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방송국 PD에서 모텔 청소부까지...박연희씨의 파란만장한 한국생활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2월21일 09시30분    조회:120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한 지 6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나에게 한국은 여전히 외국 같아요. 점점 더 어렵네요.

▲ 박연희, 조선족 연길시 태생

한국행을 결심하다

박연희 PD가 한국행을 결정했을 때 주변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중국에서도 한창 잘 나가는 그녀가 굳이 한국을? 왜? 하는 반응이었다. 한국에 오기 전 그녀는 연길시 방송국에서 8년동안 책임편집으로 일했고 연길시TV에서 PD직으로 일했다. 그녀가 맡은 프로는 한국의 “인간극장”과 비슷했는데 작가였던 그녀는 취재를 손쉽게 해냈고 PD일은 그녀의 적성에 맞았다.

그녀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다. 당시 그녀의 아들은 지방에 있는 대학에 입학을 했는데 그녀의 수중에는 등록금을 낼만한 거액의 돈이 없었다. 오랜 고민끝에 그녀는 한국에 와서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 외국도 아닌 고국이라 말도 잘 통하지, 그녀가 가진 경력과 재능으로 충분히 돈을 잘 벌 자신이 있었다. 50세, 반백의 나이에 그녀는 한국으로 왔다. 그녀의 한국행 스타트는 꽤 화려했다. 오자마자 곧바로 동포신문사에 기자로 취직을 했던 것이다. 허나 월급은 짰다. 아무리 아껴써도 생활비를 내고 나면 한 달에 20만원밖에 남지 않았다.

3D업에 종사하다

결국 그녀는 기자일을 한 달만에 그만뒀다. 그때로부터 4년 동안 박연희씨는 식당의 주방 설거지, 홀 서빙, 모텔 청소부, 가정부, 현장 청소, 파출부 등 힘든 일을 닥치는대로 했다.

“처음 모텔에서 일을 할 때는 콘돔을 보고 기겁을 했죠.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어요.”

그녀는 이젠 옛일이 되어버린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하하 웃었다. 모텔 청소부의 일은 상상을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손님이 방을 비우기 바쁘게 양쪽 옆구리에 물통을 하나씩 끼고 달음박질치다시피 하면서 청소를 잽싸게 해야 했다. 하루종일 뛰어다녀서 나중엔 발뒤축이 아파서 걷지를 못할 지경이었다.

가정부는 모텔 청소부에 비해 육체적으로는 덜 힘들었으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였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보내는, 시시각각 감시받는 8시간은 그녀에겐 견딜 수 없이 고단한 나날들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너무 일하러 가기 싫어 울고 싶었고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마음이 홀가분해져 저도 몰래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한 번은 주인집에서 계란이 없어진 것 같다면서 그녀가 훔친걸로 의심을 했다. 그녀는 너무 억울했다. 그런 비도덕적인 행위로 의심받는다는 자체가 그녀의 인격에 대한 모욕이었고 담낭이 안 좋아서 평소에도 계란을 별로 먹지도 않는 그녀는 이런 일을 당하자 한심했다. 그래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걸 참아냈다.

그렇게 4년동안 피땀 흘려 번 돈으로 그녀는 아들을 졸업시키고 한국 나올때 지고 있던 빚도 갚았다.

국회의원 비서로 일하다

4년 후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없게 되자 그녀는 조금 여유있는 일을 찾아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몸이 반항을 했다. 4년동안의 허드렛일과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로 온 몸은 성한 곳 하나 없었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심신의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역시 그녀는 일할 팔자만 주어졌나보다. 그녀는 우연히 인연이 닿아 중국 통역 겸 인턴사원을 필요로 한다는 한 국회의원의 비서로 들어가게 되었다.

국회에서 일하게 된 두 번째 조선족이었다. 처음에는 국회의원 비서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다문화 특별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녀는 국회의원의 인터넷기사와 방송내용을 편집하여 블로그와 사이트에 올리는 일을 맡았다. 다문화 특별보좌관이 하는 일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들을 동원하여 투표를 하게 하는 일이다. 물론 고생이 막심했다. 영어도 모르고 전화내용도 알아듣기엔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 쉽게 물러서고 싶진 않았다. 사정에 의해 국회에서 10개월 정도 일을 하고 나오게 되었지만 그동안의 경험은 그녀에겐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한국인들과 소통을 하는데 더없이 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단체에서 일을 하다

그 후 그녀는 서울 서남권 글로벌센터의 중국 통역겸 상담원 일을 3개월 정도 하면서 엑셀, 파워포인트 작성법, 동영상 제작 등 업무에 필요한 지식을 부단히 쌓았다. 그 후 그녀는 OO주식회사의 중국마케팅 팀장으로도 일했고 2017년 1월부터는 이주여성단체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 생활한 지 6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나에게 한국은 여전히 외국 같아요. 점점 더 어렵네요.”

3D 직종에 종사하면 돈은 많이 벌지만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회사에 근무하려면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고, 그녀는 이것이 많은 조선족들의 공동의 우려라고 했다. 그녀는 늘 자기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어쩌면 필수이기도 하다. 한국어능력시험 6급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그녀는 듣기에서 점수를 많이 깎여서 너무 아쉽다고 탄식했다. 중국에서 50년을 살아온 그녀, 오랫동안 방송국에서 일을 했지만 여전히 한국말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것이 우리 조선족들의 약한 고리라고 한다.

요즘 사회는 인터넷이 발달했지만 돌아보면 개개인은 이전보다 더 고립되어있다.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 외국인은 더욱 고립되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그녀는 고민상담사 자격증도 땄는데 그것을 사용할 자리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여전히 조선족들은 이래저래 많은 제한을 받는다.

우리는 여전히 달라요

처음에 그녀는 조선족과 한국인은 똑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에 나와보니 조선족은 이방인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동사무소에 가서 인감증명을 떼는데 동사무소에 외국인에 대한 체크 시스템이 안 되어있어서 그녀는 한시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다.

“한민족이지만 우리는 많이 달라요. 다년간 서로 다른 문화속에서 생활해오다보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구요. 여전히 외국인 같아요. ”

글쟁이로서의 고충도 많았다. 철자, 띄어쓰기, 맞춤법이 우리가 전에 배웠던 것과 전부 다르기에 또 한 번 혼란을 겪어야 했다.

그녀가 활동하고 있는 조각보에서는 현충원에서 “사람책 이야기” 를 해마다 주최한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각 나라별로 하는 건데 자기 나라에서 배운 전쟁이야기를 한다. 이 활동을 통해 한국인과 외국인들이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 왜서 잘 어울리지 못하고 화합 단결이 잘 안되는 지를 알게 되었다.

조선족 알리는 일에 앞장서

▲ “한민족 그리고 조선족” 프로에 출연 (앞줄 오른쪽 첫번째)

2014년에 그녀는 “한민족 그리고 조선족”이란 대담프로에 주연으로 출연해 한국사회에 정확하게 조선족을 알렸으며 2015년 4월 MBC 다큐스페셜 “거리의 피아노”에도 출연했다.

2015년 11월에 그녀는 “동포모니터링단”단장 직을 맡아 동포이미지 개선을 위해 열심히 뛰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신났던 한 해였다고 그녀는 회억했다.

▲ KBS 한민족 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출연 (오른쪽)

동북아평화연대와 함께 모니터링단 일을 하면서 한국언론의 취재도 많이 받았다. KBS “한민족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한민족 네트워크”….한국사회에 그래도 동포들이 자그마한 돌멩이를 던져 파문을 일으키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보람찼던 것 같다고 그녀는 이야기한다.

힘든 생활이 꽃피운 창작열

개인적으로, 작가로서의 성취는 많은 작품을 탄생 시킨 점이다. 그녀는 한국에서의 어려운 생활, 고달픈 몸을 늘 글로 풀었다. 중국에 있을 때 쓴 작품은 다 해봐야 60여편밖에 안되는데 한국에서의6년동안에 100편을 썼다. 수필, 수기 80편, 고민상담 20편. 한국에서 작가로서의 큰 성취를 이루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에는 후회도 많이 했다. 중국에 있을 때 2007년에 방송 사업에서는 kbs세계한국인 방송대회 서울프라이즈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연길시TV에서는 상을 못 타고 한국으로 온 것도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국은 언론이 더 자유롭고 글, 시각, 사회가 모두 열려있어서 작가로서의 그녀에게는 눈을 뜨게 한 세상이었다.

한국에서의 빡센 스케쥴, 놀면 안된다는 강박관념도 중국에 있을 때의 마인드와는 천양지차였다. 한국에 있는 재한동포문인협회의 대부분 회원들도 노가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글을 쓴다. 그만큼 문인들은 글쓰기가 절실하다.

여행 마니아로 변신

글쓰기 외에 그녀가 스트레스를 푸는 또 하나의 방법은 여행을 즐기는 것이다. 토, 일 빨간 날짜만 되면 그녀는 무조건 여행을 떠난다.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남이섬, 김유정문학관, 목포, 진도, 제주도 등...... 그녀는 때론 혼자서도 기꺼이 여행을 떠난다.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데 그것을 분출하는 출구가 있어야지 그것을 풀지 못하면 좌절하기 쉽다는 것이 그녀의 관점이다. 요즘 그녀는 완전 여행마니아가 되었다. 기차여행, 전철여행, 당일치기, 2박3일로 배낭 여행도 떠난다. 만원의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지혜와 센스를 키웠다. 추석, 구정, 크리스마스에는 무조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은 그녀 생활의 활력소이고 충전소이다. 그녀의 작품 중에 18편은 여행수기이다. 이제는 주변의 지인들이 한국의 명소를 추천해달라고 찾을 정도로 그녀는 유명해졌다.

앞으로의 희망

“책을 한 권 내고 싶어요”

그녀는 어려운 한국생활에서 쓴 생생한 체험담을 책으로 묶고 싶다고 했다. 이외에도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각보”에서의 “삶이야기”를 더욱 많은 조선족들에게 접목시키고 싶다고 한다. 1박2일로 여행을 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프로그램이다. 지친 이국생활에서 다문 하루만이라도 울고 웃으며 모든 아픔을 훅 털어버리게 하고 싶다고 한다.

돈을 많이 버는 건 나중 일이라며 그녀는 말한다.

“장기간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해와서 그런지 그것을 동포사회에 접목시키고 싶어요. 오지랖이라고 할까…... 늘 우리 동포들이 안쓰러워요.”

재한 조선족들에게 한마디

한국에 나와서 살면서 가끔 겪게 되는 일은 한국에 와서 10년을 산 사람들이 모임에서 한국인을 많이 욕하는데 그건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라고 본다. 한국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만 자신이 살아가는데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글쓴이: 곽미란
중앙인민방송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어여쁘던 새색시의 머리엔 서리가 앉았고 백년해로를 약속했던 령감은 먼저 떠나고 어느새인가 혼자가 되여버렸다. 60여년만에 황혼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 홀로&nb...
  • 2017-05-15
  • 따스한 가족애로 동심에 꽃을 피우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것도 아닌데 추억속 학교교실의 풍경처럼 너도나도 도시락 꺼내기에 바쁘다. 도시락의 모양도 가지가지. 사각형, 원형, 납작한것이 보이는가 하면 키가 큰것도 눈에 띈다. 반찬도 다양하고 먹음직스러운데 더욱 눈길을 끄는것은 도시락을 만...
  • 2017-05-15
  • 길림신문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19) ◇최돈걸(장춘)   올해 7월이면 내가 고중을 졸업한 지 꼬박 60주년이 된다. 80을 바라보는 나의 평생에서 3년이란 세월이 그닥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항시 고중시절을 잊을 수 없다.   연변4고중(훈춘고중)은 1954년에 설립되였는데 당시 1, 2기...
  • 2017-05-13
  • 작업중에 있는 박태동씨. 연길시 중심에서 부르하통하가 조용히 누워있는 강변도로를 따라 동으로 가다보면 “일송정”이라고 쓴 나무간판이 발목을 잡는다. 통나무를 세로로 잘라 그 단면을 부착해 만든...
  • 2017-05-11
  • 2016년 2월, 시름시름 앓던 나는 골수종양이란 진단을 받게 되였다. 하늘이 무더지는듯한 정신적 충격과 순간마다 겪어야 하는 뼈를 깍는듯한 육체적 고통은 내 삶의 희망도 즐거움도 용기도 송두리채 앗아갔다. 육십 평생 파란만장한 인생, 기구한 운명에도 꿋꿋이 버티고 열심히 살아왔으며 누구에게 악한 일을 한적 없건...
  • 2017-05-11
  • 연길 건공가두 장청사회구역 “어머니절”활동 벌려   10일,연길시 건공가두 장청사회구역에서는“따뜻한 5월,어머니사랑에 보답하자”는것을 주제로 한“어머니절”활동을 벌리였다.   이날 장청사회구역의 사업일군과 대리자녀들 그리고 연변농촌상업은행의 자원봉사자들은 가화...
  • 2017-05-11
  •  교통사고로 생명이 위독했던 한 조선족 교포가 검단탑병원의 무료 수술을 받고 최근 완치됐다.   한국 검단탑병원은 지난 3월 31일 교통사고를 당해 생명이 위독한 상태로 내원한 중국 국적의 손(52)모씨가 3번에 걸친 대수술과 중환자실 집중치료를 통해 기적적으로 소생해 10일 퇴원했다고 밝혔다. 내원 당시 ...
  • 2017-05-11
  • 리창률 김옥자부부 길림성 백산시 혼강구 칠도강진 선명촌에 가면 완강한 의력으로 악한 병을 이겨내고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억센사나이 리창률(55세)씨와 그의 안해 김옥자(54세)녀성에 대한 이야기가 동네방네에 미담으로 전해지고있다. 리창률, 김옥자부부는 결혼해서 줄곧 농사일에 종사해왔다. 그들은 서로 아끼고...
  • 2017-05-10
  •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18) ◇강춘만(구태) “당신은 평생 어머님 곁에서 살아야겠어요.” 이는 안해가 밥상머리에서 늘 롱담 반,‘불만’반으로 해오던 말이였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깃들어있다. 사실 다섯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나는 신통히도 어머님의 입맛을 똑 떼닮아 어머...
  • 2017-05-08
  • 백혈병 앓고 있는 김령학생 가정에 사랑의 성금 전달 상해 조인봉사단 24명 회원들 포함, 연길 대련 광주 장백 등지에서 사랑의 손길 줄 이어 최창남(오른쪽)기자가 길령학생의 가정에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기자가 쓴 “백혈병을 앓고 있는 조선족중학생 김령이를 도웁시다”란 보도기사가 지면과 인...
  • 2017-05-08
  • 주방벽에 로친의 사진을 붙혀 놓고 보면서 감사하다는 90대 김수철 옹 4월 23일, 연변농학원 농학계의 “3인방”이라고 불린 김수철(93)옹, 황영수(85)옹,김륜범(82)옹이 조양천진 김수철댁에서 한자리를 하였다. 이날의 만남은 룡정의 황영수 옹과 김륜범 옹이 필자가 김수철 옹을 만나려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 2017-05-08
  •   지난 4월 29일, 기자는 청도 취재차에 이 도시 조선족층에서 각광 받고있는, 규모가 가장 큰 즉묵 백두산조선족양로원을 찾았다.   청도 즉묵시의 소구역내에 위치한 이 양로원은 4층짜리 아담한 단독 건물로 이뤄졌다. 봉페식 관리로 운영되고있는 이 양로원은 경비원이 일일이 방문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대문...
  • 2017-05-05
  • [백성이야기54] 색바랜 사진을 따라 찾은 옛 이야기  림춘애: “그때 그 시절 우리의 제일 큰 소원은 모주석을 만나는 거였지요.”   1957년 주중유고슬라비아 대사관의 연회에 참석한 중앙민족학원 소수민족학생들, 첫줄 왼쪽 첫번째 학생이 림춘애. 지난 력사의 한 장면은 문뜩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
  • 2017-05-05
  • 치료중인 김령학생 “백혈병으로 앓고있는 조선족중학생 김령이를 구합시다”이는 4월21일, 백산시조선족로인협회에서 협회회원 김경웅(75세), 김영수(73세) 로인부부의 친손녀 김령이를 살리기 위해 창의한 발기문이다. 금년에 17세에 나는 김령(金灵,2000도생)이는 백산시 제9중학교 초중3학년 학생이다. 얼마...
  • 2017-04-28
  • 인생은 언제나 초보                  정련 [서울=동북아신문] 이해한다고 안다고 함부로 말했던 모든 상대에게 사과한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겪고 화를 내고 하는 과정이 얼마나 다른 건지, 요즘 초보로서 새로이 겪는 모든 것들 때문에 세삼스럽게 배...
  • 2017-04-27
  •                (흑룡강신문=하얼빈) 피금련 특약기자=4월 26일, 밀산시조선족소학교 건교 70주년에 즈음하여 중국 조선족 저명한 서예대가 최원택선생이 모교인 밀산시조선족소학교를 방문했다.   전교 사생과 어울린 축제의 한마당에서 최원택선생은 자신의 혼과 열정이 새겨...
  • 2017-04-27
  • 침구치료중인 김춘복 원장. “아이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싶어 30대 중반에 의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기자와 마주앉아 여느때와 진배없이 담담하게 터놓는 일본 긴자(银座) 중국중의병원의 김춘복(43세)원장, 손풍...
  • 2017-04-27
  • 사람들은 가끔 하늘을 보며 “나도 저 새처럼 자유로이 날아 어디든 가고싶다”는 말을 하곤 한다. 자유로이 산다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에 새가 부러워졌을거다. 오늘은 새처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될만한 분을 쫓아가보자.   >" /> ▲아부다비 황궁  두바이 려행이 성행되...
  • 2017-04-27
  •   김경숙부부 귀향해 창업 인생의 성취감 맛본다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에 위치한 삼림토닭사육장의 경리인 김경숙(34살), 김경운(40살)은 고향에 돌아와 창업의 꿈을 펼치고 여러가지 어려움을 이겨나가면서 현재 인생의 성취감을 맛보고있다.   “부모님들도 이젠 년로하여 보살핌이 필요한데다 ...
  • 2017-04-26
  • '고향사람들에게 건강과 행복을…' 3만 1000여원의 사랑의 물품을 전달   일본류학길에 올랐다가 지난 2015년에 고향 연길에 돌아와 창업의 꿈을 무르익히고있는 연변창의미의료기계유한회사 마성혁(38살)총경리의 소망은 고향사람들에게 건강과 행복과 즐거움을 선물하고픈것이다.   마성혁총경리...
  • 2017-04-20
‹처음  이전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