서 손을 뗐다. 최원은 남편과 함께 다니며 남편이 4간에 진 빚을 몽땅 갚았다. 그리고 120평짜리 아빠트를 사서 “최원단란글방”을 차리니 날 따라 글방이 흥성하였다
 
<<아픈손가락>>을 치료
.
최원은 남편을 “다리”로, 시집동생들을 “아픈손가락”이라며“치료에 힘썼다.

천교령촌에서 가난하게 지내는 큰시동생네 세식구를 도문에 데려와 인력거까지 마련해 주며 직업을 알선했더니 몇 년이 지나자 시동생은 승용차에 아빠트까지 마련해 가지고 택시업을 하면서 빈곤에서 해탈되고 행복하게 생활한다.

로송령에서 힘들게 사는 큰 시누이네 큰 아들 학습지도로 복동탄광학교에 입학시키고 약속대로 학기마다 백원씩 도왔다. 시조카는 학교서 일등생으로 졸업을 앞두고 학교가 페교하자 그만이 유일하게 장춘시 양초구(羊草沟)탄광에 배치되였다. 시조카는 최원의 지도로 통신대학을 졸업하고 탄광기술원으로부터 당위서기, 부단장으로 발탁되였다.
결혼을 못한 로송령의 시조카를 자기집에 데려다 호구를 올리고 일자리까지 마련해 자립하게 하였다.

경상적으로 하북성 시동생들의 생활정황을 알아보고 학원생들을 동원해 계절에 따라 많은 옷과 신을 모아서 보내 준데서 온 동네사람들이 부러워했다.

 한편 막내시동생과 막내시누이가 당지 해산물을 가지고 연변에 다니며 장사를 하게 하면서 그들의 빈곤해탈에 한몫을 담당했다.

시어머니의 80세탄신에 경상적으로 보내는 생활비외 새옷과 현금 천원을 더 보냈다. 년로한 시어머니가 행동을 자립하지 못하게 되자 도문에 모셔와 치아를 해드리는 등 효성을 하였고 사망후 도문서 한족이 풍속에 대로 장례식을 치렀다.
 
류씨가문의 연구생

최원에게는 딸이 하늘이 내려준 천사로 그렇게 소중하고 사랑스러웠지만 총애는 안 했다. 딸애더러 어려서부터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해야 한다고, 공부가 유일한 출로가 아니라고 한번도 과외과당에 보내고 않았다. 반면에 딸의 포부와 장기를 키우기 위해 가족려행도 조직하고 서법과 색스폰공부에 심열을 기울였다. 딸애가 학교에 다니며 신문,잡지,텔레비,컴퓨터를 마음대로 보고 하고픈 일을 해도 관계치 않았다.

 “모친상”을 보면서 자란 딸애는 소학교 5학년 때 전국적으로 3만 5000명이 참가한 제1차 《창신컵》 서법경연에서 3등을 따냈고 초중 때에 서법 10급, 색소폰 9 급에 통과되였다.

딸애는 긍정적인 사유에 견식이 넓고 목표를 세우면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운남사범 대학>>에서 학생회선전부장으로 활약했고 한국 연수생에도 뽑혔으며 졸업후 두번 친 연구생시험이 <<운남사범대학>>, <<연변대학>>등 대학에서 요구하는 점수선에 도달하였지만 포기하고 자기의 목표대로 세번만인 올해에 중국에서서 손을 꼽는 <<중국해양대학>> 의 연구생에 합격되였다.

인터뷰를 마치며 최원부부가 하는 얘기다.

“폭풍이 지나간 들에서 꽃이 피고 불에 탄 흙에서 새싹이 돋는것이 자연의 섭리다. 아니면 나에게 오늘의 행복이 있을수 없다“(최원)

 “우리 류씨가문에서는 최선생을‘주석’이라고 부르며 그의 말은 백의백순(百衣百順)으로 불통이 없다.”

“최선생은 나를 도박판에서 구해냈고 지혜롭게 금연시켰다. 나의 인생을 총화하면 ‘99% 실패 1% 성공’이다. 1%성공이란 바로 인생의 동반자로 최선생을 선택한것이다.” (류봉군)
 
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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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서 업주에 의해 방치된 서창권씨 조선족단체 도움으로 산재처리    (흑룡강신문=서울)나춘봉 특파원 = ‘건축현장에서 사고 당한 후 집에 방치돼’란 제목으로 흑룡강신문 한국판(2013년 1월 15일~31일)에 보도되어 사회적인 주목과 관심을 끌었던 중국동포 서창권씨 사건이 중국동포와 관계단체의 도...
  • 2014-06-09
  • 편집선생님: 저는 광동성 훈주시에서 사업하는 조선족처녀 오연(吴燕)입니다. 오늘 귀 신문을 통해 고마운 고향사람들에게 저의 마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지난달초 년휴를 맞게 된 저는 부모님을 뵈려고 고향인 길림성 왕청에 당도하였습니다. 이튿날 오후 세시경,저는 택시를 타고 연길백화왕청분점앞에 내려 택시비를 치...
  • 2014-06-06
  • 전국우수당사업일군인 한무길로인이 병석에서도 불우학생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전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있다. 지난 5월 19일,연길아리랑방송“나눔과 행복”코너에서 어머니가 사망한후 외할머니와 함께 힘들게 살아가고있는 안도현조선족중학교 류계영학생의 사연을 듣게 된 한무길로인은 몸이...
  • 2014-06-05
  • 화룡시 룡성진 토산자촌에 가면 초록빛으로 물든 논옆에 채규호(57살)씨의 작업실이 있다. 호두껍질로 장식용 생활용품을 만드는 공방이다. 목발을 짚은채 마당으로 쭉 내려오는 채규호씨가 활짝 웃는다. “어휴, 금방 찾으셨네”라며 쏟아내는 목소리가 유난히도 살갑게 느껴온다. 공방은 지난 2009년에 사람의...
  • 2014-06-04
  •   (흑룡강신문=하얼빈) 정명자 기자 = 할빈시조선족녀성친목회는 설립 20주년을 맞이하여 5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할빈시 우의궁에서 할빈시 팔순이상의 어르신 35명을 모시고 성대한 경로잔치를 열어 로인을 공경하고 효도를 제창함과 더불어 젊은 세대들에게 '효'에 대한 전통문화를 일깨워주었다. 그중 년세가...
  • 2014-06-04
  • 연변불로송합창단에 들어서면 “합창단은 나의집 우리는 한집식구”라는 취지표어가 정답게 맞아준다.창단 11년이 되는 이 노래교실은 지금 80명 학원들이 자기집을 가꾸듯이 꾸려가고있다. 김광옥 김연옥 두자매는 2004년부터 이 합창단의 학원생이 되여 지금껏 열심히 다니며 행사마다 앞장에서 기부하며 기여...
  • 2014-06-03
  • “우리 쾌적하고 살맛나는 도시에서 살아요…” 벌써 단오라니…봄이 벌써 가고있고 낮은 한여름인것 같긴 하지만 가는 봄이 아쉽다. 대지에 푸르름이 더해가는 요즘, 연길시와 돈화시가 전국 현급시 록색도시화지수 100강에 편입됐다는 소식이 전해져 가는 봄의 아쉬움을 조금은 달래본다. 자치주 ...
  • 201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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