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오오무라와의 인터뷰 마치면서
2016년 10월에 처음 뵈였던 이래로 여러번 드린 메일에 “래년 정월쯤 한번 놀러 오세요”라는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님의 회신을 받았던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긴장되면서도 흥분된 마음을 달래면서 교수님댁의 주소대로 살며시 찾아가 봤다. 절대로 실수할 수 없는 분인지라 주변 주차장상황이며 가는 길에 소모되는 시간이며 상세히 체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날저녁 부푸는 심경을 《길림신문》[해외기별] 편집을 책임지신 안상근기자님께 전화로 말씀드렸다. 오오무라교수님을 만났을 때부터 내가 취재욕망을 갖고 있는 사실을 알고계신 안기자님이 “간단한 기사가 아닌 계렬기사 써보세요. 왠지 기대감이 앞서네요”라고 하셨다.
오오무라교수님과 함께
그 한마디에 용기와 힘을 얻은 나였다.
올해 1월 19일 오후 1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지니고 교수님저택의 초인종을 눌렀다. 교수님과 사모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사모님과는 첫대면이였지만 “연변아가씨가 오셨네”하시면서 허물없는 롱담으로 대해 주셨다.
구면인 것처럼 느껴지고 무작정 내편이 되여주실 것 만같은 근거없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에 교수님은 취재를 거부하셨다. 놀러오라고 했지 취재는 허락한 적이 없으시다 하셨다. 사실이였다. 감히 여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교수님을 취재하려는 일념에서 근 한달반동안 교수님의 저서를 열심히 읽은 사연을 말씀드리면서 중점과 의문점을 상세하게 메모한 필기책을 보여 드렸다. “허락을 안해 주시면 다음날에 또 초인종을 누를 수도 있습니다”라고 감히 롱담을 하였다.
“차나 맛있게 드세요”하시는 교수님곁에서 사모님이 한마디 하셨다. “연변의 기자잖아요. 《길림신문》이라 하잖아요.” 그 말씀에 대답이 없으신 교수님이셨고 거이 절반 허락하신 모양이라는 사모님의 눈길에 안도가 되였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연변에 가실 때마다 《길림신문》을 즐겨읽으셨다고 한다. 여러가지 자료를 같이 찾는 과정에 중요한 파일에 보관하신 그때의 《길림신문》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날부터 근 두달반동안, 매주 금요일 오후시간은 오오무라교수님 내외분을 만나는 귀중한 시간이 되였다.
오후 1시면 교수님댁의 대문은 열려져있군 하였다. 그렇게 초인종의 신세도 안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댁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신경을 써주신 사모님께 항상 죄송했다. 커피며 차며 과일이며 준비해 주시는 마음쓰임에 황송하기 그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번에 근 3시간씩 꼬박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취재를 받으신 교수님이 얼마나 고달프셨을가. 게다가 여러가지 론문지필과 번역업무때문에 시간이 모자랄 시기였는데…. 늦게 나마 죄송함을 말씀드리고 싶다.
사실 윤동주 관련지식이 많이 결핍했던 나는 엉뚱한 질문도 여러번 했었다. 그때마다 교수님은 알기 쉽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셨고 사모님 역시 녀성적인 립장에서 여러가지 해석을 해주셨다. 연변을 떠난지 20년이 넘은 나는 연변의 작가들에 관해서도 희미한 점이 너무 많았다. 역시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하나 리해를 해야 만 했다.
여태껏 나처럼 교수님정력을 소모시킨 취재가 있었을가…. 교수님은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마음에 드셨다 하시면서 번마다 저서들중 나한테 맞을 것 같은 책들을 골라 주시군 하셨다. 하여 석달에 가까운 기간에 나의 책장에는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님의 코너가 생기게 되였다.
참으로 영광스럽고 행복한 취재였다.
한달쯤 취재를 하였을 무렵에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였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교수님과 한울안에서 지낸 사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교수님부부가 연변대학에 계셨을 때 주숙을 잡으셨던 곳이 우리 집과 100메터쯤 사이둔 집이였고 나의 아버님과도 아시는 사이셨다. 너무나 놀랍고 반가운 사실에 특별한 인연을 느끼게 되였고 그날이후로 마음속으로 부모님처럼 느껴짐을 어쩔 수가 없었다.
취재중 교수님이 때때로 자신의 기억을 사모님께 확인하시는 것을 보았다. 여러가지 자료를 사모님이 척척 찾아내시는 것도 보았다. 말수가 적으신 교수님을 대신하여 그때그때의 상황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실 때가 많았다. 시간에 맞추어 잠간 쉬라고 쵸콜렛을 내다 주실 때도 많았다.
2017년 윤동주기념행사에서의 오오무라교수님과 아키코부인님
윤동주 사적조사를 포함하여 연변에 가실 때는 항상 같이 다니셨다고 하는데 사모님의 사진을 찾기 힘들어서 애먹었던 나다. 후~하고 한숨을 쉬는 나에게 사모님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나는 촬영사였어…”
나는 사모님과 교수님 사이의 이야기도 쓰고 싶었다. 실은 너무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남아있는 것이다. 교수님은 동의하셨지만 사모님이 극구 반대를 하셨다. 교수님의 기사에 등장하여 초점을 흐리우기 싫으시다는 말씀에 마음이 뭉클해 났다. 사모님은 오오무라교수님의 평생의 동반자이자 제일 가깝고 만만한 조수라고할 수 있다. 그것에 만족하신다면서 구태여 앞에 나서는 것을 마다하셨다. 나는 언젠가 사모님이 허락해 주신다면 꼭 쓰고 싶은 이야기임을 잊지 않고 말씀드렸다.
취재를 마무리하면서 교수님께 사모님에 대한 한마디를 부탁하였다.
끝내 아무 말씀도 주시지 않으셨고 웃으시기 만했다. 문뜩 릿쿄대학에서 열렸던 윤동주기념행사 취재때의 일이 생각났다. 교수님의 소개로 릿쿄대학의 엄한 심사를 쉽게 넘었다고할 수 있는 그날 교수님내외와 함께 행사에 참가하게 되였다. 전철역에서 교수님을 부축하여 계단을 내리려고 하는 나에게 “나보다 저사람을 부탁하네”하고 교수님이 사모님쪽을 가리켰다.
참으로 아름다운 두분의 모습이였다.
바로 그게 아닐가. 구태여 말씀할 필요가 없으시는…
긴장과 설레임으로 시작된 교수님과의 인터뷰가 마감을 맞은 오늘, 허전함이 앞선 나는 자기도 모르게 교수님과 앞날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게 되였다. 한참 이야기하다 보니 교수님댁의 고양이 에미쨘이 나한테 기대여 뭔가 듣고 있는 듯한 감이 들었다.
“우리 고양이도 연변말에 습관이 됐나보네.”사모님의 웃음어린 말씀을 듣고서야 여태껏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던 교수님과 내가 어느새 거실바닥에 편히 마주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나 따뜻한 방이였고 편안한 자리였다. 촬영사이신 사모님은 어느새 찰칵 샤타를 누르셨다.
그림을 그리시는 사모님은 너무나 감상적인 분이시다. 아쉬운 나의 심정을 꿰뚫어 보신 듯 CD플레어를 누르셨다. 노래 <선구자>가 흘러 나왔다. <선구자>의 가사를 읊으며 룡정에 찾아가니 가사에 씌여진 그대로인 룡정이였다며 그때의 감격을 못 잊으시겠다고 사모님은 말씀하셨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교수님과 사모님 그리고 나, 자연스럽게 <선구자>의 선률에 낮은 목소리를 모았다.
차분한 마음에 언제까지라도 이어졌으면 하는 그 분위기를 잊을 수 없다.
순간 교수님이 번역하신 일본어로 된 <선구자>의 가사가 머리에 떠올랐다..
一松亭 青き松は 老いに老ゆれど
一筋の海蘭江は千年の古のまま流る
かつての日 川べりに馬走らせし先駆者
きょうはいずこに荒れすさぶ夢見るや
어쩌면 조선문학에 대한 만능의 리해력을 가지신 분이 아니실가…이런 생각을 하면서 교수님댁을 나섰다.
먼 후날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볼 때 필경 오늘의 이 순간이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님과 아키코부인님과의 소중한 인연에, 그리고 긴 기사를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리홍매 일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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